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킹 1위를 임시 보호 중입니다-104화 (103/250)

#104

술 마시는 내내 혜성과의 이야기가 끊기지 않는 것으로 모자라 밥으로 꼬셔지는 파트너를 실시간으로 지켜보는 산오의 얼굴에 그늘이 끼기 시작했다. 불행히도 이연은 그 기색을 알아채지 못했다.

“무슨 식당인데요?”

“퓨전 양식으로 알고 있긴 한데……. 혹시 별로면 이연 씨가 좋아하는 데로 가요.”

심지어 메뉴 선택권도 줬다. 두근……. 이연의 뺨이 물들었다.

이연의 태도는 단숨에 백팔십도 달라졌다.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열의가 대화에 깃들기 시작했다. 해산물 같은 것도 좋아하세요? 아, 완전 환장하죠. 고기는요? 없어서 못 먹어요. 퓨전 음식도요? 맡겨만 둬요. 저 정말 많이 먹거든요. 저 돈 많아요. 폭풍우가 몰아치는 것처럼 시원시원한 대답에 반할 것 같았다. 이연이 반짝이는 눈으로 혜성을 바라보았다.

이상한 사람인 줄만 알았는데 생각보다 말이 잘 통했다. 보아하니 가리는 음식도 없는 것 같고, 돈도 낸다고 하고. 이 사람하고 밥 먹으러 가는 게 기대된다……. 꿈이라도 꾸는 듯한 눈빛이 혜성을 향해 쏟아졌다. 이연은 혜성의 대화에 집중하느라 저도 모르게 상체를 점점 비틀었다. 곧 산오에게는 들썩이는 등밖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아주 지랄이었다.

초록색 눈동자가 불이 타오르는 것처럼 확 빛났다. 가게 전체가 쿵, 하고 작게 흔들렸다.

“뭐야?”

“지진인가?”

가게 안의 손님들이 어리둥절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다행히 그 후로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곧 단란한 대화 소리가 다시 가게를 채웠다. 맥주를 홀짝대던 혜강이 조금 수상하다는 눈길로 산오를 잠깐 바라보았으나, 확증이 없었으므로 뭐라 말을 하지는 않았다.

“깜짝이야. 어디서 변이종 전투라도 하나 봐요.”

“요청 온 건 없는데. 이 시간에 고생이네요.”

이연과 혜성 역시 의아하다는 듯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맥주잔을 들었다. 짠, 하고 부딪히는 유리 소리가 경쾌했다.

“오랜만에 가족이랑 같이 살게 돼서 좋을 것 같아요.”

이연이 테이블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괬다. 처음 가게에 들어올 때와는 딴판인 태도였다. 혜성과 식사 약속을 잡는 과정에서 내적 친밀감이 폭발했다. 혜강과 혜성을 번갈아 보는 이연의 시선이 흐뭇하게 변했다.

“저도 부모님 돌아가시기 전에는 진짜 좋았거든요.”

혜강이 조금 놀라서 이연을 바라보았다. 그가 자발적으로 가족 이야기를 하는 건 손에 꼽혔다. 사정을 모르는 혜성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맞아요. 저도 부모님이랑 날 좋으면 근처 산에 놀러 가고 그랬거든요. 혜강아, 너 그때 기억나?”

“난 기억도 안 나.”

혜성이 가볍게 웃었다. 수아에게 보여 주던 정중한 웃음이나, 이연에게 짓는 평연한 표정과는 또 달랐다.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동생이 귀여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하긴, 아기 때였으니까. 난 그게 너무 귀찮았는데, 부모님이 부득불 가자고 하시는 거야. 찔찔 울면서 올랐지.”

“엄청 활동적인 부모님이셨네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게 다 추억이죠.”

그렇게 말한 혜성은 혜강 쪽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너도 기억할 수 있으면 좋았을걸.”

정작 혜강은 시큰둥한 반응이었지만, 이연은 어쩐지 그 대화가 마음에 들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혼자였고, 부모님이 있었을 때에도 형제는 없었다. 가져 보지 못한 것에 대한 동경은 철탑처럼 높고 견고했다. 가까이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마음 한구석이 흐물하게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불쑥 내뱉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엉?”

의아하다는 듯 이연을 바라본 혜성은 곧 그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과장되게 친한 척을 했다.

“그래요. 당분간은 쉬기로 했으니까, 연애 상담 같은 거 하고 싶으면 연락하고!”

“그건 필요 없어요…….”

키가 더 큰 혜성의 손에 이연의 머리카락이 마구 부벼졌다. 아예 동생 취급이었다. 나이로 따지면 한참 동생이 맞긴 하지만……. 얼결에 품에 갇힌 이연이 벗어나지도 힘을 빼지도 못하고 어정쩡한 자세로 버티고 있을 때였다.

쾅.

옆에서 뭔가를 강하게 내리치는 소리가 났다. 순식간에 이연의 뒤로 이목이 집중되었다. 맥주잔을 강하게 움켜쥔 산오가 목석처럼 앉아 있었다.

아마 잔을 세게 내려놓으면서 큰 소리가 난 듯했다. 다행히 컵이 깨지지는 않았다. 행동이 거칠긴 하지만 시끄럽게 구는 애는 아닌데. 이연이 어리둥절하게 산오에게 물었다.

“왜 그래?”

내내 뒤돌아 있다가 겨우 마주 보는 눈동자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 의아하다는 빛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얼굴을 가리고 있는 타인의 팔. 안 그래도 꼬여 있던 산오의 심사가 한층 더 뒤틀렸다. 짜증이 불쑥 머리를 쳐들고 심장 위로 올라왔다.

“네가 같잖은 말에 휘……”

“어머, 산오 씨. 취했어요?”

큰 소리를 듣고 다가온 수아가 놀랍다는 듯 물었다. 덕분에 산오의 말이 절묘하게 끊기며 화제가 전환되었다.

“취했다고?”

이연이 산오의 잔을 보았다. 그러고 보니 반쯤 줄어 있었다. 산오가 그의 앞에서 술을 먹은 건 처음이었다.

그래도 주량이 맥주 반 잔이라니, 너무 약한 거 아냐? 이연이 모처럼 잡은 건수를 놀리기도 전에, 혜성이 얼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산오? 제산오?”

그러고 보니 수아의 질문 폭격에 산오와 혜성이 통성명을 할 기회도 없었다. 혜강이 혜성의 너머에서 고개를 쭉 빼고 대신 대답했다.

“아, 산오 형이 어떻게 인연이 닿아서 우리 일 도와주고 있어.”

“무궁화…… 5단? 그 제산오?”

“어. 신기하지?”

혜강은 농담이라도 말하는 것처럼 웃었다. 혜성은 그때까지도 이연을 한껏 째려보는 산오를 흘끔 훔쳐보며 소곤댔다.

“제산오는 무소속 아니에요?”

“지금도 무소속이긴 해요.”

여전히 어깨동무당하는 중인 이연이 대신 대답했다. 저놈의 팔은 풀릴 기미가 없었다. 간신히 어둑해진 눈동자에서 새파란 빛이 다시 타올랐다.

짜증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않은 산오가 이연의 어깨에 걸쳐져 있던 혜성의 손을 팩 떼 냈다. 밀치는 힘에 덩달아 자빠질 뻔한 이연이 산오의 가슴에 뒤통수를 박으며 간신히 중심을 잡았다.

“아.”

“왜 그래? 술 취했어?”

그제야 상황을 눈치챈 혜성이 팔을 내리는 것과 동시에 이연의 시선이 산오에게 돌아왔다. 이연이 보기엔 묘하게 반응이 느린 게, 술이 좀 올라온 듯했다.

“제가 보기엔 질투하는 것 같은데? 혜성 씨랑 이연 씨가 내내 붙어 있잖아.”

수아가 놀리듯 말했다. 그 말에 깜짝 놀란 이연이 고개를 저었다.

“에이, 질투는 무슨……. 그런 거 아니에요.”

“이연 씨가 어떻게 알아요?”

왜냐하면 우린 사실 사귀는 사이 아니니까……. 그 말을 솔직히 할 수가 없어서 어영부영 입을 다물자, 수아는 깨를 볶는 커플이라며 이연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주방 안쪽으로 들어갔다. 이, 이게 아닌데. 당황하는 사이 혜성까지 머쓱하게 사과하며 이연에게 쏠려 있던 자세를 고쳐 앉았다.

“아, 미안합니다. 생각을 못 했네.”

산오는 아니라는 부정 대신 그저 이연을 노려볼 뿐이었다. 다른 사람 말이 귀에 안 들어오는 것을 보니 정말로 취한 모양이었다. 먼저 보내야 되나? 이연이 망설이며 제안하는 것보다 산오의 목소리가 먼저 떨어졌다.

“너야말로 취했으면 얌전히 누워서 자.”

어째 이를 가는 목소리 같기도 했다. 그러나 이연은 꿋꿋하게 고개를 저었다. 좋지 못한 계기가 시발점이 되어 얼결에 마련된 자리였지만, 이 모임이 싫지 않았다.

“난 괜찮아. 오랜만에 형제 상봉 자리인데, 좀 더 있다 가자.”

원하던 것과 정반대의 대답에 산오의 얼굴이 조금 더 사나워졌다. 혜성이 등장한 이후부터 아무것도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짜증만 배가되었다.

산오는 하루 종일 이연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어떤 식으로 혜성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었는지도 훤히 짐작했다. 그 부분이 더 성질을 돋웠다.

이연은 혜성에게 봉변을 당했다며 한껏 투덜거렸고, 그를 보는 내내 황당하다는 기색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혜성과 혜강이 대화하는 모습을 흘깃대던 눈동자에는 작은 반짝임이 있었다. 오랜만에 만나서 좋겠다고 말하는 얼굴의 온도는 평소보다 높았다.

산오는 그 눈을 이미 본 적 있었다. 건조한 한숨이 입술 안쪽으로 삼켜졌다.

“혜성 씨가 와서 정말 잘됐다. 그치.”

“…….”

“혜강이가 그동안 혼자였잖아.”

그 맹한 낯짝을 한참 노려보던 산오는 이내 손에 힘을 풀었다. 예전에는 이것보다 빠릿했던 것 같은데, 그 긴 기간 동안 얼마나 멍청해진 건지 짐작도 하기 힘들었다.

“혼자라니. 이연이 형도 있고 산오 형도 있잖아.”

냉큼 들어온 혜강의 반박에 이연이 웃음을 터트렸다.

“맞아, 우린 하나지. 그 김에 짠 할까?”

그 말에 산오를 제외한 모두가 술잔을 들었다. 산오는 못마땅한 눈으로 이연을 계속 꼬나보았지만, 더 이상 들어가자는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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