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킹 1위를 임시 보호 중입니다-101화 (100/250)

#101

“지금 뭐 하는 거야?”

오랜만에 만난 형을 바라보는 혜강의 눈이 북극처럼 싸늘했다.

이연과 함께 혜성이 들어오는 것을 본 혜강은 귀신이라도 본 얼굴이었다. 두 눈을 부릅뜨고 한참이나 빤히 노려보기만 하던 혜강이 “……형?” 하고 묻자마자 혜성은 냅다 두 팔을 벌리고 동생에게 뛰어갔다.

그러나 혜성은 혜강을 안는 데에 실패했다. 혜강이 단호하게 팔을 뻗어 저지했기 때문이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상황 설명이나 해. 이게 뭐야?”

금세 시무룩해진 혜성은 주절주절 변명을 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헛소리였다. 냅다 이연의 멱살을 잡을 때와는 딴판인 태도다.

“별걸 다 달고 다니는군.”

혜성이 혜강에게 쩔쩔매는 동안, 산오가 기다렸다는 듯 구박했다. 이연이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투덜거렸다.

“야, 거의 습격이었어. 이혜성 씨가 길거리에서 나한테 멱살 잡아서 얼마나 쪽팔렸는지 알아?”

산오의 시선이 이연의 목깃을 흘끗였다. 옷이 잘못 말린 것처럼 구겨져 있다 했더니 한바탕 봉변을 당한 모양이었다.

“멱살 하나도 못 푸나?”

“이혜성 씨를 내가 어떻게 근력으로 이겨?”

“왜 못 이겨.”

이제 보니 목소리에 평소보다 사나운 빛이 깃들어 있었다. 이연이 의아하게 물었다.

“너 이혜성 씨 몰라? 4단 헌터잖아. 엄청 유명한데.”

“알 바인가.”

그래, 이 녀석이 TV 같은 걸 볼 리가 없지. 안다고 하는 게 더 이상했을 것이다. 이연은 순순히 혜성을 소개해 주었다.

“근력 강화 초능력 가진 무궁화 4단 헌터야. 보아하니…… 혜강이 형이신 모양이고.”

뒷말은 조금 떨떠름했다. 얼굴을 보면 혜강이 형이 틀림없는 것 같긴 했지만, 설마 정체가 이혜성일 줄은 몰랐다. 그러고 보니 같은 성에 돌림자까지 쓰잖아? 사실을 알고 나니 뒤늦게 힌트가 보였다. 때마침 혜강이 고개를 돌리며 사과했다.

“이연이 형, 미안. 우리 형이 좀 민폐지?”

“아니, 뭐…….”

차마 대놓고 그렇다는 대답을 할 수는 없었으므로, 이연은 애매하게 말끝을 흐렸다. 혜강은 그에 탄력을 얻고 혜성을 마저 추궁했다.

“그래서, 이연이 형은 어떻게 안 건데? 여긴 어떻게 안 거고? 설마 뒷조사한 거야?”

혜성은 그 대답에만 기묘하게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뭔가 찔리는 게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혜강이 재차 노려보자, 우물쭈물하며 실토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그간 오래 연락을 못 했잖아.”

“안 한 거겠지.”

“그러던 중 SNS에 네 사진이 올라온 거야. 반가워서 오랜만에 본 동생의 안부를 좀 알고자…….”

혜성은 문장을 마무리하지 않았지만, 혜강은 뒷 내용을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그래서 뒷조사를 했다?”

혜성이 근엄한 얼굴로 부정했다.

“뒷조사라니. 난 그냥 너랑 같이 있던 모르는 남자에 대해 알아본 것뿐이야.”

“그게 뒷조사야.”

혜강이 시큰둥하게 대꾸하며 사실 확인을 위해 SNS 타임라인을 요구했다. 혜강은 SNS 계정이 있긴 했으나 보기만 하는 용도가 거의 대부분이었고, 설령 실제로 쓴다고 해도 인물 사진을 올리거나 한 적은 없었다. 대체 무슨 사진을 봤다는 건지 모르겠다. 불신이 가득 찬 혜강의 얼굴에 혜성은 순순히 제 SNS를 켠 휴대폰을 넘겨주었다.

“아, 이거…….”

보자마자 신음한 혜강이 인상을 찌푸렸다. 호텔에 갔을 때 객실 업그레이드를 빌미로 요청받았던 이벤트 사진. 그러고 보니 이연과 함께 찍었던 거였다. 사진을 보니 그제야 기억이 났다.

“그거 좋아요 수 보여? 얼마나 유명하면 나한테까지 넘어왔겠어?”

혜성의 말에 좋아요 수를 확인하자 6자리를 가볍게 넘겨 있었다. 혜강이 기겁했다.

“뭐지? 별 사진도 아닌데…….”

“별 사진 아니긴. 잘 나왔고만.”

흐뭇하다는 듯 사진을 보는 혜성을 향한 혜강의 시선은 여전히 삐딱했다.

“그래서 귀국하자마자 한 게 이연이 형 만나는 일이야?”

동생보다도 먼저 만나려던 사람이 일면식 없는 동생의 직장 동료라니. 사실 ‘만난다’는 표현도 엄밀히 따지면 다소 어폐가 있었다. 어이없어하는 혜강의 물음에 혜성이 금세 얼굴을 굳혔다.

“이것보다 중요한 일이 어디 있어? 난 인정 못 한다.”

“뭘?”

우아한 손가락이 이연을 매섭게 가리켰다. 순식간에 이연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저런 남자랑 사귀기엔 네가 너무 아까워!”

“뭐?”

“예?”

난데없이 떨어진 개소리에 혜강과 이연이 동시에 기겁했다. 동그랗게 뜬 눈에서 눈알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러나 혜성은 놀랍게도 진지한 얼굴이었다.

“네 보는 눈을 탓하고 싶진 않지만, 형은 네 나이가 나이이니만큼 걱정이 된다. 아무리 봐도 변변찮은 남자야! 게다가 호텔이라니, 이런 걸 SNS로 발견한 내 심정이 어떻겠니?”

“아니, 아니. 잠깐만요…….”

“뭐? 내가 한 말이 틀리기라도 했다는 이야기야?”

“오해가 있는 것 같거든요.”

이연의 어물거리는 말에 혜성이 째릿 노려보았다.

“내가 잘못 알고 있다고? 당신 우리 혜강이 스무 살 때 만난 거 아냐?”

맞다.

“만난 지 하루 만에 취직 결정했다며?”

……그랬다.

“그리고 우리 혜강이는 수시로 불규칙 근무에, 야근을 하고!”

……그건 직업 특성상…….

“심지어 댁은 다른 남자랑 동거 중이고!”

…….

“분명히 호텔 수영장 가서 좋다고 선크림도 발라 주고, 산책도 하고, 분위기 있는 식사도 하고, 불꽃놀이도 보고, 아주 난장을 다 피웠겠지! 안 봐도 뻔해.”

그, 것도 하기야 다 했는데……. 묘하게 맞는 말만 하는 혜성에게 아무런 부정도 하지 못하자, 그는 잘 걸렸다 싶었는지 길길이 날뛰었다.

“더 이상의 변명은 듣지 않겠어!”

억울해서 팔짝 뛰겠다. 상황은 그게 맞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란 말이야! 그러나 이미 혜성은 이연을 어린 동생을 잡아먹은 파렴치한으로 확정 짓고 있었다. 편견이 없어서 이렇게 짜증 나는 건 처음이었다. 보다 못한 혜강이 버럭 외쳤다.

“우리가 왜 사귀어? 우리 그냥 동료야.”

“이 남자가 그렇게 말하라고 했어?”

그게 사실이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 혜성이 눈알을 뒤집으며 이연을 노려보았다. 유난히 하얀 흰자위가 희번덕거려서 무서웠다. 순간 박력에 압도된 이연이 저도 모르게 산오 쪽으로 붙었다. 그 꼴을 본 혜성의 눈빛이 더 험해졌다.

“감히 혜강이를 앞에 두고 동거남 뒤에 숨어!”

사무실에 쩌렁쩌렁한 포효가 울렸다.

오해를 어디서부터 바로잡아야 할지 감도 안 잡혔다. 아니, 오해가 잡히긴 하는 건가? 당사자가 아니라고 하는데도 믿질 않았다. 이런 방패는 처음 봤다.

“저희 진짜…… 진짜 안 사귀거든요…….”

그렇게 중얼거리는 이연의 목소리는 어째 좀 울먹이는 것 같기도 했다. 진짜면 억울하지나 않지, 연애 경험도 없는데 바람둥이 오해나 받고……. 인생이 서럽다.

그런 이연의 모습이 퍽 허접해 보였는지 원래도 곱지 않던 시선은 더 삐딱해졌다. 혜성은 급기야 혜강을 달래기 시작했다.

“혜강아, 이런 남자가 정말 좋아? 어디 약점이라도 잡힌 거니? 형한테는 말해도 돼. 내가 알아서 해 줄게.”

“아니, 진짜 안 사귄다고.”

“다시 생각해 봐. 이 평범남은 고작 무궁화 2단이라고!”

“난 1단인데.”

“그거랑은 다르지! 넌 유능한 해커잖아!”

혜강의 싸늘한 대꾸에도 혜성은 놀라울 정도로 기죽지 않았다. 이연을 후려치고 혜강의 자존감은 높여 주는 양면성 화법에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헷갈렸다.

“형은 어차피 우리가 헤어졌으면 하는 거지?”

“맞아!”

“그럼 사귀었다고 치고, 이제 헤어질게. 됐지?”

혜강은 변명하기도 귀찮아졌는지 남의 연애사를 날조했다. 그러나 혜성은 만만치 않았다.

“그런 눈 가리고 아웅식으로 내가 넘어갈 거 같아? 확실하게 증거를 남겨!”

산오가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증거만 대면 되나?”

내내 조용하던 동거남(?)의 말에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산오가 제 옆에 앉은 이연을 슬쩍 돌아보았다. ……뭐야? 본능적으로 불길함을 느낀 이연이 인상을 찌푸리기도 전에, 산오가 고개를 숙였다.

“……!”

“……!”

“……!”

소리 없는 비명이 사무실 안을 가득 채웠다.

그중에서 가장 놀란 것은 단연 이연이었다. 부드러운 촉감이 입술에 닿아 오는 것과 동시에 머릿속이 텅 비었다. 입, 입, 술…….

사람이 돌처럼 굳어 버리든 말든 산오는 입술을 맞댄 그대로 이연에게만 들리도록 느릿하게 속삭였다. 달싹거리는 입술이 비벼지는 감각이 오싹했다.

“분위기 맞춰.”

묘하게 살벌한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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