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불청객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설마 절 초대한 셈 치는 건 아니죠? 납치라는 건 알고 있는 거죠?”
이연의 불평에도 아랑곳 않은 영이 정헌을 빤히 바라보았다.
“날파리가 붙었어.”
“글쎄……. 네가 날 쫓아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정헌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이연은 그가 초전력에서 싸울 때와 비슷한 태도가 되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러나 영은 이전과 달리 도발에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그녀는 뭐라 대답하는 대신 두 다리를 조금 벌리고 섰다.
쩍…….
그게 신호라는 듯, 영의 발밑이 새하얗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능력이 퍼지는 속도는 무시무시하게 빨랐다. 순식간에 창고 안의 바닥 전체가 거대한 빙판으로 변했다.
꽁꽁 언 아래에서 냉기가 올라와 발목을 간지럽혔다. 이연은 발에 단단히 힘을 주었다. 마찰력이 낮아진 바닥은 조금만 움직여도 그대로 미끄러질 것 같았다.
“2단들보다는 내가 강하거든.”
정헌의 말대로였다. 영은 1단 정도의 능력은커녕 2단 수준도 훨씬 뛰어넘어 있었다.
“이전처럼 네 힘으로 날 제압하는 건 불가능해.”
영은 정헌을 도전적으로 바라보았다. 맞는 말이었다. 이전보다 강해진 영의 능력 운용법은 속도가 붙은 물리력으로 싸우는 종류가 아니었다. 정헌으로서 서서히 얼어붙는 것을 되돌릴 방법은 없었다.
간단하게 두 사람의 발을 붙든 영이 이연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네게 하나만 제안하도록 하지.”
“사람 납치해서 묶어 놓은 후에 하는 걸 제안이라고 말하는 데에는 이견이 좀 있긴 하지만…… 그래요, 들어나 봅시다.”
영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강해지고 싶지 않나?”
“저…… 제가요?”
순간 당황한 이연이 말을 더듬었다.
“아뇨, 저는 별로…….”
“불법이라고 거부감 가질 필요 없어. 효과는 정말로 확실하거든. 예전에는 성공 확률이 낮았지만, 최근에 새로운 방법을 시도하기 시작했고, 성과도 좋아. 때를 잘 맞춰 왔어.”
“아니, 진짜로 괜찮아요.”
어느새 정헌의 얼굴도 묘하게 변해 가고 있었다.
“왜? 강해지면 좋지 않나?”
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더 강해지면 세계 정복도 할 수 있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이연이 잡상인 같은 권유를 거절하기 위해 난감한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그…… 그림 연습은 하고 있거든요.”
“노력 없이 강해지고 싶지 않아?”
진짜 사기꾼 같은 어조였다. 더 들을 것도 없었다. 이연은 재차 거절하려다가, 번뜩 든 생각에 멈칫했다.
“저, 이건 정말 만약에, 만약에 물어보는 건데요.”
영이 말해 보라는 듯 눈짓했다.
“만약에 제가 강해지고 싶다고 하면…… 뭘 하는 건데요?”
“간단한 수술을 할 거야.”
영은 주머니에서 조그마한 보석을 꺼내 들었다. 그것의 정체를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기력량을 늘려 주는 보석이야. 이걸 네 몸에 넣으면 돼.”
이 사기꾼이! 이연이 그렇게 말하려던 주둥이를 간신히 참았다. 대강 윤곽이 잡혔다.
이 공장에서는 보석을 초능력자의 몸에 넣어 활용하는 실험을 하고 있는 듯했다.
무궁화 1단을 2단, 혹은 3단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서는 같은 1단의 기력을 추출하는 걸론 어림도 없다. 최소 3단, 어쩌면 4단의 협조를 받고 있을 터였다. 그게 말이 되나, 싶었지만 서현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름에 뒷 목이 쭈뼛 섰다.
이 실험은 클럽 연구소 때와 근간이 같았다. 초능력자의 기력을 갈취해 만든 정수를 이용해 실험하는 것.
김 박사, 김철재의 방식이다.
하지만 이해가 안 되는 점은 있었다. 보석을 직접 몸에 이식해서 사용이 가능하다면 겉으로 봤을 때는 자기 능력처럼 보이긴 하겠지만, 실제로는 당연히 자기 능력이 아니다. 사용할 때 차이점이 확연하게 느껴질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초능력을 쓰는 본인이 그 사실을 모를 수가 없는데.
이연은 초능력 팔찌를 썼을 때 기력이 빠져나가던 감각을 확실히 기억했다. 그에게 그 정도 기력은 연구소에서 산오와 놀기 위해 거대한 놀이터를 만들 때나 쓰던 거였다. 심지어 그 팔찌는 이연보다 낮은 등급의 초능력자의 기력이었다.
심지어 팔찌는 기력을 ‘빼앗아’ 간다. 목숨에 지장이 없도록 본능 수준에서 제어하는 일반적인 초능력 사용법과는 메커니즘 자체가 달랐다.
제 능력보다 강한 등급의 초능력을 쓰는 데에 얼마만큼의 기력이 필요할지는 예상하기도 힘들었다. 그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영 씨, 그거 계속 쓰면 죽어요.”
1단의 기력으로는 버티기 쉽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벌써 한계에 다다랐을지도 몰랐다. 이연의 시선이 영의 팔로 향했다. 초능력자는 능력 발현, 즉 기력 소모에 따라 일시적, 혹은 영구적으로 외형이 바뀌는 경우가 있다. 산오의 빛나는 눈동자나 비늘 같은 피부처럼.
그리고 이연의 바랜 눈과 머리 색깔처럼.
“그거 영 씨 능력 아니잖아요.”
조용하고 담담한 말에 영이 입술 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날카롭고 건조한 웃음이었다.
“그게 뭐?”
“네?”
“약하게 오래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지?”
“그게 무슨…….”
당황한 이연이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영이 손을 들어 등에 멘 봉을 집어 들었다.
“제안을 거절해서 유감이야.”
사락, 하는 소리와 함께 무기를 감싼 천이 끌러졌다. 기다란 봉의 끝이 이연을 향해 겨누어졌다.
“그럼 살려 둘 수가 없거든.”
그녀는 진심이었다. 정말로 이연과 정헌을 죽여서라도 제 비밀을 유지하고 싶은 것이다.
어쩐지 영업 비밀을 술술 말해 준다 했다. 이연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 이거 또 오지랖이라고 뭐라 할 텐데…….”
“뭐?”
한탄 같은 중얼거림을 알아듣지 못한 영이 인상을 찌푸리며 봉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이연은 그런 동작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처럼 우울한 어조로 중얼거리기만 했다.
“어쩌겠어요. 저는 영 씨가 죽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어요.”
“네가 뭘 어쩔 수 있지?”
영은 정말로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이었다. 이전의 초전력에서도 일대일로 싸웠을 때, 영은 이연의 무력을 뛰어넘었다. 능력이 강해진 지금으로서는 정헌조차 위협이 될 수 없었다.
이연이 힘없이 웃었다. 아무리 위장 등급이어도 죽을 위기에까지 능력을 꽁꽁 감출 생각은 없었다. ……가장 들키지 않았으면 하는 상대에게 이미 들켜 버린 탓도 크고.
“2단들보다 강하다고 했죠.”
새하얀 모래가 천장에 모여들었다. 영은 이 이펙트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허공에서는 절대로 나타날 수 없는 힘이었다. 의문에 찬 눈동자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그저 모래의 동태만 살폈다.
강하지만 경험이 부족한 초능력자. 그녀는 초전력 때와 똑같았다.
“만약 2단보다 강한 상대를 만나면 어떻게 할 건데요?”
하얀 모래는 오래지 않아 바닥을 향한 수십 개의 길쭉한 창으로 변했다. 그 위치는 모두 영의 머리 위였다.
그리고 완성되자마자 아래를 향해 수직 낙하 했다.
“그럼 그때는 또 수술을 받을 건가요? 더 강한 상대를 만나면? 다시 수술을? 죽기 전에 만족하긴 해요?”
쾅! 쾅! 창들은 빠르고 단단했다. 단순한 공격이었지만, 방해 없이 내리꽂히면 그대로 바닥에 박혀 버릴 정도로 강한 힘이었다. 영은 거의 본능에 따라 봉을 휘둘러 창들을 쳐 냈다. 정신없이 대응하는 와중에도 이연의 목소리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는 숨 가쁜 공격을 퍼부으면서도 실제로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런 이연의 눈앞에 대뜸 소녀가 나타났다. 영의 뒤에 있던 조그만 여자아이였다. 소녀의 정체에 대한 추측이 단숨에 진실로 판명되었다. 순간 이동 능력자. 이연을 납치한 공범이다. 그녀는 이연을 향해 발을 휘둘렀다. 매서운 속도였다.
그러나 소녀가 휘두르는 궤적이 일그러지나 싶더니, 발이 파문 아래로 사라졌다.
“이쪽은 내가 맡아 줄게.”
어깨를 으쓱인 정헌이 제 앞에 놓인 여자아이의 발목을 잡아채고 있었다.
순간 이동은 능력 발동 시 일정 공간을 통째로 이동시키는 원리였다. 유감스럽게도, 순간 이동 능력은 정헌의 공간 일체 능력과 상극이다.
공간과 공간을 잇는 정헌의 능력은 순간 이동 능력자가 이동시킬 공간을 인지하는 데에 큰 혼란을 준다. 자칫 잘못 이동했다가는 정헌이 이어 버린 공간에 들어간 신체가 그대로 잘린 채로 이동될 수도 있었다.
정헌이 발목을 놓아주자, 여자아이는 피하듯이 영의 뒤쪽으로 이동했다. 그러자 정헌은 언제든 능력을 쓸 수 있다는 듯 능글맞게 웃으며 손가락을 구부렸다. 곧 소녀의 오른팔 부분에 다시 파문이 일었다. 소녀는 간신히 공격을 피했지만, 정헌을 경계하는 동시에 영을 도와 이연을 공격하는 것은 힘들 터였다.
“고마워요.”
이연이 고개를 까딱이고 다시 영을 바라보았다. 인상을 찌푸린 영이 이연을 노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