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킹 1위를 임시 보호 중입니다-97화 (96/250)

#97

“운전 조심히 하고.”

“나 아직 화 풀린 거 아니다.”

“알아. 형 생각 다 알아들었다고. 걱정은 할 수 있잖아.”

삼촌과 아버지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정연은 어머니와 함께 차에 짐을 실었다. 눈은 조금 부었지만 얌전한 얼굴이었다.

“정연아, 집에 가면 엄마랑 데이트할까?”

“좋아요.”

그게 영 신경 쓰이는지 어머니가 계속 이런저런 질문을 하며 분위기를 띄우려고 애썼지만, 대답은 또박또박 잘하는 주제에 표정은 밝아지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정연이 가지고 왔던 모든 짐이 차곡차곡 트렁크 안으로 들어갔다. 옷, 장난감, 책, 방학 숙제들, 남은 과자들까지.

곧 정연이 여기에 머물렀다는 흔적은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다.

“정연이도 조심히 가고. 나중에 삼촌이 놀러 갈게.”

“네, 나중에 봬요.”

고개를 꾸벅 숙인 정연이 차에 탔다. 부모님 역시 운전석과 조수석에 각각 탑승했다. 하얀 차는 곧 흙먼지를 날리며 연구소를 내려가는 산길 아래로 사라졌다.

손을 흔들던 삼촌, 태진은 차가 보이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움직임을 멈췄다. 이제 연구소는 정말로 텅 비었다. 남은 것은 수많은 자료와 부품들, 그리고 태진뿐.

“이제 마무리만 하면 되겠다.”

가볍게 중얼거린 남자가 뒤를 돌았다. 연구소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경쾌하기까지 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연구소 심층부로 들어간 태진의 뒤로 두꺼운 문이 닫혔다.

그로부터 5분 후.

모든 물품이 사라져 휑해진 정연의 방 안에서, 정연이 슬그머니 빠져나왔다.

심장이 너무 뛰어서 죽을 것 같았다. 긴장에 주먹을 꾹 말아쥔 정연이 삐걱대며 주변을 살폈다. 복도는 고요했다. 일정한 리듬의 발소리가 어딘가에 들어가는 것까지 똑똑히 듣고 나왔으니 당연하기도 했다.

부모님과 함께 떠난 건 실체화 능력으로 만든 정연 자신이었다. 혹시라도 걸릴까 봐 창밖으로 연구소 입구를 훔쳐보는 내내 조마조마했으나, 다행히 제 능력을 눈치챈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이것만 하고, 나도…….’

당연히 이대로 부모님과 헤어질 생각은 없었다. 산오만 구하고 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척 부모님께로 돌아갈 것이다. 실체화 능력은 영원히 유지할 수는 없었으나, 사나흘 정도는 거뜬했다. 타이밍을 봐서 분신과 교대해 집으로 들어가면 문제는 없었다.

정연의 행동을 반기는 어른은 없을 것이다. 만약 들킨다면 삼촌도, 부모님도 정연을 나무라고, 혼내고, 버릴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산오를 죽게 놔둘 수도 없었다.

그런 걸로 사람이 죽으면 안 됐다.

정연은 곧장 산오의 방 쪽으로 향했다. 빠른 걸음이 분주했다.

쿠릉…….

그때, 건물 어딘가에서 묵직한 파열음이 들렸다. 멈칫한 정연이 불안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태진의 최종 계획은 연구소 건물까지 모조리 없애고 혼자 나서는 거였다. 시간이 없었다.

산오의 방에 태진이 있을지 없을지에 대해서는 반신반의였다. 만약에라도 삼촌이 산오를 죽, 죽, 죽이고 있는 중이라면……. 안색이 창백하게 질린 정연이 속도를 높였다. 최대한 아니길 바라지만, 제 모습을 드러내는 한이 있더라도 막아야 했다.

달칵.

“산오야!”

“……이정연?”

책상에 가만히 앉아 있던 산오의 눈이 크게 뜨였다.

“오늘 간다고…… 아직 안 간 건가?”

“나 혼자 어떻게 가.”

정연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같이 가자.”

몇 시간 전의 도돌이표였다.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 결연한 얼굴을 마주한 산오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지?”

낮은 목소리는 조금 잠겨 있었다. 혼란과 의문이 검은 눈동자에 잔뜩 섞여 혼탁한 빛을 냈다. 이렇게 다시 만나는 것은 산오의 예상에 없었다. 분명히 정연은 제 부모님을 중시했고, 새벽의 대화로 그도 충분히 납득했다고 여겼다.

산오라고 살고 싶지 않을 리가 없었다. 죽는 것을 바랐으면 연구소의 시간을 견디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제 생명은 정연의 삶을 깨트릴 만큼 큰 가치가 있지는 않았다.

“나는 부모도, 형제도 없다.”

산오가 쥐고 있는 것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에게는 혈연도, 재산도, 지식도, 어떠한 것도 없었다. 몇 년을 견딘 실험도 결국은 실패했다. 나비가 되어야 했던 아이는 끝내 탈피하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벌레조차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죽어도 아무런 상관없어.”

나지막한 목소리는 건조한 사실만 읊고 있는 것 같은 어조라서 더 아팠다.

무거운 침묵이 깔렸다. 쿠릉, 쿵……. 건물이 무너지는 것 같은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단단한 콘크리트가 부서지면서 나는 진동은 산오의 방까지 약하게 울렸다.

산오는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새벽에 그랬듯이, 정연은 끝내 물러설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는 산오와 달리 손에 쥔 게 있으니까.

“야.”

한참 이어진 정적을 깨트린 건 사나운 목소리였다.

아무것도 없는 책상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산오가 제게 날아온 적의에 조금 놀라 고개를 돌렸다. 정연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런 데에 이유가 어디 있어?”

“……뭐?”

예상하지 못한 말에 산오가 대답을 멈칫한 찰나, 정연의 목소리가 폭풍처럼 쏟아졌다. 천둥이 몰아치는 것처럼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는 다양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분노, 걱정, 짜증, 초조, 답답함, 호의.

“죽을 걸 알면서도 어떻게 그냥 가?”

생전 처음 맞아 보는 폭풍이었다. 산오는 피할 새도 없이 온몸이 흠뻑 젖어 버렸다.

심장 어딘가에서 번개가 통하는 것처럼 찌릿찌릿한 감각이 갈비뼈까지 퍼졌다. 분명히 실제로 아픈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어쩐지 크게 숨을 쉬기가 힘들어 산오는 가만히 호흡을 들이켜기만 했다. 그동안에도 정연의 목소리는 이어졌다.

“정 이해 못 하겠으면 그냥 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라고 쳐.”

“……그냥?”

정연은 제 감정에 못 이겨 씩씩대느라 산오의 목소리가 조금 얼빠져 있었다는 사실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반박하지 말라는 듯 힘을 줘서 대답할 뿐이었다.

“그냥.”

산오가 아무런 대답이 없자, 정연의 감정은 제풀에 지쳐 점차 가라앉기 시작했다. 아, 이게 아닌데. 뒤늦게 정신이 든 정연이 황급히 산오의 얼굴을 살폈다. 잘생긴 얼굴은 묘한 시선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감정의 정체를 알 수가 없어 애가 탔다.

정연은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산오에게 다시 말을 건넸다.

“밖으로 나가자.”

그러나 의지가 꺾이지는 않았다.

그제야 산오는 깨달았다. 정연은 정말로 진심이었다.

그는 진심으로 산오가 죽지 않기를 바랐다. 무사히 탈출해서 세상을 살기를 바랐다. 부모님의 차를 타고 훌쩍 떠나 버리는 대신, 이곳에 남았다.

그리고 그를 찾아왔다.

“같이 헌터 하기로 했잖아.”

단단한 눈빛이 산오를 직시했다. 내미는 손은 주저 없이 산오를 향하고 있었다.

그것에 홀리지 않을 사람은 없었다. 산오는 팔을 뻗었다.

쿵, 쿵……. 요란한 파괴음이 점점 커졌다. 방을 나온 두 사람은 빠르게 연구소 복도를 달렸다. 실내화를 신고 있는 산오를 위해 정연이 운동화도 하나 만들어 주었다. 정연의 것과 같은 하얀 운동화가 바쁘게 바닥을 밟았다.

산오의 방이 위치한 곳은 연구소에서도 가장 구석진 곳으로, 입구까지의 거리가 가장 먼 구역 중 하나였다. 설상가상으로 이리저리 꼬인 복도 동선까지 더해져 부지런히 달려도 갈 길이 한참이었다. 둘은 숨이 차오르는 것을 삼키며 뛰고 또 뛰었다.

“조심해!”

날카롭게 소리친 정연이 산오를 재빨리 끌어당겼다. 벽 쪽에서 콘크리트 자재가 튀어나오는 것을 아슬아슬하게 피할 수 있었다. 반동에 못 이겨 넘어진 정연이 으, 하고 벌떡 일어섰다. 무릎이 바닥에 쓸려 붉어졌다. 조금 비틀거리다 중심을 잡은 산오가 그를 일으켜 주었다.

“괜찮은가?”

“응.”

정연이 길게 삐져나온 철골을 질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연구소가 무너져 내리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순차적으로 울리던 파괴음은 그들의 코앞까지 왔다. 어영부영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래도 죽어라 뛴 덕분에 입구와 꽤 가까워졌다. 정연은 연구소 지리를 가늠했다. 여기서부터는 길도 크게 어렵지 않았다.

“지금부터는 그냥 절대로 멈추지 말고 뛰자.”

건물이 언제 폭삭 가라앉을지 몰랐다. 무너지는 파편에 깔릴 수도, 다칠 수도, 갇힐 수도 있었다.

“여기서 똑바로 달려서 나오는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한 번, 오른쪽으로 한 번, 그리고 쭉 가면 입구야. 소리칠 힘 아껴야 되니까 미리 말해 두는 거야.”

정연의 신신당부에 산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진짜 위험해. 이 악물고 달려야 돼. 절대로 멈추면 안 돼. 나도 절대로 멈추지 않을 테니까. 알았지? 하나, 둘, 셋 하면 뛰는 거야.”

두 아이의 시선이 맞부딪쳤다. 심호흡을 한번 한 정연이 다리에 잔뜩 힘을 주었다.

“하나, 둘, 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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