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사실상 김 박사가 그를 막을 방법은 없었다. 오면 그냥 가둬 버려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이연은 창살을 하나하나 자르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가 나갈 정도의 구멍을 만드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쩍…….
“응?”
머리 위에서 들리는 심상치 않은 소리에 이연이 창살을 자르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격자무늬의 쇳덩이 사이로 달랑이는 이음매와, 금이 간 벽, 그리고 거기서 불어오는 바람…….
바람?
짤랑! 타이밍 좋게 이음매가 마지막 힘을 다하고 완전히 떨어졌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사슬이 바닥에 널브러지며 천장이 훤히 보였다.
납작한 창고의 천장은 무거운 것이 짓누르고 있는 것처럼 심하게 휘어 있었다. 조금 전 이연의 공격을 받아 깨진 것 같았다. 하중을 견디지 못한 지붕은 점점 더 찌그러지고 있었다.
그 틈 사이로 거대한 돌덩이들이 보였다. 이연이 만들어 내 창고 지붕에 내던진 바위들이었다.
내리치는 힘이 너무 강해 지붕이 부서진 것이다.
“헉…….”
이연은 서둘러 바위를 없앴으나, 오히려 역효과였다. 바위들이 내던져지면서 창고 위에 있는 컨테이너 박스를 함께 부쉈고, 옆구리가 뚫린 컨테이너 박스들은 쓰러지다 말고 바위에 막혀 있다가 이연이 능력을 해제함으로써 자유를 찾았다. 컨테이너들은 곧 찌그러진 지붕 경사를 이기지 못하고 미끄러지며 본체와 함께 안에 있던 건축 자재까지 몽땅 쏟아졌다.
이연이 뚫어 놓은 구멍으로 말이다.
“미친…….”
이연의 신음은 컨테이너가 쓰러지는 둔탁한 소리에 묻혔다. 쿵!
그게 결정타였다.
지붕이 손쓸 틈도 없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이연은 능력을 일으켜 제 몸과 김 박사의 머리 위로 둥근 방패를 만들었다. 창고 내부도 어떻게든 뼈대를 만들어 무너지지 않게 하려고 했지만, 이미 반쯤 무너진 상태라 큰 소용이 없었다.
이연은 재빨리 상황을 판단하고 방패를 한 겹 더 둘렀다. 일단 다 무너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나가는 게 최선…….
“정이연!”
쾅! 그때, 창고의 문이 부서질 것 같은 기세로 열렸다. 커다란 목소리가 고함을 치듯 외쳤다.
“어디 있어!”
익숙한 음성이었지만, 그처럼 다급하게 소리 지르는 것은 처음 들었다. 이연이 조금 당황한 채로 어, 어, 하고 얼빠진 소리만 내뱉은 찰나, 산오와 눈이 마주쳤다. 여기서 만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한 사람이었다.
감옥에 갇힌 이연을 발견한 산오의 눈이 초록빛 불꽃이 타오르는 것처럼 빛났다.
그리고 지붕을 뚫고 낙하한 컨테이너 박스가 두 사람 사이에 꽂혔다.
산오의 모습이 쇳덩어리에 가려 사라지자마자 나무 목재와 철근이 비처럼 쏟아졌다. 보호벽에 잔뜩 힘을 줬으니 위험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연은 김 박사를 흘끗 돌아봤다. 공포에 찌든 눈이 전방과 천장을 번갈아 바라보며 흔들리는 폼이 어째 불길했다.
“김철재 씨, 움직이지 마세요. 위험……!”
이연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김 박사는 뒷걸음질 치다가 작은 각목 하나를 맞고 기절했다. 아이고……. 이연은 한숨을 삼키며 쓰러진 김 박사의 전신을 가릴 수 있도록 다시 보호벽을 대어 주었다.
쏟아져 내리는 잔해들이 멈추길 기다리는 동안, 이연은 마지막으로 본 산오의 모습을 곱씹었다. 조금 흐트러져 있는 행색이 어지간히도 다급하게 움직인 것 같았다.
이깟 소동에 산오가 다칠 거라는 걱정은 들지도 않았다. 그보다는 어떻게 여길 왔는지가 더 궁금했다. 모르포를 쫓고 있을 줄 알았는데. 혜강이가 연락했나? 아니면 김 박사가 모르포와 관련이 있다는 정보를…….
휘이…….
이연은 상념에 빠져 있느라 어느새 주위가 고요해졌다는 사실을 빠르게 눈치채지 못했다. 앞머리를 간질이는 바람을 맞고 나서야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이연이 고개를 들었다.
창고, 컨테이너 박스, 철근. 모든 자재가 시간이라도 멈춘 것처럼 정지되어 있었다.
이연이 갇힌 감옥과 창고 입구 사이는 뻥 뚫려 있었다. 그 사이를 방해하는 것들은 억지로 우그러지고 밀려났다.
그 광경은 일반적인 물리 법칙을 한참 초월해서, 마치 초현실적인 예술 작품을 보는 것 같았다.
길의 끝에 산오가 서 있었다.
그는 무시무시하게 굳은 얼굴로 이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노려보는 수준에 가까웠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봤을 때도 날 못마땅해했었지. 금세 현실을 자각한 이연이 찔끔 움츠러들었다.
김 박사가 모르포랑 연락이 끊기지만 않았어도 정보를 알아내 조금 우쭐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웠다. 달리 말 붙일 거리도 없고……. 이연이 우물쭈물하는 동안, 산오가 조용히 걸어왔다.
산오는 곧 이연의 앞에 도달했다. 커다란 몸이 감옥 앞에 서자, 그늘에 이연이 전부 담겼다.
감옥은 산오가 다가서자마자 모세가 바다를 가르는 것처럼 두 갈래로 나뉘었다. 순식간에 자유의 몸이 된 이연과 산오 사이에 어색한 분위기가 맴돌았다. 눈치를 보던 이연이 조그맣게 입을 열었다.
“미안.”
“…….”
“내가 알아봤는데, 모르포는 여기랑 관련 없는 것 같아. 김철재 씨가……”
“감히.”
주절주절하는 목소리를 끊은 것은 목구멍을 긁고 기어 나오는 저음이었다. 그 안에 담긴 것은 선명한 분노였다. 이연이 놀라 말을 멈춘 사이 산오가 고개를 들었다. 새파란 눈동자가 그를 똑바로 노려보고 있었다.
“감히 내 앞에서 그딴 식으로 사라져?”
“어, 어?”
이연이 어리둥절하게 되물었다. 뭘 말하는 거지? 사라지다니. 엄밀히 따지면 먼저 사라진 것은 산오가 아닌가. 그가 커피 사러 간 사이 아무 말 없이……. 그러나 이연은 생각한 대로 항변할 수가 없었다.
산오의 눈동자가 불안한 듯 흔들리고 있었다.
이연을 보면 짜증이나 낼 게 빤했다. 그렇다고 성질을 죽이지도 못하고, 시무룩한 이연을 보는 것도 싫어서 산오는 적당히 아무 데서나 밤을 새며 서류를 검토했다. 희수가 준 정보를 토대로 찾아온 곳은 한적한 창고 부지. 오만 가지의 불법 연구소를 소탕해 이쪽 방면에서는 도가 튼 산오는 금세 눈치챘다. 불법 행위 하기에 딱 좋은 장소였다.
지이잉…….
“뭐야.”
[그, 너 지금 어디야?]
그즈음, 이연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에게서 먼저 연락이 온 것은 처음이었다. 그 사실에 나름대로 기분이 괜찮았던 산오는 영문 모를 말을 지껄이는 이연에게도 퍽 친절하게 대꾸해 주었다. 밖인 것 같길래 어디냐고 물어보려고 했지만, 대답을 들을 틈도 없이 통화가 끊어졌다. 이건 또 무슨 예의지? 황당하게 끊긴 전화를 노려봐도 잘못 눌렀다며 다시 전화가 걸려 오는 일은 없었다.
뭐, 상관없었다. 이연의 이동 범위는 한정적이다. 이 일이 끝나고 집에 가면 만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짜증 나서 뛰쳐나왔고 아직도 짜증이 가시진 않았지만, 목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달라졌다. 어떤 얼굴로 말을 했을지 궁금해졌다. 눈앞에서 봐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그러려면 일을 빨리 마무리해야 했다. 산오는 화면이 까맣게 죽은 휴대폰을 흘끗 내려다보고는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잠깐 쓴 기계는 금세 따뜻해졌다.
작은 창고부터 뒤져 가며 관계자들을 줄줄이 가두면서 나아가는데, 갑자기 큰 소리가 들렸다. 뭐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들었는데.
가장 안쪽에 있는 커다란 물류 창고 위에서 하얀 모래가 거대한 바위들을 만들어 내리치고 있었다.
무슨 능력인지 몰라볼 수가 없었다. 여기에 있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산오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바위가 어찌나 거칠게 창고를 내리찧는지 지붕이 거의 무너질 지경이었다.
만약 바깥에 있다면 무너지든 말든 상관없었다. 산오는 애써 낙천적으로 생각하며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창고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다.
무너질 것 같은 건물. 그 안에 있는 사람. 어릴 적의 기억이 뱀처럼 기어 올라와 심장을 말아 쥐었다. 두근, 두근. 맥박이 빨라졌다.
“정이연!”
소리 지르는 목소리가 어떤 빛을 띠고 있는지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다행히도, 문을 연 산오는 이연과 바로 눈이 마주쳤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작은 철창에 갇혀 있긴 했지만, 의식도 멀쩡히 있었고, 정신도 말짱한 것 같았다.
살아 있다.
그렇게 생각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기도 전에 컨테이너 박스가 눈앞에 내리꽂혔다.
어떤 잔상이 그 위에 덧씌워졌다. 쏟아지는 자재와 우그러지는 잔해들은 무너지던 하얀 건물과 닮아 있었다.
“네가 뒤돌아보지 말고 달리라고 했지.”
“…….”
“네가 함께 나가자고 했어.”
“…….”
“네가!”
이연은 그가 뭘 말하는 건지 뒤늦게 깨달았다. 눈을 크게 뜨고 빤히 바라보는 하얀 얼굴이 초록색 눈에 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