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9. 거짓말의 관성
“김철재 씨 말이야, 요즘 슬슬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것 같아.”
혜강의 말에 옆에서 나란히 걷던 이연이 드디어, 하고 과장되게 고개를 내저었다. 다 먹은 하드 막대를 질겅질겅 씹느라 발음이 부정확했다.
“한창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얼마 전에 더 외진 곳으로 거주지를 옮기는 것까지는 확인했거든? 그 후로 아예 자릴 벗어나질 않아. 거기서 뭘 하고 있는 것 같아.”
“뭐가 있는지는 모르고?”
“그냥 창고 부지 같은데, 걸리는 정보가 없어.”
간만에 다 같이 나가서 점심을 먹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중간에 혜강이 먹고 싶다고 해서 마트에 들러 아이스크림까지 하나씩 샀다. 산오는 안 먹을 것같이 굴다가도 이연이 맛있다며 감귤 맛 하드를 하나 들려 주자 순순히 받았다.
산오는 호텔 휴가 이후로 외출이 확 줄었다. 정확히 말하면 이연에게 말하지 않고 어디 훌쩍 나갔다 오거나 전화를 받으러 가는 빈도가 줄었다고 할까.
덕분에 함께 있는 시간이 자연스럽게 늘어났다. 원래도 적은 시간은 아니었는데, 요 근래는 체감상 화장실 갈 때 빼고는 내내 같이 다니는 기분이다.
처음에는 기분 탓인가 싶었지만, 종찬이 산오 님을 제발 놔 달라는 협박 및 애원 문자를 무더기로 보내면서 확신으로 변했다. 놓긴 뭘 놔, 내가 가두기라도 했나……. 당시에는 그렇게 투덜거리고 말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산오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비서가 그렇게 말하니 괜히 신경이 쓰였다.
이연은 곧 그것뿐만이 아니라 산오의 행동도 묘하게, 좀…… 친절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친절이라는 게, 이전처럼 틱틱대면서 필요할 때 종잇장처럼 끌고 당기는 것과는 비교할 바가 안 됐다.
“배가 고프면 올라가서 뭘 더 시켜.”
그래, 이런 거라든가. 이연은 제 입에서 막대를 빼앗아 가 바닥에 던지는 손을 바라보았다. 납작한 나무 막대는 땅에 닿자마자 산산조각 나 묻혔다. 쓰레기를 대놓고 버리는데 지구에게 미안하지 않을 놈은 제산오가 세상에서 유일할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갑자기 왜 이렇게 구는지 모르겠다. 달라진 거라고 해 봤자 정이연이 이정연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뿐이다. 그것도—본인의 주장대로라면— 산오는 이미 알고 있었다지 않은가.
산오와 만난 것은 무려 10년 전. 그것도 2주나 될까 말까 한 기간이다. 사고 이후 이연은 오랜 날을 기력 기진으로 잠들어 있었고, 일어난 후에는 완전히 바뀌어 버린 낯선 환경에 적응해야 했다. 심지어 그 와중에 현실을 부정하느라 아주 오랜 기간을 허비했고…….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는 연구소에서 보낸 짧은 나날 같은 건 꿈결처럼 흐릿하게 변한 후였다.
그런 판국이니, 이연으로서는 산오가 그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 것도 놀라웠다. 산오야 여전히 잘생겼고 자라면서 얼굴이 크게 달라지지도 않아서 알아보는 게 쉬웠지만, 이연은…… 글쎄.
기력을 과도하게 방출당하면서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소가 옅어지는 바람에 인상 자체도 다소 이국적으로 변했을뿐더러, 사고의 후폭풍으로 성장 역시 제대로 하지 못했다. 산오와 확연히 차이 나는 눈높이나 호리호리한 체격이 그 증거다.
어릴 때 산오와 내내 어울려 놀고도 쌩쌩했던 이연의 체력이 보통 이하로 떨어진 것 역시 단연 사고의 영향이었다. 이연이 산오와 함께 살면서도 조용히 버팅기고 있었던 것은 당연히 알아보지 못할 거라는 계산도 깔려 있었다.
그렇다고 최근에 특별히 친밀감이 오를 만한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휴가 이후로 두 사람은 한 번도 과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이연은 여전히 산오가 연구소를 나와서 어떻게 살았는지 몰랐고, 산오 역시 이연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를 것이다. 도란도란 이야기할 만큼 긍정적인 사연도 아니고…….
‘그게 궁금하긴 할까?’
이연은 쓴웃음을 삼켰다. 산오가 잘해 주는 게 기분이 나쁜 건 아니었지만, 마냥 좋다고 하기에도 찜찜했다. 처음부터 알아봤다고 한 주제에 목숨부터 위협한 놈이다. 산오의 인성에 대한 굳은 신뢰가 있는 이연이 의심스레 그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넌 날 돼지로 아는 경향이 있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나?”
그렇게 말하는 눈빛은 이연이 배고파서 막대를 씹어 먹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이건 평소의 제산오다. 조금 안심한 이연이 방긋 웃었다.
“왜 또 재수 없게 웃는 거지?”
“난 네가 변하지 않아서 참 좋아.”
“칭찬으로 안 들리는데.”
“그래, 그게 네 장점이지.”
“헛소리할 거면 입 다물어.”
가볍게 투닥거리는 사이 사무실에 도착했다. 가장 먼저 앞장서 문을 열고 들어서던 혜강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아, 나 내일 휴가 좀 쓸게.”
새로 게임 업데이트라도 하나? 혜강은 가끔 그런 이유로 휴가를 쓴 전적이 있었다. 자기는 초호시민을 벗어나 뭔, 대륙인이 되어야 한다고 했었나……. 이번에도 그런 일이려니 넘겨짚은 이연 역시 별생각 없이 물었다.
“어? 왜?”
“형이 귀국했거든.”
그러나 이어지는 대답이 충격적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이연은 대답도 못 하고 멍청한 얼굴로 혜강을 바라보았다. 물론 그의 말이 나쁜 건 아니었지만, 아니…….
“가족 전부 없다며?”
너무 황당한 나머지 말이 필터를 거치지 못했다. 일견 무례하게 느껴질 수 있는 말에도 혜강은 가볍게 어깨만 으쓱였다.
“부모님은 돌아가신 거 맞아. 형은 그 당시에 집에 없었다는 의미였지. 죽었다고 하진 않았다고.”
“뭐라고…….”
몇 년 동안 사람을 착각의 구렁텅이에 빠트려 놓고 태연하기도 했다. 이연이 이유 모를 억울함이 파도치는 얼굴로 입을 한참 뻐끔거렸다. 고민한 끝에 나온 말은 한 마디뿐이었다.
“……다행이네.”
혜강이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피식 웃었다.
“형이 어떤 사람인데?”
이연은 금세 혜강의 옆에 앉아 대답을 재촉했다. 혜강과 이연은 그렇게 오래 지내면서도 제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무관심이라기보다는 서로를 배려하느라 말을 꺼내지 않은 것에 가까웠다. 호기심이 반짝반짝 빛나는 눈빛을 받은 혜강이 음, 하고 고민하듯 턱을 쓸었다.
“형은…… 나랑 나이 차이가 엄청 많이 나. 여덟 살 많거든.”
혜강이 현재 스물둘이니, 혜강의 형은 서른이라는 이야기였다. 서른이면 산오와 이연보다도 훨씬 많은 나이다.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어른스럽고 다정한 이미지가 그려졌다. 이연이 아는 사람 중 그런 인물에 가장 가까운 것은 역시 부모님이었다. 사랑했던 기억의 영향을 받아 아직 보지도 못한 혜강의 형에 대한 호감이 급속 상승했다.
“늦둥이구나. 엄청 귀여움받았겠네.”
“뭐, 귀여움이라면 귀여움인데…….”
혜강은 조금 떨떠름한 것처럼 중얼거렸다.
“우리 형 성격이 좀…… 귀찮거든. 종잡기도 힘들고, 다혈질이고…….”
“그래? 그래도 형 좋아하는 거 아냐?”
“그거야 그렇지.”
“오랜만에 만나면 좋겠다.”
조그맣게 속삭인 이연이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오래도록 보지 못했던 가족. 그 역시 그런 소망이 있었다.
이연은 평생 만나지 못하겠지만, 혜강은 다르지 않은가.
“그렇지, 뭐. 외국 나간 지 5년 정도 됐나?”
“5년이나?”
이연이 혜강을 처음 만났을 때는 2년 전이었고, 혜강은 그때도 혼자였으니 그것만 해도 제법 오랜 기간이다. 그런데 훨씬 더 이전에 나간 거였다니. 무려 혜강이 미성년자던 시절이 아닌가.
“응. 직업 특성상 한번 나가면 오래 걸리거든. 연락도 잘 안 되고……. 그래도 오늘 들어온다고 며칠 전에 전화가 와서, 내일 만나기로 했어.”
“왜? 오늘 오는데 오늘 만나야 되는 거 아냐?”
이연이 원한다면 당장이라도 근무를 빼 주겠다는 얼굴로 말하자, 혜강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냐. 오늘은 뭐 할 일이 있어서 바쁘대.”
“할 일?”
“응. 아마 출장 보고 같은 거 아닐까?”
하긴, 그런 게 있으면 빨리 해치우는 게 낫긴 했다. 이연은 납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소파에서 일어섰다.
“난 초관청에 좀 갔다 올게.”
맞은편에 앉아 있던 산오의 시선이 당연하다는 듯 따라붙자, 이연이 변명하듯 말을 덧붙였다.
“김철재 씨 반응이 있다니 진 국장님한테 보고도 할 겸…….”
김 박사도 김 박사지만, 파티 사건이 지난 지 몇 주는 됐는데 그 이후로 희수를 통 만나질 못했다. 클럽 연구소와 세미와의 연결 고리 역시 희수가 알아 두어야 할 사항이었다. 조사에 도움이 될 것이다.
타이밍이 이상하긴 했지만 미래에게 듣기로는 원래 이 시기에는 집에도 잘 들어오지 않는다고 했다. 희수는 늘 일에 파묻혀 사는 사람이긴 했으나, 요즘은 특히 더 바쁜 듯했다.
미래에게 묻는 김에 세은과 세미에 대해 은근히 떠보기도 했다. 그러나 미래는 그런 이름은 전혀 몰랐다. 희수를 오빠라고 부르던 걸 보면 사적인 친분이 있어 보였는데 의외였다.
D.S도 모른다고 했으니 집안 교류가 아닐 수도……. 하지만 집안 교류가 아니라면 희수가 어떻게 고작 스물인 세은과 세미 쌍둥이와 알고 지낸 거지? 아무리 끼워 봐도 아귀가 맞춰지질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