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
산오는 이연에게서 떨어지지 않을 거라고 했지만, 그게 꼭 현재와 같은 형태라고는 장담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같은 도시에 살고 있으니 원래 자리로 돌아가도 만나려면 언제든지 만날 수 있지 않은가.
임시 동거도 어디까지나 이연의 집에 산오가 슬쩍 끼어들어 와 살고 있는 형식이었고, 그 사실을 증명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집 안에 산오의 짐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말 그대로 맨몸으로 나가면 그걸로 끝이었다.
산오가 당장 나가길 바라는 건 당연히 아니었다. ……물론 언젠가는 가야겠지만, 좋아하는 사람과 떨어지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연 역시 산오와 최대한 오래 같이 다니고 싶었다. 그래서 거기에 대해 물어보면 산오가 기다렸다는 듯 나가 버릴 것 같아서, 이연은 감히 말을 꺼내지 못했다.
좋아하지만 고백하기는 싫고, 친구로 계속 지내면서 동거는 오래 하면 좋겠다니. 혜강이 들었으면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며 기함을 했을 생각이다. 안다, 이기적인 거. 그래도 진짜 그런 걸 어떡해. 이연이 힘없이 눈썹만 늘어트렸다.
그런 이유로, 산오의 거취에 관해서는 눈치만 보며 차일피일 화제를 미루는 중이었다. 이게 언제까지 먹힐지는 모르겠지만……. 산오가 문득 이연의 집에 계속 얹혀사는 형태가 부자연스럽다는 사실을 눈치채면 끝일 혼자만의 싸움이다. 이연이 한숨을 내쉬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덜컹. 옥상 문을 여는 혜강을 쫓아 걸으니 익숙하고 소박한 사무실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손님이 있다고 했는데.
산오가 말한 손님은 이연도 혜강도 잘 아는 인물이었다.
“재경 씨?”
뭔지도 모를 비닐 봉투를 테이블에 잔뜩 쌓아 두고 멀뚱히 앉아 있던 재경이 환한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이연 씨, 어서 와! 왜 이렇게 늦게 왔어?”
가볍게 타박한 재경의 얼굴은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산오와 둘이 있던 시간이 어지간히 숨이 막혔던 모양이다. 이해는 했다. 산오는 재경에게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숨길 정도로 예의 바른 성격이 아니니까……. 모르긴 몰라도 살얼음판 분위기쯤은 됐을 터였다.
재경은 악몽코끼리 사건 이후 이연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소소한 물음—주로 뭉치와 관련된—이나 시시콜콜한 잡담을 이따금 보내던 이전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었다. 요즘 많이 바쁜가? 이연은 단순하게 생각하고 넘겼으나.
‘연락하기 쪽팔린 거 아냐?’
아무래도 다른 사람이 보기에 그런 이유는 아닌 것 같았다. 혜강의 말에 이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쪽팔려?’
‘아무래도 호텔에서 일이 컸었잖아. 형은 괜히 비 오는 날 나가서 다치기까지 했고.’
‘아니, 뭐. 다친 건 우연한 사고였지……. 재경 씨도 그럴 생각까지는 없었을걸?’
‘그래도. 보통 계속 같이 지내고 싶은 사람을 그런 식으로 이용할 생각은 안 하지. 안 그래?’
‘……그거야 그렇지.’
진짜 그래서인가? 이연이 고개를 갸웃하자 혜강이 대수롭지 않게 덧붙였다.
‘그쪽에서 연락 끊은 거면 신경 쓰지 마. 원래 변이종이 우선인 사람이잖아. 형이 계속 연락해 봤자 뭐 좋은 일이 있겠어?’
그 말에 옆에 있던 산오까지 당연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혜강의 말이 틀린 건 아니지만……. 이연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조금 찝찝해 휴대폰을 잠시 만지작거리다 말았다.
그리고 며칠 후, 사무실 건물 옆 골목에 숨어 있던 재경을 만났다.
‘……재경 씨? 여긴 어쩐 일이에요?’
차금의 사무실과 재경의 집은 거리가 꽤 된다. 우연히 올 만한 곳은 아닌데. 의아한 얼굴의 이연이 묻자, 재경은 한참을 우물쭈물하더니 소리치듯 말했다.
‘의, 의, 의뢰를 하러 왔어!’
‘의뢰요?’
‘그래.’
굉장히 비장한 얼굴이길래 엄청난 의뢰를 맡기려고 온 줄 알았는데, 이야기를 들어 보니 그건 아니었다. 며칠 출장을 가게 되었으니 하루에 한 번씩 제집에 들러 변이종들이 잘 있는지 봐 달라는, 간단하고 쉬운 의뢰였다.
‘우리 집에 변이종이 있다는 건 이연 씨밖에 모르니까, 이연 씨한테 의뢰를 맡기면 좋을 것 같아서. 의, 의뢰비는 제대로 낼게! 이번 일 보수가 좋아서 다 낼 수 있어.’
물어보지도 않은 것까지 구구절절 말하는 재경의 모습이 이상하게 좀 절박해 보여서, 이연은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 일로 산오에게 수전노도 울고 가겠다며 한참 구박을 받았다.
그 후로 재경은 의뢰란 이름의 자질구레한 심부름을 가지고 몇 번 정도 더 찾아왔다. 어려운 일들도 아니었고 굳이 굴러 들어오는 의뢰를 내칠 필요도 느끼지 못해서, 이연은 그때마다 승낙했다. 그러면서 이상하게 어색하던 분위기도 풀렸고, 재경 역시 시간이 지날수록 서서히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혜강은 처음에는 흠, 하고 재경을 겁주듯 이리저리 훑어보았으나 곧 이연처럼 무던하게 받아들였다. 산오는 이 흐름에 매우 마뜩잖은 눈치였지만 재경을 오지게 꼬나볼 뿐 따로 뭐라 하지는 않았다. 이연이 보기에 재경과 산오의 친교는 이번 생에는 요원할 것 같았으므로, 따로 관계 개선을 추진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개선은 무슨, 재경이 산오의 정체를 알게 되었을 때 기절이나 안 하면 다행이다.
아무튼 그런 맥락으로 봤을 때, 오늘도 심부름시킬 게 있어 온 모양이었다. 퇴근 시간 다 됐는데 왜 이렇게 늦게 왔대……. 이연이 재경에게 다가서며 물었다.
“웬일이에요? 이건 다 뭐고?”
재경이 들고 온 것 같은 비닐봉지를 뒤적이는데 맛있는 냄새가 났다. 눈을 휘둥그레 뜨며 살펴보니 온갖 야식들이 담겨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다른 봉지에는 맥주 캔이 한 더미 쌓여 있었다.
파티라도 하나? 의아하게 그를 돌아보자, 재경은 의기양양한 얼굴로 기쁜 소식을 전달했다.
“나 취직했어!”
재경은 클럽 연구소에서 해고당한 후, 자잘한 알바만 근근이 하며 생활하고 있었다. 본인의 전공을 살려 일하는 것이니만큼 건당 보수가 적은 편은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불법에 걸치기 쉬운 특성상 안정적인 생활을 하기엔 무리가 있는 수입이긴 했다. 해서 그는 구직 활동도 병행하고 있었는데, 마침 우연히 원하는 자리가 하나 났다는 것이다.
“뭐 하는 곳인데요? 또 불법적인 데는 아니죠?”
“아냐, 아냐! 정부 인증도 받았다고.”
이전 그의 직장과 알바의 전적이 있으니 섣불리 축하할 수는 없었다. 이연은 바로 직장 검증에 들어갔고, 혜강의 조력을 얻어 재경의 새 직장이 합법적이고 멀쩡한 곳이라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었다.
재경이 새로 일하게 된 곳은 연구소였다. 차금처럼 소속 인원이 겨우 셋 정도밖에 안 된다는 소형이었는데, 다양한 변이종의 정보를 얻고 환경을 연구하는 것이 주목적이라고 했다.
그렇게 희귀하다는 변이종 생태 연구소인 것이다.
“와, 재경 씨가 원하던 곳 그 자체 아니에요?”
간단한 설명만 들어도 재경이 좋아할 만한 곳이라서, 이연은 웃으며 잘됐다고 어깨를 두드렸다. 진심 어린 축하에 재경이 뿌듯하게 웃었다.
“그래서 기념으로 먹을 걸 좀 사 왔어. 내가 이연 씨한테 그동안 이것저것 신세 졌잖아. 감사 표시도 할 겸…….”
“참나. 오늘 저희 임무 있었으면 어쩌려고 이렇게 무작정 준비해서 온 거예요?”
“어? 그러게. 그 생각을 못 했네. 다음에 올까?”
맹하게 대답하는 얼굴이 정말로 허를 찔린 어조라서, 이연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재경은 가끔 이런 식으로 사람과의 교류가 서툰 티를 내곤 했다. 타인의 입장을 잘 생각하지 못한다고 해야 할까, 모두가 각자의 하루를 살아간다는 사실에 대해 인지를 잘 못한다고 해야 할까…….
뭐, 비단 재경만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재경 정도면 양반이기도 했고.
“괜찮아요. 마침 할 일 없었거든요.”
산오도 곧 올 것 같으니, 맛있는 걸 먹으면서 수다 좀 떨다가 느긋하게 집에 들어가면 될 것 같았다. 이연이 선뜻 대답하며 포장을 풀기 시작하자, 혜강 역시 슬그머니 앉아서 봉지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당장 마실 맥주만 몇 캔 꺼내 놓고 나머지는 냉장고에 넣어 두고, 얼린 맥주잔까지 주섬주섬 챙겨 오는 것에서 진심이 드러났다.
“그래? 다행이다. 이거 들고 오느라 팔 떨어지는 줄 알았거든.”
“그러게요. 내일 근육통 조심하세요.”
호들갑 떠는 재경과 대화를 나누며 소파 테이블에 음식을 세팅했다. 재경이 사 온 것은 다양했다. 치킨, 피자, 곱창, 족발……. 서둘러서 왔는지 사무실에서 그들을 기다린 시간을 감안해도 모든 음식에 따끈따끈한 온기가 느껴졌다. 거기에 시원한 맥주? 이건 끝났지…….
마침 퇴근 시간이었으니 거리낄 것도 없었다. 그렇게 그들은 해가 뉘엿뉘엿 지는 저녁, 사무실에서 재경의 취업 축하 파티를 벌이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