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킹 1위를 임시 보호 중입니다 (137)화 (137/250)

#137

12. 미래와 미래 사이 ()

[그래서, 원래부터 미래를 대상으로 하는 실험을 계획 중이었다는 점 확인했습니다. 그다음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

“…….”

세 사람의 시선이 이연의 품으로 향했다. 아무리 긴급한 상황이어도 똥짤막한 팔로 애써 팔짱을 끼려고 노력하는 토끼 인형이 고저 없는 기계음으로 읊조리는 꼬라지를 무시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들고 계신 건 뭐예요?”

세은 역시 도발적인 칠칠의 존재감을 이기지 못했다. 떨떠름한 질문에 이연이 은근슬쩍 칠칠을 안고 있던 팔을 풀며 대충 쥐어 거리를 떨어트렸다.

“아, 이게. 미래 인형인데…… 미래 방 갔다가 발견해서요.”

[제 별명은 칠칠입니다. 칠칠이라고 불러 주시면 됩니다.]

칠칠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기다란 토끼 귀가 움직임에 따라 덜렁거렸다. 세은은 이연의 한 손에 달랑달랑 매달려 명랑하게 자기소개를 하는 칠칠을 혼란스러운 얼굴로 바라보았다.

“로……봇인가요?”

“예, 뭐……. 그런 기능도 조금 있는 것 같긴 해요.”

이연이 옆에서 제 정체를 두루뭉술하게 넘겨 버리든 말든 칠칠은 제 할 말에만 집중했다. 조금 전의 질문이 그대로 반복되었다.

[그다음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아, 그래서 그, 그 말에 놀라서 정신없이 지하를 벗어나 별채로 가던 길이었어요. 희수 오빠한테 도움을 청하고 싶어서…….”

“만약 진 국장님이 없으면요?”

“……그건…….”

세은이 우물쭈물 말끝을 흐렸다. 이연이 다시 물었다.

“도움 구할 만한 다른 사람은 몰라요?”

“……네.”

조그마한 목소리로 긍정하면서도 그 사실이 퍽 민망했는지, 세은은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깔았다. 이연이 좀 더 묻기 위해 입을 막 여는데, 때마침 D.S의 목소리가 통신기 너머로 넘어왔다.

- 동영상 전부 확인했어. 생활 패턴은 꽤 일정해.

이연은 일부러 대답하지 않았다. 세은에게 통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굳이 알릴 필요는 없었다.

- 미래가 학교 갔다가 학원을 다녀오면 5시 반 정도. 저녁은 6시에 먹어. 오래 먹어 봤자 한 시간 남짓이겠지.

D.S의 말대로라면 자는 시간인 9시까지 두 시간쯤이 빈다. 어째 느낌이 불길했다. 이연이 뒤숭숭한 얼굴로 D.S의 뒷말을 기다렸다.

- 그런데 미래는 오후 7시에서 8시 사이에는 한 번도 날 부르지 않았어.

짧은 숨과 함께 말이 이어졌다.

- 오늘이 처음이야.

항상 불길한 예감은 틀리질 않는다.

세은의 말이 완전히 꾸며 낸 이야기가 아니라는 소리였다. 미래는 7시에서 8시 사이에 세은을 만나러 본채 지하를 드나들었고, 오늘 처음으로 시간을 어기고 아예 가지 않았다.

그런데 세은은 미래를 만나지 못한 지 며칠은 되었다고 했다. 그간 대신 만난 것은 세미일 것이다.

그러다가 우연히 세미의 속셈을 알게 되어서 미래는 지하에 발길을 끊었고, 마음이 급해진 세미가 그대로 납치했다는 가설이 유력했다. 그거라면 세미가 그 시간에 미래의 방 앞을 서성거린 이유가 납득이 됐다.

- 이런 건 어떻게 알았어?

D.S가 신기하다는 듯 감탄했다. 이연이 혼잣말을 하는 척 대꾸했다.

“역시 뭐든 한번 경험해 보는 게 중요하다니까…….”

“네?”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의아하게 돌아보는 세은에게 대수롭지 않게 웃어 보이자 별다른 의심은 하지 않는 듯했다. 뭔 소리야, 하고 투덜거리는 D.S에게도 더 이상의 대답은 하지 않았다.

이연 역시 경험이 있었다. 아무것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기로 약속을 했던 적이.

‘하지만…….’

이연이 남몰래 미간을 조금 찌푸렸다. 세은의 이야기에는 약간씩 위화감이 느껴지는 부분이 존재했다. 정확히 꼬집어서 말할 수는 없지만, 이상하게…….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미래가 지하에 갇혀 있다는 이야기군요.]

“그렇……죠.”

세은은 순순히 대답을 해 주면서도 내가 왜 이 로봇과 대화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 맥락을 읽을 능력이 있었다면 칠칠은 로봇이 아니라 인간일 것이다. 비언어적 사인을 알아채는 데에 한계가 있는 기계는 꿋꿋이 제 호기심을 채우는 것에 주력했지만.

[지하에 침대가 있습니까?]

너무 호기심 천국이었다.

“……네?”

[미래가 잘 시간이 훨씬 넘었습니다.]

갈 곳 잃은 세은의 시선이 마구 흔들리다가 이연에게 안착했다.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에 이연이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그러니까 미래를 발견하면 재우셔야 합니다.]

“……고장 났나?”

이연이 괜히 혼잣말인 척 통신기에 들리도록 중얼거리자 즉각 반발이 돌아왔다.

- 멀쩡해. 지금 중요한 말 하고 있잖아.

[저는 멀쩡합니다.]

한 사람과 한 기계의 목소리가 합창처럼 겹쳐졌다. 그러나 별로 믿기지는 않았다. D.S도 나무에서 떨어지는 일이 있구나. 이연은 그녀도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미래가 지금 위험하다니까요. 자는 시간 지키는 게 문제가 아니에요.”

[동의하지 않습니다. 8살에게 숙면 시간은 아주 중요합니다. 정해진 시각에 푹 자야 쑥쑥 큽니다.]

묘하게 단호히 자른 칠칠은 별안간 이연을 말로 후드려 팼다.

[키가 부족해서 잘 모르시는 겁니까?]

아, 아니. 내 키가 뭐 어때서? 울컥한 이연이 불퉁하게 내뱉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 않나?”

[미래 친구님의 키는 약 173cm. 또래 나이대에서 평균 이하입니다.]

“…….”

키도 잴 수 있어? 쓸데없는 생활 기능이 탑재되어 있었다.

[성장기에 잠을 덜 주무신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연은 청소년기 중 무려 2년을 잠으로 날린 기구한 과거를 폭로하고 싶었으나 어른스럽게 꾹 참았다. 뭔지 모를 억울함과 분노를 삭히는 동안, 칠칠은 지치지도 않고 조잘거렸다.

[미래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고 했으니, 어서 자야 합니다. 미래를 재울 때에는 저를 들려 주세요. 미래는 저를 끌어안고 잠을 잡니다. 미래는 저를 자장자장 해 주면서 본인이 먼저 잠이 듭니다. 가끔 자장가도 불러 주는데, 노래에 재능은 없는 듯합니다.]

쓰잘데기없는 정보의 향연에 옆에서 걷고 있던 산오의 인내심 역시 바닥났다.

“시끄러워.”

살벌한 목소리에도 칠칠은 기죽지 않았다. 로봇이라 그런지 눈치가 없었다.

[노래 재능이 없다는 사실에 대답을 하시는군요. 콤플렉스입니까?]

“죽고 싶나?”

[괜찮습니다. 가창은 재능이 없어도 노력으로 어느 정도 성취가 가능한…….]

산오의 손등에서 가시가 뻗어져 나가는 것과 이연이 그 팔목을 잡은 것은 거의 동시였다. 대강 움켜쥐고 있던 인형 몸체를 다시 끌어안은 것 역시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남의 인형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면 미래 볼 면목이 없었다. 이 맹랑한 인형 가격도 무서웠고……. D.S가 기껏 빚 변제라는 파격적인 조건을 내밀었는데 새로운 빚을 만들 필요는 없지 않은가.

“야, 네가 참아. ……너 근데 진짜 노래 못해?”

살기 어린 시선의 방향이 칠칠에서 이연으로 바뀌었다. 왜 화를 내……. 찔리나. 이연이 속으로 투덜대며 칠칠을 고쳐 안았다. 신줏단지 모시듯 공손한 손길에 산오의 눈매가 한층 더 못마땅해졌다.

“저, 침대는 잘 모르겠는데…… 여기서부터 지하예요.”

두 사람과 한 기계의 투닥거림을 얼결에 관전하던 세은이 조심스레 저지했다. 칠칠의 헛소리로 조금 가벼워졌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다시 긴장감으로 물들었다.

세 사람이 도착한 곳은 복도의 막다른 길 끝의 평범한 벽이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공간엔 그들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스산하게까지 느껴지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세은의 움직임은 거침없었다. 별채 쪽으로 움직일 때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조심스레 움직이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녀가 손을 뻗어 어딘가를 꾹 누르자 공간이 열렸다. 네모난 문은 열리는 소리도 나지 않았다.

안 그래도 어두운 복도인데, 문 너머는 안에서 흘러나오는 빛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마치 지옥으로 떨어지는 구렁텅이처럼 보였다. 세은이 발을 뻗으니 내딛는 발걸음을 따라 아래에 희미한 등이 켜졌다. 간신히 발아래만 밝히는 세기였다.

다행히 고글을 쓴 이연은 빛이 있든 없든 시야가 훤했다. 익숙한 길일 세은은 물론이고 산오 역시 큰 문제는 되지 않는 듯했다. 그래도 어린아이에게는 제법 무서웠을 텐데, 미래는 용케 여길 그렇게나 드나들었구나 싶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