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희수의 도움으로 산오는 제힘이 생각보다 몇 차원은 강한 힘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게 증명될수록, 연구소 안에 놔두고 온 친구의 꿈을 꾸는 날이 많아졌다. 새벽에 식은땀 범벅으로 깨고, 아무도 없는 공간을 확인하고, 한참을 누워 있기만 하다가 해가 떴다.
그러다가 몸이 버틸 수 없는 지경이 되면 아주 긴긴 잠을 잤다. 거기에서는 정연과 학교에 갈 수 있었다. 매일 대화하고, 놀고, 성인이 되면 같이 헌터가 되었다. 변이종과 전투하고, 임무도, 초전력도, 모든 걸 함께 했다.
그리고 늘 그만 혼자 살아남았다.
“네가 나를 끌어냈어.”
이제는 완전하게 초록색이 되어 버린 눈동자가 처음 봤을 때보다 색이 훨씬 옅어진 남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어릴 때와 그다지 변하지 않은 얼굴은 그때와 똑같이 맹하고 해맑았다.
희수의 지원하에 초능력 학교를 다녔다. 정연의 말은 거짓말이었다. 학교는 하나도 재미가 없었다. 따분하고 지루한 나날이었다.
그러다가 지형 설정 기능이 개발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실체화 능력을 사용한 시스템. 이어지는 시연 영상은 아무리 봐도 정연이 능력을 사용할 때와 똑같았다. 산오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틀림없는 이정연이다. 그런 능력을 가진 것은 그밖에 없었다.
그러나 개발자는 지형 설정 기능을 만들자마자 사라졌다고 했다. 이름도, 성별도, 나이도, 모든 것이 불문에 부쳐져 있었다. 성인도 되지 않은 어린아이가 그런 정보를 알아낼 방법은 없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정연이 살아 있었다.
그거면 충분했다.
산오가 성인이 된 후 가장 먼저 한 것은 지형 설정 기능의 개발자를 찾는 일이었다. 거기에 추가적으로 그가 있었던 연구소에 대해 조사하는 것도.
온갖 루트로 정보를 수집했고, 희수와 함께 한 불법 연구소 소탕도 그중 일부였다. 그 과정에서 산오는 모르포라는 연구자를 알게 되었다. 그가 누구인지는 너무 쉽게 추측 가능했다. 정연의 삼촌. 3호가 있던 연구소장.
그런데 그가 지형 설정 기능의 개발자라고 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지형 설정 기능에 쓰인 실체화 능력은 틀림없이 산오가 아는 그 능력인데, 오로지 좆같은 신비주의를 고수한 불법 연구자의 흔적만 가득했다. 거기에 휘말린 아이의 이름은 어디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이후 기록 역시 어디에도 없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불분명했다. 그가 믿던 모든 것이 잘못된 정보였다. 산오는 하루는 그가 살아 있다는 상상을 하고, 다음 날은 죽어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초 단위로 냉탕과 열탕을 번갈아서 드나드는 것 같았다.
너무 자주 꺼내 닳고 닳은 기억을 필사적으로 매만졌다. 그 아이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산오밖에 없었다. 그가 잊어버리면 끝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점 흐릿해져 갔다.
나중에는 자기 자신을 의심하게 되었다. 누군가는 없는 존재라고 했다. 다른 누군가는 있든 없든 상관없으니 그냥 잊어버리라고 했다. 만약 그들의 말이 맞다면.
그럼 나는 왜 살아 있는 거지?
산오는 그 아이 때문에 살아 있는 거였다. 그 아이가 산오를 살려냈다. 그 아이가 없다면 살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체념이 서서히 전신을 좀먹었다. 전염병처럼 잠식한 우울은 이내 뇌를 전부 뒤덮었다. 무언가를 할 의지도, 의욕도 없었다. 헌터 임무는 물론이고 일상생활조차 의미를 잃었다.
그러던 중에 비가 왔다.
그토록 싫어하던 비를 고스란히 맞고 있는데도 아무런 느낌도 나지 않았다. 아무렇게나 걷던 산오는 발에 차이는 무언가에 걸려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차라리 이대로 비가 몸을 전부 녹여 버렸으면 했다. 엉망이 된 머릿속은 이내 지독한 피로로 흐려졌다. 어느 순간 정신이 끊어졌다.
눈을 뜨니 모르는 곳이었다.
거기에 그토록 찾던 사람이 있었다.
처음에는 당연히 꿈인 줄 알았다. 수없이 경험한 상상은 언제 겪어도 새롭게 짜증 났다. 끔찍한 결말은 한결같았고, 늦든 빠르든 칙칙한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지겨웠다.
달콤한 꿈은 오래 지속할수록 허무할 뿐이다. 그래서 찢어 버리기 위해 손을 들었다.
그런데 그게 현실이었다.
“네가 나를 살렸잖아.”
살아 있었다.
“그러니까, 나를 두고 가지 마.”
좆같은 악몽은 끝났다. 이게 현실이었다.
어느샌가 산오는 이연의 팔을 붙들고 있었다. 이연이 곧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절박한 힘이었다.
그것이 얼마 전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것은 우연이 아닐 터였다.
“……끝난 게 아니었어?”
스스로 말해 놓고도 한심하기 짝이 없는 질문이었다. 그 멍청한 말에도 산오는 성실하게 인상을 찡그렸다.
“누구 마음대로.”
그 말투가 너무, 너무나도 평소의 제산오였기 때문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인상을 찌푸린 이연이 고개를 저었다.
“네가 인분을, 찾았다고…… 인분을 찾을 때까지만 같이…….”
두서없이 흘러나온 말은 이내 끝이 뭉그러졌다. 목구멍 너머에서 울컥, 하고 뜨거운 게 밀려 올라왔다.
그동안 봐 온 산오는 늘상 자신만만하고 건방진 모습이어서, 탈출한 후로 어련히 자유를 만끽하며 잘 살았겠거니 생각했다. 설마 그렇게 찾아다녔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이연 같은 건 진작에 잊어버렸을 줄 알았다. 그 후로 연락도 두절되지 않았는가.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을 게 당연했다.
이연과 산오가 함께 놀며 지냈던 기간은 살아온 날의 0.1%도 안 됐다. 게다가 산오는 거기서 학대만 당했고. 그러니까 당연히, 당연히…….
“미안.”
덜덜 떨리는 목소리가 힘없이 흘러나왔다. 이연이 눈을 꾹 감았다. 사과라도 제대로 해야 하는데. 마음처럼 잘되지가 않았다. 마치 십 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울음이 속절없이 토해졌다.
“미안…….”
따뜻한 손이 이연의 뺨을 쓸어 물기를 훔쳐 냈다. 남자의 손은 금세 흥건하게 젖었다.
“울지 마.”
이정연은 정이연이라는 이름으로 살아 있었다. 허구도, 망상도 아니었다. 산오와 연구소 안에 있었던 조그마한 소년은 실재했다. 지금 그의 곁에 있다.
그래서 산오가 살아 있던 것은 헛되지 않게 되었다.
*
“그러니까, 본능력이 실체화란 말이지. 지형 설정 기능에 쓰인 능력이 형 거고.”
“네…….”
공장에서 바로 산오와 헤어져 사무실로 귀환한 이연은 곧장 두 손을 공손하게 무릎에 모으고 소파에 앉아 혜강에게 모든 것을 고백했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한 대답에 맞은편 소파에서 근엄한 자세로 이연을 노려보던 혜강이 다시 물었다.
“그런데 나한테 한번 숨기니까 솔직히 못 말하겠어서 계속 구라를 쳤고.”
“네에…….”
기죽은 목소리가 더 작아졌다. 이제는 거의 흔적만 남은 웅얼거림에 혜강이 인상을 썼다.
“형이 애야?”
“…….”
“왜 사서 고생을 해? 진작에 알았으면 1시간 할 일을 1분 만에 끝냈겠고만!”
우리 왜 그렇게 개고생을 하고 다닌 거야? 혜강의 비명 같은 잔소리가 사무실에 메아리쳤다. 그럴수록 이연의 고개는 점점 바닥으로 파고 들어갔다. 미안…….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를 사과만 한 번 더 반복했다.
“봐 봐. 능력 써 봐.”
그 말에 이연이 테이블 위를 빤히 바라보았다. 하얀 모래가 뭉쳐지며 무릎을 꿇고 있는 미니 정이연이 만들어졌다.
“와…….”
혜강이 허망함에 가득 찬 얼굴로 신음했다. 능력 종류, 만드는 속도, 디테일. 어디로 보나 최소 무궁화 5단이었다.
“승단 심사 받을 생각은 없어?”
“어, 지형 설정 기능에 쓰인 기력 파장이랑 같다는 거 알면 일이 좀 복잡해질 것 같아서…….”
다들 잘 쓰고 있는 기능이 갑자기 없어지면 곤란하잖아. 당장 다음 초전력부터 문제가 생길 거고……. 이연의 목소리는 여전히 기운이 빠져 있었지만, 그 말만큼은 확연한 의지가 서려 있었다.
“그래, 뭐……. 그거야 형 자유니까. 형 능력 또 다른 사람 누가 알아?”
“너랑 제산오랑, ……정헌 씨랑 영 씨도.”
“내가 네 번째야? 숫자도 불길하네.”
가볍게 투덜거린 혜강이 알겠다며 훌쩍 일어섰다. 더럭 겁먹은 이연이 잽싸게 선수를 쳤다.
“사표는 안 받을 거야.”
“갑자기 내가 왜 퇴사해? 이거 권고사직이면 노동청에 신고한다.”
“아냐! 네가 남으면 난 좋지만…… 괜찮아?”
“얼추 짐작하고 있었다니까. 이 정도로 사기일 줄은 몰랐지만…….”
혜강이 아직도 무릎을 꿇고 싹싹 빌고 있는 미니 정이연을 바라보았다. 과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는 생각으로 지내 오긴 했지만, 이연이 밝힌 사정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거대한 비밀이었다. 모르포와 불법 실험, 정연, 그리고 산오. 모든 게 엮여 있었다. 그제야 어느 날 대뜸 랭킹 1위를 태연하게 뒤에 매달고 나타난 배경을 알 듯 말 듯 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겨난 감정은 희한하게도 배신감이 아니라 측은지심이었다. 이연은 말을 하는 내내 시선을 내리깔고 혜강과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마치 마땅히 받을 벌을 받겠다는 태도였다.
솔직히 그 점에 가장 마음이 상했다.
“어차피 이 회사 나 없으면 안 돌아가잖아.”
“……그건, 그렇지.”
그제야 이연이 고개를 슬그머니 들었다. 움츠러든 눈동자와 슬쩍 눈이 마주치자, 혜강이 부러 심드렁하게 말했다.
“내가 이 좋은 회사를 왜 떠나? 근무 시간 유연하고, 근무 환경 좋고, 돈도 많이 주는데.”
이연은 종종 바보 같은 면이 있어서,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으면 알아듣지 못하는 척했다. 일부러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눈을 감아 버리곤 했다.
그러니까 아주 확실하게 말해 주는 게 좋았다.
“그리고 대표가 잘못했다고 한 달 동안 술도 사 줄 건데.”
“……어?”
“아니야?”
혜강은 제 고정석, 책상에 앉았다. 의자 등받이에 기대 고개를 기울이자, 이연이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사, 사 줄게. 맛있는 걸로 사 줄게. 더듬더듬 흘러나오던 목소리는 점점 기쁨이 섞였다. 역시 이쪽이 듣기 좋다. 혜강은 모니터에 웃는 얼굴을 슬쩍 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