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킹 1위를 임시 보호 중입니다 (147)화 (147/250)

#147

“……닥쳐.”

고요한 공기 가운데에서, 악에 받친 목소리가 기어 나왔다.

“무슨 건방진 소리를……. 난 초능력자를 만든 연구자야! 누구보다 위대하고, 훌륭한 업적을 달성한, 너희 같은 놈들과는 수준이 다른……! 넌 나 없었으면 그저 그런 쓰레기로 끝났어! 은혜도 모르는 버러지 같은 게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태진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산오가 내뱉는 것은 모조리 헛소리였다. 제산오가 헌터로서 활동을 하는 사실 자체가 부정할 수 없는 연구의 증명이었다.

그러나 제 말이 진실이라고 믿는 것 같은 눈이 거슬렸다. 틀린 생각을 당당하게 내보이는 무지함이 불쾌했다. 그 생각이 태진의 분노를 부추겼다. 감히, 감히. 감히 다른 누구도 아닌 네가……!

그의 비명을 끊은 건 작은 웃음소리였다.

“너.”

산오가 희미한 비웃음을 띠고 태진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재미있다는 얼굴이었다.

“사실은 네가 나비가 되고 싶었군.”

노성이 뚝 멈추었다. 산오를 무시무시하게 노려보는 눈동자는 어느샌가 핏발이 서 있었다.

“그런데 탈화할 자신이 없었던 거야.”

이연이 놀란 얼굴로 태진을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뺨에 달라붙는 시선이 역겨웠다. 태진이 악귀처럼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실격자가 따로 있었어.”

비웃음을 지우지 않은 산오가 중얼거리자, 태진이 분을 이기지 못하고 달려들었다.

“이 새끼가……!”

날것의 감정을 얼굴 가득 드러낸 남자가 산오를 향해 돌진했다. 단단하게 쥐어진 주먹에 추잡한 심리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그러나 산오는 평범한 성인 남자가 감히 대적하기엔 너무나 강한 상대였다. 이제 와서 봐줄 리가 만무했다. 태진이 패대기쳐지는 것은 몇 초 걸리지도 않았다.

마구잡이로 달려드는 몸은 단번에 날아갔다. 바닥과 살가죽이 부딪히는 강한 타격음이 내부를 울렸다. 이연이 저도 모르게 눈가를 찌푸렸다.

몇 번 꿈틀거리던 신체는 곧 축 늘어졌다. 그 몸뚱어리를 쇠밧줄이 칭칭 감았다. 허무할 정도로 간단한 마무리였다.

“죽일 거야?”

그 모습을 한동안 가만히 바라보던 이연이 물었다. 산오의 시선이 이연에게로 곧장 향했다.

“글쎄.”

긴 시간 동안 산오는 태진을 찾아 헤매며, 그를 만나면 바로 죽일 거라고 다짐했다. 죽일 이유는 많았다. 죽이지 않을 이유를 찾기가 오히려 어려웠다. 연구소가 무너지고 살아온 나날 대부분이 그를 향한 살의와 함께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이유를 생각하지도 않았다. 해가 지면 달이 뜨는 것처럼 너무나 당연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러지 않기로 결심한 것은.

“……왜.”

빤한 시선에 이연이 머쓱하게 볼을 긁적였다. 조금 전 산오의 모습이 도무지 잊히지가 않았다.

그간 그토록 부정하던 감정은 회피할 수 없는 형태로 이연에게 닿았다. 홀로 찬란히 빛나는 태양에게 끌리는 건 본능에 가까웠다.

신념으로 빛나는 얼굴은 반짝반짝 빛이 났다. 스스로 인생을 쌓아 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광휘였다. 올곧은 자세와 단호한 목소리. 그런 것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제산오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불가능한 명제였던 셈이다.

“얼굴이 창백한데.”

산오가 별안간 팔을 뻗어 이연의 이마를 쓸었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흠칫 놀란 이연이 눈을 크게 뜨며 몸을 움츠렸다.

“뭐, 뭐가? 내가?”

얼간이 같은 대답에 산오가 눈썹을 삐딱하게 들어 올렸다. 또 웬 지랄인가 싶은 기색이 역력한 얼굴을 미처 확인하지도 못한 채 이연이 횡설수설했다.

“아, 이거…… 아까 삼촌이랑 싸워서 그런가 봐. 삼촌이 내 기력을 쓴 초능력 팔찌를 가지고 있더라고. 그래서 그거 상대하는데, 삼촌이 미래를 인질로 잡아서. 미래를 일단 구해야 되니까 좀 속아 줬어. 칠칠 씨가 갑자기 나 옷 잡아당겨서 내가 실험대 앉을 때 칠칠 씨를 바닥에 슬쩍…….”

“실험대?”

수많은 헛소리 사이에서 단번에 핵심을 짚은 산오가 미간을 찌푸렸다.

“실험대에 올라갔나?”

“어? 어, 아니. 그게 올라가긴 했는데 뭐, 걱정할 만한 건 아니고. 그냥 기력을 좀 주고 시간을 벌려고.”

“제 발로 실험대에 올라갔다고?”

삽시간에 목소리가 사나워졌다. 조금 전 태진을 상대할 때보다 훨씬 화가 난 얼굴로 살벌하게 읊조렸다.

“머리털이 그 꼴이 됐는데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어?”

“그건……. 그래도 그게 제일 최선이어서.”

당시에는 세미가 미리 수를 써 둔 줄 몰랐으니 미래를 최대한 빨리 찾아서 구출하는 게 우선 사항이었다. 이연이 태진의 주의를 끌어야 칠칠이 움직일 수 있을 거 아닌가. 무엇보다 태진에게 효과적으로 먹히는 방법이었고, 결과적으로 잘됐고……. 그런 소리를 웅얼거리는 머리통을 산오가 짜증스럽게 노려보았다. 잇새로 낮게 으르렁거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초록색 눈동자가 확 타올랐다.

쿵!

“헉.”

별안간 흔들리는 지축에 이연이 변명을 멈추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약한 지진은 곧 멈추었지만, 상황을 환기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었다. 시야 한구석에 숨을 가쁘게 들이마시고 있는 작은 몸이 보였다.

아직 말할 것이 남아 있는 사람이 하나 더 있었다.

“이세미 씨.”

가만히 부르는 말에 세미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똑똑히 들리고도 남았을 터였다. 세미의 어깨에 박힌 가시는 아직도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연이 산오의 팔을 툭툭 치며 눈짓했다. 산오가 고집부리는 아이처럼 뚱하게 고개를 돌렸다.

“싫어.”

“어차피 더 이상 못 싸우는 사람이야. 계속 저렇게 방치해 두면 위험하다고.”

“…….”

“나 저 사람한테 할 말 있어서 그래. 저 상태로는 좀 그렇잖아.”

부상을 입은 세미가 산오와 이연을 대적하며 태진을 데리고 이곳을 나가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세미 역시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성인군자 납셨군.”

산오는 빈정거리면서도 끝내는 이연의 말을 들어주었다. 이전에 이연이 칼에 찔렸을 때처럼 가시가 물처럼 흘러 상처를 막았다.

이연이 다가가자, 등을 돌리고 모로 누워 있는 세미에게서 사나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가.”

물론 그 말을 들었으면 이연이 아니다. 꿋꿋하게 걸어온 이연은 세미의 옆에 쭈그려 앉았다.

“미래는 탈출했어요.”

“…….”

“저희가 안 왔으면 어쩔 작정이었어요?”

이유가 어떻게 됐든 세미는 태진의 눈을 속이고 미래를 보호했다. 그러나 잠시간은 실험을 늦출 수 있을지 몰라도, 계속 그럴 수는 없었다. 그 물음에 세미는 잠시 침묵하는 듯하더니, 퉁명스레 답했다.

“몰라.”

미래를 만났을 때부터 세미의 행동은 늘 이런 식으로 돌아갔다.

“그런 거 생각 안 했어.”

제가 하고 있는데도 왜 이러고 있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맹랑한 꼬맹이를 당장 쫓아내야 한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늘 이성이 졌다. 미래는 태진과도, 세은과도 달랐다. 논리라곤 없고, 고집도 세고, 말도 안 듣고.

그런데 짜증을 내면서도 어느새 미래의 옆에 앉아 있는 자신이 있었다.

그냥 그 시간이 못 견딜 만큼은 아니었다. 그뿐이었다.

세은은 꽤 눈치가 좋았다. 같은 방을 쓰는 자매는 간혹 잠들기 전 수다를 떨곤 했는데, 그녀는 귀신같이 하나뿐인 혈육의 분위기가 조금 달라졌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요즘 얼굴이 폈다?’

연구에 재능이 있어 태진과 연구실을 함께 쓰게 된 세미와 달리, 세은은 그런 곳에 전혀 흥미가 없었다. 관심이 없으니 지하에 잘 내려오지도 않았다. 그래서 미래가 그토록 뻔질나게 드나드는데도 세은과 한 번도 마주치지 못했다.

장난스러운 물음에 세미가 픽 웃었다. 쌍둥이는 원래 비밀이 없었다. 두 사람의 세상에는 두 사람뿐이었다. 비록 태진이라는 아버지가 갑자기 생겨나긴 했지만, 근본적인 명제가 바뀌지는 않았다.

‘연구실에 꼬마애가 놀러 오는 거 알아?’

그러나 세미는 이 순간을 두고두고 후회하게 된다.

‘꼬마애? 별채의?’

미래의 존재는 외부인인 쌍둥이가 알 정도로 유명했다. 비초능력자 엄마에게서 떨어져 별채에 살고 있는 어린아이. 자극적이기 짝이 없는 이야기였다. 놀라워하는 세은의 물음에 세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얼굴에는 은밀한 비밀을 혼자 아는 것 같은 우월감 역시 얕게 깔려 있었다.

그 후로 세미는 종종 세은에게 미래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미래에게 한 이야기, 미래가 한 이야기, 두 사람이 나눈 대화……. 여러 날이 지나자, 세은은 미래와 직접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미래에 대해 잘 알게 되었다.

그러다가 세미가 잡혔고.

그동안 세은이 미래와 접촉했다.

탈출해서 연구실에 돌아와 보니 이미 모든 것이 진행되는 중이었다. 태진은 세미에게 저를 돕지 않겠냐는 제안을 건넸다. 그가 세은에게 한 것과 비슷한 실험을 준비한다는 것은 진작에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정확히 누구를 대상으로 하는지는 몰랐다.

태진이 알려 준 실험체는 세미도 아주 잘 아는 꼬맹이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실험을 방해할 생각은 없었다. 세미에게 있어 태진은 스승이었다. 그는 비윤리적인 부분은 있었지만 세미 역시 준법 시민은 아니었으므로 별 상관 없었다. 대단한 사람이었고, 존경할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실험 역시 필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세미는 이상하게 쿵쾅대는 심장 소리를 감추며 간신히 승낙했고, 태진과 함께 실험 준비를 하게 되었다.

‘괜찮아?’

그래서 그렇게 묻는 세은에게 간단하게 대꾸할 수 있었다.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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