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킹 1위를 임시 보호 중입니다-105화 (104/250)

#105

“으…….”

눈을 떴는데 머리가 아팠다. 이연이 머리를 부여잡으며 가물가물한 시야를 다시 닫고 널브러지자 이불이 바스락대는 소리가 들렸다.

어제 얼마나 마셨는지 기억이 잘 안 났다. 나중엔 소주도 같이 마신 것 같았는데……. 섞어 마시면 틀림없이 숙취가 덮쳐 올 걸 알면서도 늘 마시게 되고, 인간이란 참 어리석다.

“몇 시지…….”

이연은 휴대폰을 찾기 위해 침대를 더듬거리다가 옆자리가 비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운동 갔나? 아니면…….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귀를 기울이니 문밖에서 요리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 아침 당번이 제산오구나……. 다행이다. 이연이 당번이었으면 산오가 진작에 그를 차가운 부엌으로 던져 넣었을 것이다.

두통을 가라앉힌다는 핑계로 침대에서 뒹굴거리기를 몇 분, 곧 문이 벌컥 열렸다.

“밥 처먹어.”

곱지 않은 어조였다. 어제 내가 뭘 했나? 이연은 어리둥절해하는 와중에도 으으, 하고 이불에 몸을 묻었다. 진짜 일어나기 싫다. 오늘만큼 기상이 힘든 적이 없었다. 그간의 모든 술 마신 다음 날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린 이연이 꿈지럭대며 베개를 껴안았다. 필사의 자는 척이었다.

“안 자는 거 알아.”

“…….”

이연이 대답하지 않자 침묵이 흘렀다. 묘하게 무거운 분위기에 괜히 눈만 더 뜨기 힘들어졌다. ……쓸데없이 자는 척했나? 슬그머니 후회하는 동안에도 산오는 말이 없었다.

보지 않아도 스산한 기운이 이렇게 풍기는데, 실제로는 어떤 모습일지 눈에 훤했다. 잘못 선택한 느낌에 이연의 등에 식은땀이 솟기 시작했다.

“왜.”

낮다 못해 음산한 목소리가 방에 깔렸다.

“이상하고 현실이 달라서 먹기 싫어?”

“……어?”

이연이 저도 모르게 얼빠진 소리를 냈다. 갑자기 무슨 소리를……. 당황해서 눈까지 반짝 뜨고 문 쪽을 바라보았지만, 못 들은 건지 듣고도 무시하는 건지 산오는 이미 몸을 돌려 식탁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너른 등이 오늘따라 더 싸늘하게 느껴졌다.

이, 이게 아닌데. 이연은 당황하며 하염없이 산오 쪽을 바라보았지만, 그가 다시 몸을 돌리는 일은 없었다.

“야……. 화났어? 아침이 싫다는 게 아니고…….”

결국 눈치를 보며 일어난 이연이 슬그머니 방을 나왔다. 놀라서 두통도 달아났다.

이연의 말에도 산오는 대답하기는커녕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산오가 맥주 반 잔 마시고 취했다는 건 기억나는데 그 이후에 또 뭔가 일이 있었나?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어 봐도 걸리는 게 없었다.

이런 식으로 구는 산오는 처음이라 더 당황스러웠다. 이연이 뭘 하든 말든 저 하고 싶은 대로 살던 인간 아닌가.

“제산오?”

이연의 등장에 거실에 누워 있던 뭉치가 반짝 고개를 들고는 뛰어왔다. 컥. 뭉치의 몸통 박치기에 잠깐 비틀거린 이연은 뭉치를 애써 진정시키면서 산오의 뒤로 가 기웃댔다.

그러나 산오는 아무 말도 없었다. 그는 확실히 이연을 무시하고 있었다.

“야, 왜 그래…….”

어깨에 슬쩍 손을 대도 요지부동이었다. 남이 건드리든 말든 식사만 하는데 무슨 로봇인 줄 알았다. 안절부절못하던 이연은 결국 뭉치를 놓고 산오의 맞은편에 앉았다. 다행히 그릇을 완전히 치워 버리지는 않아 이연의 몫이 남아 있었다. 달그락. 식기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이연은 아침을 먹는 내내 산오의 눈치를 봤지만, 산오와 시선이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체하는 줄 알았다. 인생에서 이렇게 숨 막히는 아침은 처음이었다. 그 후로도 씻고, 준비하고, 나와서 출근을 할 때까지도 산오는 계속 같은 상태였다. 현관도 먼저 나서려는 것을 간신히 맞춰서 막아선 덕분에 겨우 함께 나올 수 있었다.—덕분에 머리 말리기를 포기했다.— 그는 마치 이연이 옆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굴었다.

막상 함께 사무실까지 오기는 했는데, 분위기가 너무 불편했다. 결국 커피를 사 오겠다는 핑계로 사무실을 탈출한 이연이 아직 젖어 있는 머리를 털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왜…… 왜 화가 난 거지?’

그 부분이 제일 미스터리였다. 원인이라도 알면 어떻게 말을 해 볼 텐데, 이유가 짐작도 안 갔다. 혹시 내가 술 먹다가 제산오 머리에 맥주를 부어 버리기라도 했나? 그럼…… 그럼 그냥 그 자리에서 죽었을 것 같은데. 그 정도로 심한 건 아니지 않을까? 막막하니까 헛생각밖에 안 났다.

사실 근래의 산오라면 음료수도 같이 사러 가겠다며 금방 나섰어야 했다. 그러나 이연이 카페를 가겠다고 다섯 번쯤 말했는데도 산오는 태블릿에 시선을 박고 움직이지도 않았다. 태블릿하고 원수진 줄 알았다.

아니, 아니지. 이유가 저에게 있는 게 아닐지도 몰랐다. 어제까지만 해도 우리 괜찮았잖아. 사, 사귀는 척도 했고……. 이연은 심각한 얼굴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이 방법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지만, 선택지가 몇 개 없었다.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그 후로 1분이나 기다렸으나, 상대방은 답장은커녕 확인도 하지 않았다. 이연이 조금 더 신중하게 타자를 쳤다.

제산오 기분이 좀 안 좋아보여서요

1초 만에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뭔 일이야! 산오 님 기분이 나쁘시다고?]

종찬이 인사도 없이 버럭 외쳤다. 이 인간, 역시 일부러 씹었군. 이연이 투덜거렸다.

“저도 그걸 모르겠어서 물어봤어요. 아침에 좀 화가 난 것 같던데, 혹시 종찬 씨랑 종희 씨가 뭘 했나 해서요.”

[우리가 산오 님 기분 나쁠 만한 짓을 왜 해? 네가 뭘 했겠지.]

“제가요? 제가 대체 뭘 하겠어요?”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내내 스토킹 했으면서 이런 것도 모르다니, 중요할 때 쓸모가 없잖아. 종찬이 아는 게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연이 건성건성 전화를 마무리했다.

“알았어요. 고맙습니다.”

[이 자식, 날 정보원으로 쓰는 거냐?]

“종찬 씨가 할 말이에요?”

[산오 님을 독점하는 걸로도 모자라 날 정보원으로 쓰다니!]

“좋은 하루 되세요~.”

에휴. 화면이 꺼진 휴대폰을 잠깐 들여다본 이연이 다시 한숨을 쉬었다. 종찬의 반응을 보니 일적으로 뭐가 안 풀려서 기분이 저조한 건 아닌 듯했다.

그 후로도 이연은 한참을 고민했으나, 그럴듯한 이유는 하나도 찾지 못했다. 패잔병처럼 터덜거리며 아메리카노 세 잔을 들고 사무실에 들어간 이연을 맞이한 건 혜강이었다.

“어, 형. 왔어?”

“뭐야, 제산오는?”

이연의 시선이 빈 소파를 훑었다. 눌려 있는 자국도 없는 것을 보니 자리를 뜬 지 꽤 오래된 것 같았다.

“산오 형? 내가 왔을 땐 없던데.”

혜강은 웬일로 컴퓨터 앞이 아니라 소파에 몸을 묻고 있었다. 건네주는 커피를 한 잔 받아 든 얼굴은 말갛기 그지없었다. 어젯밤 이연보다 최소 두 배는 더 마신 것으로 추정되는데 숙취에 찌든 이연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혜성 씨는 잘 들어갔어?”

“응. 숙취 때문에 오늘은 쉰다더라.”

혜성도 많이 마시기는 했다. 역시 말끔한 이혜강이 이상한 거지. 이연은 속으로 그렇게 합리화하며 고개를 주억였다.

“맞아, 우리 형이 어제 형한테 번호 묻는 걸 깜빡했다고 해서 내가 줬어.”

“아, 그러네. 알았어.”

미식 친구 하기로 했으니 조만간 연락이 올 터였다. 팍팍한 삶 중 가장 기대되는 일정이었다.

가벼운 대화 후 잠깐 침묵이 흘렀다. 따뜻한 햇살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블라인드 모양대로 비치는 그림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혜강이 문득 입을 열었다.

“형이 임무 하러 가 버린 게 나 열일곱 살 때야.”

그렇게 말하는 혜강의 얼굴은 담담했다. 평소에 잡담을 하는 것과 똑같은 톤으로, 오래도록 품고 있던 과거사가 조금씩 흘러나왔다.

“난 미성년자였고 부모님도 없는데 가볍게도 떠나더라.”

그의 형은 과보호가 투철한 만큼 우선순위가 확실했다. 첫 번째가 임무고, 두 번째가 가족이다.

늘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왔던 형은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데에 거침이 없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도 부족했다. 5년 전의 그날도, 가기 하루 전에 짐을 싸며 통보한 게 다였다.

이번엔 평소보다 오래 걸릴 거라는 말만 남기고 떠난 형은 정말로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어렸던 혜강이 성인이 되고, 직업을 얻고, 독립을 할 때까지도.

“형은 제멋대로긴 했지만, 대책 없는 사람은 아니었어. 집도, 통장도, 위급 상황에 연락할 만한 대리인도 모두 붙여 주고 갔거든. 그래서 생활하는 데에 실질적으로 불편한 것도 없었고.”

형은 없어지고 혜강만 남았지만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형이 안배한 조치들은 혜강이 일상을 영위하는 데에 유효한 도움이 되었다. 혜강은 그 생활에 만족했다.

점점 형이 없는 일상에 익숙해졌어도 온전히 홀로 버티기엔 너무 어린 나이였다. 가끔 보고 싶었고, 슬플 때도 외로울 때도, 원망스러울 때도 있었다. 미성년자를 혼자 두는 게 말이 되냐고. 혜강은 자주 그렇게 투덜거렸다. 그러나 진심으로 화가 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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