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그럼 뭔데.”
산오는 오랜 기간 공교육 대신 아주 기초적인 생활 교육만 간신히 받았다. 그것도 전문 교육자가 아닌 연구원들이 어쩌다 가르쳐 주는 것들뿐이었다. 그래서 말을 직관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었다. 아마 나비로 변하는 초능력을 얻는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정연이 주섬주섬 가방을 뒤지자 표지에 노란 나비가 잔뜩 그려져 있는 얇은 동화책이 나왔다. 이 책의 독후감을 써 가는 게 정연의 방학 숙제 중 하나였다.
반 애들은 나이가 몇인데 고작 이런 동화 독후감이 방학 숙제냐고 투덜거렸지만, 사실 정연은 이 숙제가 좋았다. 정연은 동화를 좋아했다. 특히 보육원에 있을 때 정말 많이 읽었다. 동화는 늘 따뜻했고 행복했다.
몇 년 전까지는 정연의 삶에서 그런 동화 같은 순간은 몇 없었지만, 최근에는 마구 늘어나는 중이다. 부모님에게 이름을 받았을 때, 부모님을 처음 엄마와 아빠라고 불렀을 때, 부모님과 놀러 갔을 때, 함께 사진을 찍었을 때…….
그리고 산오와 이야기하고 있는 지금.
그런 찰나들이 정연의 심장을 이루고 있었다.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아무튼 그래서 들고 오긴 했는데, 산오와 노느라 깜빡 잊고 있다가 방학이 반이나 지난 지금에야 간신히 기억이 났다. 숙제를 얼른 해치우고 놀고 싶어서 어젯밤에 후다닥 읽었는데 읽다 보니 산오의 생각이 났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동화였기 때문이다.
“나비는 원래 애벌레야. 걔가 변태라는 걸 하거든. 엄청 힘든 과정을 통해서 예쁜 나비로 변하는 거야.”
정연은 선생님 흉내를 내며 또박또박 설명했다. 책에는 환한 색깔의 그림들이 잔뜩 그려져 있었다. 산오의 까만 눈에 알록달록한 그림이 가득 비쳤다.
“그러니까 넌 지금 애벌레 상태인 거지. 그런데 치료를 무사히 다 받으면 탈피해서 나비가 되는 거고. 진짜 나비가 아니라 비유적인 표현이야.”
“애벌레…….”
산오의 눈이 털이 부숭부숭 난 애벌레 그림을 응시했다.
“못생겼는데.”
“왜? 귀엽잖아.”
정연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실제와 다르게 미화된 동화 속 애벌레는 통통하고 귀여워 보였다. 그러나 산오는 질색한 표정으로 시선을 뗐다.
“예전엔 별 상관없었는데.”
“응?”
“나비가 되고 싶어.”
투덜거리듯 말하는 산오의 얼굴은 평소처럼 무덤덤했지만, 눈동자 아래에서 무언가 끊임없이 일렁였다. 그런 산오를 정연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정연은 조금 주저하다가 이내 결심한 듯 비장하게 입을 뗐다.
“나비가 되면 여기서 나갈 수 있다고 했잖아.”
산오의 시선이 가만히 돌아왔다. 손바닥에 조금 땀이 나는 것 같아서, 정연은 주먹에 힘을 주었다.
“그럼, 우리 집 근처에 살면 안 돼?”
“…….”
“학교 같이 다닐 친구 있으면 좋잖아. 너 초능력 생기면 같은 학교 갈 수도 있고……. 주말에는 같이 놀러 다니자. 여기 안보다 바깥이 훨씬 할 거 많아. 내가 다 소개해 줄게. 너 농구도 좋아하잖아, 우리 집 근처에 농구장도 엄청 큰 거 있거든.”
대답 대신 침묵이 흐르자 말하는 속도가 점차 빨라졌다.
“혹시 갈 데 없으면, 우리 부모님한테 말씀드려 볼게. 지금 내 방 엄청 커서 한 명 정도는 같이 살아도 괜찮아. 초호시로 이사 가도 큰 집으로 가자고 부탁해 볼 테니까…….”
자신 없는지 조금 웅얼거리는 목소리는 끊임없이 줄줄 흘러나왔다. 산오는 저도 모르게 그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눈치를 살피며 피력하는 얼굴의 눈썹은 처져 있고, 입술은 우물댔다. 혹시 거절이라도 하면 어쩌지, 싶은 표정이었다.
산오는 살면서 최초로, 갈비뼈 안쪽에 무언가가 들어차는 기분이 들었다. 낯설고 간지러운 감각은 조금 짜증 났지만, 제 앞의 하얀 소년을 보고 있으면 아무래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그냥 그를 따라가면 다 괜찮을 것 같았다.
“그래.”
큰 고민도 않고 튀어나온 대답에 정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잘 생각했다며 환하게 웃었다.
산오는 이 얼굴을 불과 조금 전에 본 적 있었다. 그것이 온전히 제게로 향하는 기분은 퍽 괜찮았다.
*
“3호랑 많이 친해졌니?”
함께 아침을 먹던 삼촌이 문득 그렇게 말했다. 정연은 입에 샌드위치를 한가득 문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 직감이 맞았다. 산오는 말투가 좀 재수 없긴 하지만, 어쨌든 좋은 친구가 되었다. ……친구 맞겠지?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치료는 언제 끝나는 거예요? 언제 밖으로 나갈 수 있어요?”
그 말에 삼촌이 난처한 듯 눈썹을 찌푸렸다.
“그게…… 문제가 생겨서 말이야.”
“네? 그럼 못 가요?”
“아니, 아니. 그 정도는 아니지만.”
삼촌은 조금 생각하는 것처럼 몇 박자 쉬었다가 물었다.
“정연이가 조금 더 도와주면 괜찮을 것 같은데. 그런데 그럼 정연이가 힘들 수도 있어.”
“괜찮아요!”
단번에 대답이 나왔다. 삼촌은 그럼 너무 고맙다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정연이 뿌듯하게 웃었다. 삼촌의 일에 도움이 되는 것도 좋고, 산오의 치료에 도움이 되는 것도 좋았다.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이어지는 채취는 이전과 조금 달랐다. 한 팔만 천으로 감싸 기계와 연결했던 기존과 달리, 양팔을 모두 천으로 감싸 전선으로 이었다. 정연은 휴우, 하고 숨을 깊게 내쉬고는 침대에 뒤통수를 묻었다. 채취를 하는 첫날, 삼촌이 편하게 있으라며 가르쳐 준 자세였다.
“평소보다 조금 기운이 없어질 거야. 잘 먹고 잘 쉬면 다시 돌아오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정연의 머리를 몇 번 토닥인 삼촌은 기계를 조작했다. 곧 우웅, 하고 부품이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천에 감싸인 팔에서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으나, 약간 어지러울 뿐 크게 힘들지는 않았다. 정연이 잘 버티자 삼촌은 모니터를 빤히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많은데…….”
좋은 거겠지? 나지막한 목소리를 용케 들은 정연이 속으로 생각했다. 산오가 나비가 빨리 됐으면 좋겠다. 그런 바람을 담아 조용히 숨만 내쉬고 있다 보니 채취 시간이 끝났다.
천을 풀어 준 삼촌이 고생했다며 홍삼 캔디를 하나 건네주었다. 윽, 이건 맛없는데. 정연의 인상이 어두워졌지만 지금 먹으라며 빤히 보고 있는 데에야 장사 없었다. 결국 입에 넣고 나서야 채취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래도 이제 자유시간이다. 산오를 보러 가야지. 정연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산오의 방을 향했다. 오늘은 뭐 하고 놀지? 채취를 해서 그런가 조금 졸렸으니 같이 낮잠을 자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연구소 밖에 나가서 햇볕 받으면서 한숨 자는 게 좋은데, 삼촌은 산오가 방 밖을 나가는 것만은 엄격하게 금지했다. 그래도 창문 있는 쪽에서 자면 되니까……. 아쉽지만 산오가 나비가 되면 전부 해결될 일이었다.
“……수치가…….”
“이대로는…… 3호…….”
정연이 걷다 말고 멈칫했다. 문이 제대로 닫히지 않은 방 너머,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산오의 목소리가 아닌 걸 보니 연구원 형 누나들이었다.
‘뭐지?’
평소였다면 그냥 지나갔겠지만, 희미한 대화 내용에는 3호라는 단어가 끼어 있었다. 분명히 산오와 관련된 이야기일 터였다.
정연의 귀가 쫑긋했다. 슬그머니 다가가 문 옆에 귀를 붙이자, 조금 더 선명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다고 3호를 이제 와서 배제할 순 없어요.”
“하지만 큰 성과가 나오지 않지 않습니까.”
“그거야…….”
“가뜩이나 시간 없는데. 외부 카메라에 찍힌 게 한둘이 아니에요. 분명히 이쪽을 노리고 있다고요.”
“최 소장님 쪽이 걸리지만 않았어도…….”
“아예 새로운 대상을 찾는 게 나을 수도 있습니다.”
“이 정도로 적합한 몸은 찾기가 극히 드물어요.”
정연이 눈을 깜빡였다. 못 알아듣는 내용이 반이었지만, 뒤집어 말하면 반 정도는 알아들었다는 뜻이었다.
산오가 받는 치료가 큰 진전이 없다. ……포기할지도 모른다.
두근. 심장이 크게 뛰었다. 정연은 떨리는 눈동자를 갈무리하지도 못한 채로 조심스레 물러섰다. 산오는 나비가 되어야 나갈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나비가 되지 못한 산오는?
“복도가 무너지겠군.”
달칵, 하는 문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며 구박하던 산오의 눈이 의아하게 변했다. 뺨이 붉어진 정연이 숨을 몰아쉬며 문고리에 달라붙어 있었다.
“무슨 일 있어?”
정연과 함께 있으며 산오는 정연의 말투를 조금씩 닮아 갔다. 그 변화에 기뻐할 새도 없이, 정연이 울상을 지었다.
“뭐 달라진 거 없어?”
“……무슨 소리지?”
대뜸 던진 질문에 맥락이라곤 없어서, 산오는 어리둥절하게 되묻기만 했다. 정연은 횡설수설 자신이 들은 것을 설명했다. 두서없는 말이 이해하기 어려웠을 텐데도 산오는 정연이 그 이야기를 마칠 때까지 가만히 듣고 있었다.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한참 후, 산오에게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연구원들은 늘 치료를 하기 전에 제 몸속에서 무언가 변화가 있는지 물었다.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라는 건 금세 눈치챌 수 있었다.
하지만 산오는 오랜 기간 내내 늘, 그대로였다. 결코 좋은 의미가 아닐 거라는 것을 추측하는 것 역시 어렵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문제겠지.”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산오의 목소리에는 조금 힘이 빠져 있었다.
그가 그런 음성을 내는 것은 처음 들어 봤다. 오히려 화들짝 놀란 정연이 고개를 힘차게 저었다. 거친 몸짓에 산오가 눈을 깜빡였다.
“모든 애벌레는 나비가 될 수 있어.”
확신에 찬 눈망울이 그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산오는 홀린 듯 그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너도 할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