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해일 같은 감정이 온몸을 휩쓸었다. 난, 나는. 끝맺지 못한 말이 목구멍에 가득 쌓였다. 산오에게 뭐라도 말하고 싶었지만, 막상 내뱉을 수 있는 말이라곤 없었다. 동그란 눈이 사정없이 찌그러졌다. 정연이 주먹으로 두 눈을 비볐다. 산오가 보고 싶었다. 동시에 보고 싶지 않았다.
연구 일지는 그즈음에서 끝이었다. 마지막 페이지까지 넘긴 정연은 그 아래에 깔려 있던 종이를 발견했다.
‘이건 뭐지?’
두껍고 수북하던 일지와는 다르게, 단 한 장짜리였다.
정연이 종이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일지와 같은 형식으로 쓰인 보고서였으나, 주제가 전혀 달랐다. 간결하게 쓰인 문서는 정연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쉬운 내용이었다.
「외부 세력 추적으로 인한 연구소 긴급 폐쇄 발령.
연구원은 연구 자료 백업 및 조기 대피.
실험 최종 책임자 이태진 소장이 마지막으로 퇴소 후 연구소 폐쇄.
실험에 사용된 실험체 및 부속물은 모두 반출 금지, 폐기 처리함.
내부 폭파 시스템 사용하여 연구소 건물 인멸.
차후 소집이 있기 전까지 대기.」
“……산오는?”
정연은 몇 번이나 그 문서를 훑어본 후에 중얼거렸다. 희미한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았다.
산오는 연구원이 아니었다. 실험 최종 책임자는 더더욱 아니었다. 이 많은 지시 중에서 그나마, 그나마 산오를 지칭하는 단어는…….
「모두 반출 금지, 폐기 처리함.」
까만 눈동자가 어쩔 줄 모르고 흔들렸다. ‘폐기’ 같은 단어는 쓰레기를 처리할 때나 붙는 거였다. 정연은 종이를 짚은 제 손이 약하게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래서 부모님과 함께 정연을 내보내려던 것이다. 그래서 연구원 형 누나들도 전부 보이지 않던 것이다. 삼촌은 마지막으로 연구소를 빠져나간 후에 건물을 통째로 없애 버릴 계획이었다.
산오를 버리고. 산오를 여기에 버리고.
산오 혼자…….
정연은 끈이 떨어진 인형처럼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밤을 훨씬 넘겨 새벽이 된 후에야 그는 정신을 차렸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산오는 정연과 놀 때만 넓은 방에 잠깐 오고, 그 외에 생활하는 방이 따로 있었다. 늘 문단속이 되어 있어 혼자서는 나올 수 없다고 했다. 초능력을 발현하지 못하니 건물은커녕 방에서 탈출할 방법조차 없었다.
‘지금, 지금 괜찮나?’
안위를 먼저 확인해야 했다. 정연은 구르듯이 허겁지겁 방을 빠져나왔다.
산오가 생활하는 방은 정연 역시 한 번도 가 보지 못했으므로 정확한 위치를 알지 못했다. 그러나 정연은 연구소 외부에서 딱 한 번, 산오가 생활하는 곳을 본 적 있었다.
아래에 가로로 긴 창문이 붙어 있던 그곳.
정연은 연구소의 대부분을 돌아다닐 수 있었지만, 이전에 찾을 때도 산오의 방은 찾지 못했다. 그렇다면 정연이 갈 수 없는 곳에 있을 것이다.
삼촌이 절대 들어가지 말라고 했던 구역.
본능적으로, 산오의 방도 그곳에 있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연구소는 넓었다. 그런 곳을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가로지르는 데에는 시간이 많이 들었다. 삼촌이 아버지랑 대화 후 자러 갔다면 조금 뛰는 정도야 괜찮겠지만, 혹시 계속 남아 있다가 정연과 마주치면 곤란했다. 그래서 정연은 일부러 속도를 늦추고 신중하게 움직였다.
정연이 조금만 더 제 능력 사용에 능숙했더라면 능력을 사용해 움직이는 탈 것을 만들었을 테지만, 그는 고작 열넷이었다. 친구가 곧 죽을지도 모르는 공포감으로 휩싸인 어린아이의 시야는 좁고 생각은 짧았다.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연구소의 문은 죄다 벽과 똑같은 새하얀 색으로, 문고리만 달려 있을 뿐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창문 같은 게 없었다. 그래서 정연은 복도의 문을 일일이 열어 봐야 했다.
그때만큼은 연구소에 부모님과 삼촌, 산오, 그리고 정연만 있다는 사실이 천만다행이었다. 재수 없게 연구원의 방을 열었다가 발각되면 퍽 곤란한 상황이 되었을 것이므로.
문을 열었다가 허탕을 친 횟수가 열 번을 넘어가면서, 정연은 점차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정연이 부모님과 떠나기로 한 날이 바로 내일이었다. 아니, 자정이 지났으니 오늘이다. 빨리 산오를 찾아서 어떻게든 해야 했다. 하얀 얼굴에 초조함이 온통 번졌다.
정연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일그러진 표정을 애써 갈무리하려고 노력하며, 다음 방 문을 열었다. 책상과 책장, 작은 식탁, 그리고 침대가 놓인 작은 생활 공간이었다.
이 같은 구조는 질리도록 봤다. 또 연구원 형 누나들의 방인가? 정연이 어깨를 축 늘어트리면서도 고개를 쭉 빼서 주변을 두리번대다가 움직임을 멈췄다.
문에서 벽에 가려져 제대로 보이지 않는 침대가 조금 부풀어 있었다.
“……산오야?”
간신히 내뱉은 목소리는 형편없이 잠기고 갈라져 있었다. 한 발, 두 발, 조심스레 내딛는 걸음은 곧 뜀박질로 바뀌었다. 단숨에 침대까지 달려간 정연이 이불을 확 들췄다.
그토록 찾던 사람이 얌전한 얼굴로 곤히 잠들어 있었다.
분명히 기쁜 일인데 그 순간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정연은 세차게 고개를 젓고 산오에게로 다가섰다.
“산, 산오야. 일어나 봐.”
조심스레 어깨를 쥐고 흔들면서, 정연은 흐트러진 옷깃 사이로 그동안 옷 속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던 멍과 손톱자국을 발견했다.
성인의 손보다는 작은 크기였다.
격렬한 자해 시도. 그 단어가 커다란 징을 치는 것처럼 머릿속에서 계속 울렸다. 정연 역시 멍도 들어 본 적 있었고, 남에게 긁혀 본 적도 있었다. 아팠고, 따가웠다.
차라리 그게 나을 정도의 고통이라니.
“산오야. 산오야. 빨리 일어나…….”
정연의 목소리가 점차 빨라졌다. 이제까지 경험해 본 바로, 산오는 예민한 편에 가까웠다. 평소에는 손가락 하나만 대거나 가까이 가기만 해도 금세 알아채고 노려봤는데, 지금의 산오는 이렇게 크게 흔들어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왜 안 일어나지?
늦었, 늦었나?
“산오야아…….”
극심한 공포가 정연을 덮쳤다. 영원히 눈을 안 뜨면 어떡하지? 산오가 죽으면 어떻게 해야 되는 거야? 달아오른 눈가에 그렁그렁한 물기가 잔뜩 고였다. 정연이 코를 훌쩍이며 하염없이 제 친구를 불렀다.
“죽으면 안 돼…… 일어나…….”
눈물 몇 방울이 후두둑 떨어져 이불에 묻었다. 동그랗게 젖어 든 자국들을 닦아 낼 새도 없었다. 정연이 흐려지는 시야를 비비며 재차 산오를 흔들려고 할 때였다.
“……시끄러…….”
아주아주 작고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뜬 정연이 얼음이라도 된 것처럼 동작을 멈추었다. 미처 들어가지 못한 눈물만 뒤늦게 뺨을 타고 흘렀다.
“……산오야?”
정연의 목소리는 속삭이는 것처럼 작았고, 조금 쉬어 있었다. 그 말이 도화선이었다는 듯, 산오가 천천히 눈을 떴다.
“이정연?”
산오는 앞에 있는 정연을 보면서도 꿈인지 뭔지 분간이 안 되는 것 같았다. 평소보다 반응이 확연히 느린 얼굴은 조금 멍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아무튼 살아 있었다. 입 밖으로 튀어나올 수 있을 정도로 거세게 뛰던 심장이 점차 가라앉았다. 정연이 재빨리 눈물을 닦았다.
“산오야, 빨리 일어나.”
“네가 왜 여기…….”
“빨리. 너 여기서 나가야 해.”
다급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에 말라붙은 눈물 자국까지 확인한 산오가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켰다.
“왜 그러는데.”
정연은 제가 알아낸 사실을 주절주절 설명했다. 그러나 워낙 경황이 없는 상태였으므로 문장은 맥락이나 주술 호응조차 제대로 되지 않아 있었고, 두서없는 넋두리에 가까운 형태였다.
산오는 몇 번이고 주의 깊게 듣고 물은 후에야, 상황을 제대로 인식했다.
“그 자식이 날 죽인다고.”
“그래! 연구소랑 같이 없앤다고 했어. 탈출해야 돼.”
이어지는 산오의 물음은 다소 뜬금없었다.
“너는?”
“나? 나는 부모님하고 내일 나가기로 했어.”
그러니까 내 걱정은 말고 너부터……. 그렇게 이어지던 정연의 말은 차분한 목소리에 끊겼다.
“내가 사라지면 네가 가장 먼저 의심받을걸.”
“괜찮아!”
“네 부모님도 와 있다며.”
“…….”
“그분들도, 괜찮나?”
정연이 입을 다물었다. 연구소에 있는 것은 정연과 그의 가족, 그리고 산오. 정연이 무슨 일을 당하는지 몰랐던 부모님은 산오가 있는지조차 모를 터였다. 그렇다고 삼촌이 산오를 구할 리도 없고.
정연이 산오를 탈출시키고 아침이 되어 삼촌이 산오의 상태를 보러 방문한다면. 산오가 없어졌다는 것을 알아챈다면.
결국 용의선상에 놓이는 것은 한 명이다.
“하지만…….”
정연이 이런 짓을 한다는 걸 알면 삼촌은 무시무시하게 화를 낼 것이다. 삼촌은 그를 좋아하지 않으니, 그냥 넘기지 않을 터였다.
이건 단순히 ‘사고’를 치는 것과는 달랐다. 타인에게 피해가 갈 것을 알고 고의로 저지르는 일이었다.
아버지도 어쩌면, 삼촌의 형이니까 같이 화낼지도 몰랐다. 어머니도 어른이 하는 일을 망쳤다며 정연을 싫어할 수도 있었다. 그를 입양한 것을 후회할지도 몰랐다. 이런 애는 안 들이는 게 나았을 거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생각만으로도 너무 무섭고 슬프고 마음이 아득해졌다. 눈물이 줄줄 흘렀다.
“울지 마라.”
따뜻한 손이 정연의 뺨을 쓸어 물기를 훔쳐 냈다. 아이의 손은 금세 흥건하게 젖었다.
“빨리 방에 돌아가.”
“너, 여기 계속 있으면 죽는다고…….”
“넌 부모님을 좋아하잖아.”
그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무뚝뚝하고 건조하다 못해 쌀쌀맞기까지 했다. 어찌할 바 모르고 이불만 꽉 쥔 손을 산오가 부드럽게 떼어 냈다.
“그러니까 후회할 짓 하지 마.”
한참의 시간이 흘러 진정하고 그 방을 힘없이 나설 때까지, 정연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