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킹 1위를 임시 보호 중입니다-68화 (67/250)

#68

“같이 가자니까.”

무슨 놈의 다리가 그렇게 긴지, 축지법 쓰듯이 성큼성큼 홀을 가로지르는 산오를 경보로 따라가려니 금세 숨이 찼다. 평소 줄곧 보폭을 맞춰 주었던 산오의 배려를 그제야 깨달았다.

“야, 너 다리 왜 이렇게 길어…….”

“조용.”

쑥스럽냐? 자식. 조용히 하라고. 이연의 실없는 소리는 산오가 턱을 까딱여 문 근처를 가리킨 후에야 멈췄다.

“저게 이세은인가?”

이연의 시선이 입구 쪽을 향했다. 구불구불한 단발머리에 커다란 꽃이 프린팅되어 있는 하얀 미니 드레스를 입은 여자. 세은은 어두운 얼굴로 바닥을 보며 걷고 있었다.

“어디 가는 거지?”

두 사람이 조심스레 거리를 두며 쫓았다. 홀을 빠져나간 세은이 엘리베이터의 반대편으로 향하는 것이 보였다.

한적한 복도를 걸어가는 걸음은 빠르고 다급했다. 바닥에 깔린 카펫 덕에 세은은 이연과 산오가 뒤를 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녀가 향한 곳은 비상구 계단이었다.

“나가려는 건가?”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대로 건물을 나가 버리면 곤란한 건 이쪽이다. 계단 난간을 쥔 이연이 아래에 대고 냅다 소리쳤다.

“세은 씨.”

“……이연 오빠?”

계단을 내려가고 있던 세은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뒤를 돌아보았다. 몇 계단 위에 서 있는 이연을 발견한 세은이 당황하며 다가왔다.

“여긴 어떻게…….”

“아까 인사도 제대로 못 하고 간 게 아쉬워서요.”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나불거리던 이연이 손을 내밀었다. 에스코트를 청하는 모양새였다.

“할 얘기도 있고.”

“무슨 이야기요?”

세은이 의아하게 물으며 손을 맞잡자, 이연이 빙긋 웃었다.

“이 팔찌에 대한 건데요.”

말과 동시에 반대쪽 손이 세은의 손목을 향했다. 가느다란 손목에 꼭 맞게 조절된 팔찌는 조금 뻑뻑했지만, 성인 남자의 힘으로 빼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순식간에 허전해진 손목이 조금 붉어졌다.

“무…… 무슨 짓이에요!”

당황한 세은이 이연에게 달려들었으나, 이연은 가볍게 몸을 비트는 것만으로 그녀의 손길을 피했다. 팔찌를 쥔 하얀 낯이 엄격하게 변했다.

“세은 씨. 이거 아주 위험한 물건인데, 어디서 난 거예요?”

“이연 오빠랑 무슨 상관이에요? 돌려주세요!”

세은이 날카롭게 외쳤다. 적의가 작은 얼굴 안에서 슬쩍 튀어나왔다.

그러나 이걸 순순히 돌려줄 생각은 없었다. 세은이 이 팔찌를 쓰게 내버려 두면 그녀 자신의 기력이 갈취되다 못해 종내에는 수빈처럼 정신을 잃고 쓰러질 것이다. 알면서도 그냥 눈감아 줄 수는 없었다.

“위험한 물건이라니까요. 세은 씨가 다칠 수도 있어요.”

“뭐가 위험해요? 그냥 예쁜 팔찌일 뿐인데.”

세은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그녀의 태도가 너무 당당했기 때문에 이연은 순간 헷갈렸다. 팔찌의 정체를 모르나?

단순히 선물받은 거라면 그럴 수도 있었다. 더욱이 그녀가 비초능력자라면…….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고민하던 무렵, 세은이 재차 외쳤다.

“평범한 팔찌예요. 좋아하는 가게에서 샀다구요!”

그렇게 말하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그래요?”

거짓말을 우기는 사람에게는 빼도 박도 못할 증거를 보여 주는 게 가장 효과적이었다. 이연이 팔찌를 제 손목에 끼우자, 뒤에 있던 산오가 나직하게 경고했다.

“정이연.”

으르렁거리는 것 같은 부름에도 이연은 돌아보지 않았다.

“걱정 마. 나도 정도는 알아.”

이 팔찌에 담겨 있는 초능력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기력을 많이 쓸 생각은 없었다. 그저 세은에게 반박할 수 있을 정도로만 보여 주면 됐다. 이전에 수빈의 팔찌를 사용했을 때 사용했던 기력과 출력의 비례를 생각하면…….

‘어?’

손에 힘을 준 이연이 무심코 눈살을 찌푸렸다.

분명히 팔찌의 초능력을 쓰는 건데, 무언가 익숙한 감각이 피를 타고 흘렀다. 수빈의 팔찌를 쓸 때보다 훨씬 적은 양의 기력이 팔찌로 빨려 들어갔다.

눈을 한번 깜빡이자, 하얀 입자가 세은의 손목과 계단 난간 주위에 모였다. 입자들은 곧 정교한 수갑 형태로 변했다. 당황한 세은이 손목을 움직였지만, 철컥대는 소리와 함께 막혔다.

“이거 놔줘요!”

세은의 외침은 이연에게 닿지 않았다. 팔찌의 능력을 쓸 때부터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이연이 아주 기묘한 얼굴로 제 손목의 팔찌를 바라보았다.

“……이럴 리가.”

없는데……. 촛불이 꺼지는 것처럼 희미한 뒷말이 숨 사이로 흘러나왔다. 나직한 중얼거림은 어쩐지 비명을 닮았다.

“세은 씨. 모르포를 알아요?”

“그런 거 몰라요. 놔주세요……!”

“모르포가…….”

이연이 멍하니 중얼거리다 말고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뒤에 산오가 있었다. 의심할 만한 말은 최대한 하지 않는 게 좋았다.

다른 종류의 초능력은 말할 것도 없고, 설사 같은 종류의 초능력이어도 보유자가 다르면 기력의 파장이 달랐다. 타인의 화염 능력을 모든 화염 능력자가 공유해서 쓸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방금 이연이 쓴 기력은 극소량이었다. 염력이라면 깃털을 간신히 들어 올리고, 근력 강화라면 철판을 조금 우그러트릴 수 있는 정도의, 아주아주 적은 기력.

고작 그 정도로 남의 초능력을 이용해 저렇게 정교한 수갑을 만드는 건 어림도 없었다.

단 하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허…….”

진짜 생각지도 못한 전개다. 이연이 헛웃음을 지었다.

간단한 논리였다. 남의 초능력으로는 안 되지만, 자기 자신의 초능력이면 가능하다.

팔찌에 담겨 있는 건 이연의 초능력이었다.

“이딴 걸 진짜 모르포가 만들었다고?”

본인의 능력을 본인이 갖다 쓰는 거니 적은 기력으로도 충분한 효율이 나는 것이다. 사실상 자기 몸에 있는 초능력을 쓰는 것과 크게 다를 것도 없었다.

이연이 계단에 발을 뻗었다. 둥글고 부드러운 눈매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한 칸씩 내려오는 걸음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으나, 어쩐지 섬찟하게 느껴지는 면이 있었다.

“이연 오빠랑 모르포랑 대체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러는 거예요. 모르포가 뭔지 알기는 아세요?”

“알죠. 전투 구역의 지형 설정 기능을 만든 사람이라면서요.”

아마 그녀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잘 알 것이다. 당연한 일이었다.

지형 설정 기능에 쓰인 실체화 능력도 이연의 것이었으니까.

아득한 기억 너머의 풍경이 불쑥 고개를 쳐들었다. 온통 새하얗고 새하얗던, 작은 감옥.

조그만 보석의 색이 흐려지는 것을 보며, 이연은 가만히 주먹에 힘을 주었다. 느리게 일렁이던 기력이 혈관 아래로 사라졌다.

그림을 잘 그려야 할 필요는 없었다. 필요가 없으니 열의도 없었다.

그는 그림 같은 게 없어도 모든 걸 구현할 수 있었으므로.

세은이 서 있는 계단의 한 칸 위에서 멈춘 이연이 허리를 숙였다. 그녀의 귓가에 얼굴을 댄 이연이 뒤에 있는 산오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그마하게 속삭였다.

“왜요, 세은 씨도 그 사람이 실체화 능력을 가지고 있을 것 같아요?”

지형 설정 기능에 쓰인 초능력이 담긴 팔찌의 소유자. 초능력의 주인인 이연이 능력을 숨기고 살고 있으니, 세은이 모르포와 관련이 없다면 상황 성립조차 되지 않는 연결고리였다.

한참 침묵이 흘렀다. 무언가를 계속 말하려는 듯 입술을 줄곧 달싹이던 세은은 이내 체념한 듯 입을 다물고 고개를 떨구었다. 다시 상체를 세운 이연이 풀죽은 어깨를 위로했다.

“너무 죽상으로 있지 마세요. 곧 놔줄게요.”

“……네?”

세은의 고개가 다시 들렸다. 혼란스럽다는 듯 그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

“팔찌 장사꾼이 누군지만 알려 주세요. 세은 씨가 팔찌 장사꾼은 아니죠?”

이연이 평소처럼 웃었다.

“저희 목적은 팔찌 장사꾼이거든요. 저는 정의의 사도도 아니고 대단한 야망가도 아니에요. 모르포, 그 인간이 뭐 하고 살든 관심 없어요.”

방금은 조금 흥분해서 묻긴 했지만. 미안해요. 조금 무서웠죠? 그렇게 말하며 이연은 항복하듯 장난스레 두 손을 들어 보였다.

“그…….”

세은이 인상을 찌푸렸다. 화가 난다기보다는 지금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다는 반응에 가까웠다.

쾅!

그러나 세은이 무언가 말하기도 전에, 희미한 폭발음이 들렸다. 평화로운 호텔에서 들릴 리 없는 과격한 소음이었다. 두 사람의 동작이 우뚝 멈췄다.

이연이 고개를 들고 거리를 가늠했다. 홀 안은 아니고, 여기서 가까운 실내였다. 이연의 뇌리로 복도를 걷는 길에 무심코 흘려봤던 방들이 스쳐 지나갔다. 호텔 홀, 회의실, 연회장, 세미나실…….

그리고 화장실.

실체 없는 불길한 직감이 심장을 살그머니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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