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킹 1위를 임시 보호 중입니다-124화 (123/250)

#124

11. 미래와 미래 사이 (上)

“그래서 둘이 사귀게 됐다고?”

“아, 그게 아니라니까요.”

D.S의 공방은 오늘도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배경 음악처럼 깔려 있었다. 그녀가 작업하는 책상 옆에 걸터앉아 팔짱을 낀 이연이 뚱한 얼굴을 했다.

“왜 자꾸 다들 연애로 엮는 거예요? 우정이라고요. D.S 씨 친구 없어요? 아, 없다고 했지. 미안해요.”

“너 지금 나한테 시비 거냐?”

“아니, 봐요. 좋아한다고 고백을 한 게 아니잖아요.”

“꼭 찍어 먹어 봐야 똥인 줄 아는 놈이 있지.”

“똥? 지금 제산오보고 똥이라고 한 거예요?”

“아니. 네가 똥 먹는 놈이라는 소리야.”

D.S는 작업하는 손을 계속 움직이느라 이연과 눈도 마주치지 않으면서도 온갖 핀잔을 날렸다. 진짜 아닌데. 제산오를 몰라서 하는 소리다. 이연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물론 D.S는 본 척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를 두고 가지 마.’

산오의 목소리는 아직도 선명했다. 다급하고, 감정적이고, 조금 절박한. 산오가 낼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한 음성이었다. 내용 역시 꿈에서조차 그려 본 적 없었다.

산오는 내내 그를 찾아다녔다.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그간 그의 행동이 얼추 이해되었다. 왜 대뜸 은혜를 갚는다는 소릴 한 건지, 왜 일뿐만이 아니라 놀러 가는 데에도 그렇게 적극적이었는지.

산오는 아직 그를 친구로 생각하고 있었다. 연구소를 나와서도 그를 잊어버리지 않았다.

‘내가 안 떨어질 거라서.’

그 말을 떠올리면 묘하게 고양되었다. 박살이 나 잔해조차 남지 않은 바닥 한구석에서 아주 조그맣게 반짝이는 파편을 발견한 것 같았다. 말의 내용을 따져 보면 산오가 그간 엄청나게 고생을 했다는 건데. 전혀 기뻐할 일이 아닌데. 이연은 조금 달아오른 뒷 목을 슬쩍 문질렀다.

산오는 빈말 같은 건 하지 않으니 정말로 제가 했던 말을 지킬 것이다. 산오가 저를 위한 자리를 조금은 내준 것 같아서 마음이 들떴다. 나중에 일상으로 돌아가게 되어도, 가끔은 연락해도 되는 것 같았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분에 넘치는 호사였다.

감히 그 이상을 바랄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그 안 떨어진다는 녀석은 어디 갔는데.”

“비서가 잠깐 불러서요.”

오늘따라 유난히 귀찮아하긴 했지만 결국 산오는 자리를 비웠다. 꽤 중요한 용건이었던 모양이다. 덕분에 이연이 D.S의 공방에 놀러 가 수다 떨 시간이 생기긴 했지만.

“너도 볼일 끝났으면 가.”

“왜요. 조금만 더 놀아 줘요.”

“너 내가 만만해? 나 바쁜 사람이야. 넌 지금 존나 방해고.”

“아, 거참 빡빡하시네.”

이연은 투덜대면서도 몸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산오가 괜찮다고 했으니 아마도 큰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어서 은근슬쩍 D.S의 공방에 비비고 있던 참이었다. 마침 할 일도 없고……. 이연은 속으로 변명을 중얼거리며 책상에 기댄 엉덩이에 은근히 힘을 주었다.

삐, 삐, 삐.

그때, 요란한 기계음이 울렸다.

“응?”

이연이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D.S의 수많은 장비들 중에서도 특히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모니터 여섯 대가 자리를 맞추어 놓인 커다란 컴퓨터 책상 위에서 조그마한 원뿔 모양의 기계가 반짝이고 있었다.

“저건 뭐예요?”

“아.”

D.S가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로 탄성을 내뱉었다. 이연과 대화하는 내내 멈추지 않던 작업까지 내버려 두고 일어선 그녀는 책상 쪽으로 다가가 원뿔 기계에 달린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모든 모니터가 일시에 켜지며 커다란 영상을 송출했다. 화면은 자동으로 초점을 잡느라 흐려졌다가 선명해지길 반복했다. 두어 번 그런 과정을 거친 후에야 깨끗한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

화면을 확인한 이연의 눈이 가늘어졌다. 액정에는 어떤 방 안의 풍경이 담겨 있었다. 조그만 침대, 알록달록한 책장. 아무렇게나 던져진 책가방과 와르르 쏟아진 채로 방치되어 있는 숙제들.

특이한 점은 이것들을 비추는 앵글이 묘하다는 것이다. 마치 켜진 줄도 모르는 카메라를 아무렇게나 쥐고 있는 것같이 산만한 구도였다.

화질은 공책 표지에 적힌 주인의 이름까지 보일 정도로 선명했다. 이연도 아는 이름이었다.

“D.S 씨, 미래 감시해요?”

D.S가 정색했다.

“감시라니, 말조심해. 베이비캠 몰라?”

“초등학생한테 베이비캠이 왜 필요한데요?”

이럴 시간에 미래랑 놀아 주기나 할 것이지……. 이게 무슨 음습한 행태란 말인가. 이연이 순식간에 구질구질한 진상에서 번듯한 정상인으로 변모했다. 그러나 D.S는 제 주장을 관철했다.

“간단한 안전상의 조치야.”

“미래네 집 경비 엄청 삼엄하다고 하지 않았어요? 거기서 더 안전을 추구할 게 뭐가 있어요?”

“네가 뭘 모르는가 본데, 안전은 원래 아무리 추구해도 부족해.”

D.S가 미래에게 카메라가 달려 있는 인형을 선물로 준 것은 최근의 일이었다. 아이의 상태는 평소와 똑같았지만, 그것은 초능력에 가까운 어떤 직감이었다. D.S는 그렇게 싫어하는 희수를 불러 가면서까지 미래를 만났고, 인형을 주면서 이렇게 일렀다.

‘만약 누가 네게 무섭게 굴면, 이 인형을 끌어안고 엄마를 불러. 엄마 대신이라고 생각해.’

인형이 엄마를 부르는 미래의 목소리를 인식하면 카메라가 자동으로 켜지는 구조였다. 촬영되는 영상은 D.S의 공방으로 실시간 전송되었다.

“뭐야, 그럼 지금 미래가 위험하다는 거 아니에요?”

이연이 놀라서 물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 미래에게 찾아가야……. 그러나 D.S는 침착하게 고개를 저었다.

“준 지 2주인가 됐는데, 이게 182번째 콜이야. 위험할 때 쓰라고 줬더니 시도 때도 없이 날 불러. 아주 애착 인형 다 됐어.”

“아.”

하긴 어린아이니, 의도를 정확히 이해하고 쓰는 것은 무리일 수도 있겠다.

[엄마…….]

가냘픈 소리가 카메라 위에서 울렸다. 촬영 화면이 계속 흔들리는 모습을 보니 인형을 계속 끌어안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제저녁에 할머니랑 밥 먹었는데, 왼손으로 밥 먹지 말라고 했어. 삼춘은 이제까지 아무 말 안 했는데……. 그래서 오른손으로 먹다가 계속 흘렸더니 지저분하대.]

D.S는 가만가만 흘러나오는 아이의 목소리를 듣다가 모니터를 향해 상체를 숙였다. 다정한 음성이 나직하게 흘러나왔다.

“……그랬어?”

[그래서 내가 할머니한테 흘리는 것보다는 왼손이 낫지 않겠냐고 했는데, 말대꾸한다고 혼났어…….]

“할머니가 못됐네.”

[힝, 삼촌만 있었으면 삼촌이 내 편 들어 줬을 텐데.]

“그놈은 뭐 하느라 그렇게 바쁜데.”

[요즘 계속 집에 안 들어와. 미래 삼촌 보고 싶어.]

미래에게 조곤조곤 말을 건네는 D.S의 얼굴은 아주 조금 풀려 있었다. 미약한 웃음기가 목소리에 섞여들었다.

“나중에 들어오면 엉덩이라도 차 줘.”

[……사실은 엄마가 더 보고 싶어.]

“…….”

[엄마는 언제 만날 수 있어?]

D.S는 더 이상 대답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가라앉은 눈동자는 가만히 모니터만을 바라보았다. 이연이 위로하듯 부드럽게 말했다.

“그래도 대화 기능이 된다니, 그건 좋네요.”

그제야 모니터에서 눈을 뗀 D.S가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피식 웃었다.

“아니. 난 미래와 사적으로 직접 연락하지 않겠다고 계약을 했어. 그런 판에 통화 기능이 걸리면 이래저래 리스크가 커지거든. 저건 위험 감지용이니까 내 목소리를 들려줄 필요도 없고.”

“……그럼…….”

D.S는 화면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커다란 액정 가득 비치는 것은 미래의 얼굴이 아니라 미래가 끌어안은 인형의 시야였지만, 자세히 보면 제 딸이 보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집요한 시선이었다.

“괜찮아.”

그 말은 이연에게 한다기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되뇌는 것 같았다.

“이 정도도 나쁘지 않아.”

D.S의 마음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연은 섣불리 말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가만히 침묵을 지키는 동안, 이연은 하릴없이 모니터만 바라보았다.

커다란 화면은 아이의 방을 담고 있었다. 인형을 고쳐 안을 때마다 조금씩 바뀌는 앵글로 어느 정도 구조를 유추할 수 있었다. 꽉꽉 채워져서 가지런히 정리된 옷장이나 알록달록한 책장은 미래의 키에 맞춰 벽에 조르륵 붙어 있었고, 벽지 역시 화사한 민트색이었다. 평범한 것을 넘어 좀 화려해 보이기까지 하는 인테리어였다.

그래도 여러모로 아이를 신경 쓴 티가 났다. 다행히 구박을 받거나 하지는 않는 모양이다.

“저 집에서 차별 없이 대접받는 나이는 중학교까지야.”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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