#65
“성게알이 맛있어요.”
“아, 감사합니다…….”
반사적으로 대답을 하긴 했는데 모르는 목소리였다. 고개를 돌려보니 눈이 동글동글한 여자가 이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참치는 조금 복불복이고, 연어는 무난해요. 케이크는 딸기 올라가 있는 게 제일 맛있고요.”
“잘 아시네요.”
“오자마자 전부 먹어 봤거든요.”
수더분하게 웃은 여자는 이연보다 키가 한 뼘은 더 작았다. 곱슬거리는 단발머리가 가볍게 찰랑였다. 이십 대 초반이 겨우 됐을까 싶은 어린 얼굴이었다.
추천대로 성게알이 올라간 롤을 삼킨 이연이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행복한 웃음을 지었다. 맛있는 것을 먹은 것에 대한 반사 작용이었다.
“와, 진짜 맛있어요.”
“그렇죠?”
즐겁게 되물은 여자는 그 후로도 이연을 데리고 다니며 어떤 음식이 맛있는지 꼼꼼하게 일러 주었다. 수업을 열정적으로 듣는 모범 학생 기분으로 고개를 연신 끄덕인 이연은 추천 음식을 열심히 눈에 새겨 두었다.
“제 이름은 정이연이에요.”
“이세은이라고 해요.”
갓 스무 살이 된 세은은 주최자와 친분이 있거나 사업적인 관계인 건 아니고, 단순히 파티 구경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오늘도 오빠를 졸라 놀러 온 거라고 했다.
“오빠가 자상하네요.”
“늘 바쁜 사람인데, 대단하죠.”
그렇게 말하며 웃은 여자아이는 말하는 중에도 종종 홀의 풍경을 두리번거렸다. 이연이 의아하게 물었다.
“뭐 찾는 거라도 있어요?”
“아, 죄송해요.”
세은이 쑥스러운 듯 웃었다.
“홀도 사람들도 예뻐서 계속 보게 돼요. 동화 속에 나오는 무도회 같아요.”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감상이었다. 화려함으로 가득 찬 광경과 조금 이질적인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이연이 장난스럽게 말을 받았다.
“동화를 좋아하나 봐요.”
“네.”
놀리려는 물음에 돌아온 답은 순수했다.
“행복하게 끝나잖아요.”
세은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뜬 이연이 이내 진지한 얼굴을 했다.
“그렇죠. 저도 그 점은 좋다고 생각해요.”
둘은 조그만 비밀을 공유한 사람들처럼 웃었다.
“이연 오빠는 처음 보는 얼굴이에요. 원래 이런 자리를 별로 안 좋아해요?”
“저도 파트너로 온 거라서요. 평소엔 초대 못 받아요.”
이연이 소탈하게 말하자 세은이 꺄르르 웃음을 터트리며 그럼 우린 파트너 동지라고 속삭였다.
파티 구경을 좋아한다는 말은 사실이었는지 세은은 음식뿐만 아니라 사람들에 대해서도 잘 알았다. 저 사람은 누구, 저 사람은 누구……. 작은 손으로 가리키는 인물들은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었지만, 이연은 짐짓 열심히 호응해 주었다. 그녀가 정말로 대답을 원해서라기보다는 들어 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반가워서 알고 있는 정보를 두서없이 쏟아 내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저기 있는 사람이 한수아 씨. 잘 참석 안 하는 분인데 이번에는 오셨더라고요.”
“오.”
익숙한 얼굴이다. 이연이 모른 척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저 남성분은 누군지 모르겠어요. 엄청 잘생겼는데, 처음 보는 분이에요.”
저런 얼굴을 까먹을 리가 없는데……. 그렇게 말하는 세은은 산오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은근히 붉어진 뺨이 따끈해 보였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이연이 웃으며 호응해 주었다.
“그러게, 잘생겼네요.”
“그쵸? 한수아 씨 하고도 잘 어울려요.”
새삼스레 두 사람의 모습이 한눈에 담겼다. 하늘하늘한 차림에 유순한 웃음을 지으며 대화하는 수아와 그녀의 등을 지키듯 선 산오.
이상적인 연인처럼 보이는 모양새였다.
“그러게요…….”
세은의 시선이 이상한 게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더욱이 산오는 수아의 파트너로 들어온 거고, 보통 그렇게 입장하면 커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선남선녀가 붙어 있으니 그림 같다는 감상은 말할 것도 없었다.
왜 기분이 조금 가라앉는지 모를 일이다.
“이연 오빠는 누구랑 왔어요?”
“아, 저는 D…… 덕선 씨 파트너로 왔어요.”
D.S의 본명은 아직 이연에게 어색했지만, 그렇다고 엔지니어 명을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덕선 씨? 진덕선 씨요?”
세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는 사람이에요?”
“아뇨, 직접 뵌 건 아닌데…… 유명하시잖아요.”
비밀이라도 말해 주듯 얼굴을 바짝 붙인 세은이 소곤거렸다. 흘러나오는 이야기는 이연도 익히 아는 내용이었다. 진씨 집안의 가풍, 집안 어른과 덕선의 대립, 결과…….
‘흠.’
이연이 그런데요, 하고 덩달아 목소리를 낮췄다.
“혹시 덕선 씨가 뒤늦게라도 초능력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집안에서 인정받을 수 있을까요?”
“네?”
세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도 자세한 건 잘 모르는데, 여기 오면 무언가 방법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무슨 생각인지는 몰라도 잘되면 좋겠어요. 전에 덕선 씨 아이를 만나 본 적이 있는데, 너무 귀엽고 엄마를 좋아하는 아이거든요. 한숨처럼 늘어놓은 푸념에 세은이 저런, 하고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간절히 바라면 잘되지 않을까요? 저도 같이 기도할게요!”
“감사합니다.”
이연이 부드럽게 웃었다. 내밀한 이야기를 들은 것에 대한 동질감인지, 책임감인지, 세은의 이야기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변했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하는 말인데, 진희수라고 아세요? 변이종대응국장님인데.”
“아, 네. 국장님이 왜요?”
“듣기에는 진덕선 씨 따님 보호자가 되겠다고 먼저 나섰다고 했어요. 진덕선 씨하고 사이가 꽤 좋았다고 하더라고요. 원래대로라면 진덕선 씨 어머님이 손녀를 돌보셨을 텐데, 좀 까다로우셔서 아이가 편하게 지내기는 힘들었을 거예요.”
그렇다고 해도 아이를 대신 키우겠다고 나서는 게 쉽지 않은데, 대단하죠. 세은의 속삭임에 이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희수도 그 나름대로 최선의 조치를 취하려고 노력을 많이 한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희수를 대하는 D.S의 태도에는 찬바람이 불었다. 뭔가 다른 사정이 있나?
“야.”
“어, D, 덕선 씨? 이거 드실래요?”
세은과의 대화를 끊은 것은 D.S의 싸늘한 목소리였다. 언제 여기 왔지? 이연이 맹하게 접시에 있던 카나페를 내밀자 D.S가 대번 눈썹을 치켜 올렸다.
“덕선 씨이?”
“……덕선 누나?”
한숨을 쉰 D.S가 그를 잡아끌었다.
“그게 문제가 아냐. 이리 와.”
“네, 네? 이야기 고마워요. 재미있었어요.”
어리둥절하게 끌려가던 이연이 고개를 급히 돌려 세은을 바라보았다. 세은이 괜찮다는 얼굴로 손을 작게 들자, 이연 역시 마주 손을 흔들었다. 짧은 시간 동안 사귄 작은 친구가 다시 혼자가 되어 버리는 게 묘하게 눈에 밟혔다.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의아하게 물으며 무심코 수아와 산오 쪽으로 시선을 돌린 이연이 흠칫했다. 산오가 무시무시한 기세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왜, 왜 저래? 움찔한 이연이 저도 모르게 D.S를 방패로 삼아 산오의 시선에서 숨으려 슬금 움직이자, 꼬나보는 눈빛은 더 살벌해졌다. 안광이라도 뿜을 것 같았다.
“됐고, 난 이제 간다.”
“네? 갑자기, 악.”
문장을 마치기도 전에 D.S가 이연의 몸을 붙잡고 반 바퀴 돌았다. 얼결에 시야가 뒤집힌 이연이 작은 신음과 함께 휘청거리자, 기다란 손가락이 그의 어깨를 콱 붙들었다. 종잇장처럼 흔들리던 몸이 억지로 고정되었다.
“왜요, 뭔데요.”
“그놈, 어디 보고 있어?”
“그놈?”
“진희수 말이야.”
“엥?”
이연이 얼결에 D.S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옮겼다. 저 멀리에서 말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익숙한 얼굴이 홀의 중앙 쪽으로 다가서는 것이 보였다.
“국장님이 왜 여기?”
“몰라. 설마 올 거라곤 생각 못 했어.”
D.S가 빠르고 낮게 중얼거렸다. 희미하게 욕설도 들린 것 같았다. 평소의 무덤덤하고 심드렁한 태도와는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들키면 안 돼요?”
“저쪽 입장에서 보면 난 이런 자리까지 꾸역꾸역 기어들어 와서 콩고물 주워 먹으려 하는 실패자야. 좋게 볼 리가 없지.”
“에이, 그 정도까지는…….”
세은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오히려 희수는 D.S를 좋게 생각하는 것 같았는데. 그런 생각으로 달랬지만 D.S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저 자식 마주쳐서 괜한 구설 만들기 싫어. 들어오는 것까지 했으니 나머지는 너희 알아서 해.”
“그럼 D.S 씨가 미끼가 되는 계획은…….”
“그건 저 자식이 없을 때 얘기지. 그나마 너한테 언질이라도 하고 가는 게 마지막 예의야.”
“그래도…….”
“야.”
D.S가 화를 내는 것처럼 웃었다.
“넌 손님 중 하나일 뿐이야. 너희한테 이렇게까지 맞춰 주면서 좋은 사람 될 마음 없어.”
그녀의 말이 맞았다. D.S는 할 만큼 했고, 억지로 잡아 둘 명분도 없었다. 여기까지 협조해준 것도 그녀로서는 큰 결심을 한 것이다.
그래도 기껏 단서를 찾은 게 아쉬워, 이연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그런데 D.S 씨, 방금 저랑 이야기하고 있던 여자애 있잖아요.”
“어.”
“제가 얼핏 본 건데, 그 애한테…….”
작게 속삭이던 이연의 말이 어느 순간 흐려졌다. D.S가 의아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이연은 마치 어딘가에 크게 놀란 사람처럼 눈도 깜빡이지 않고 전방을 응시하고 있었다. D.S가 따라 고개를 돌리자, 이연이 보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방금까지 이연과 대화를 나누던 여자아이, 세은이 희수의 에스코트를 받고 있었다.
“저 애한테 팔찌가 있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