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
*
한편, 건물 밖. 혜강과 산오는 들어간 이연과 재경을 기다리며 멀뚱히 서 있었다.
“야밤에 즉석으로 움직이는 것치고는 괜찮죠?”
침묵을 깬 것은 혜강이었다. 산오가 흘끗 그를 바라보았다. 심드렁한 얼굴은 그다지 기분 나쁘지 않아 보였다.
“빙빙 돌리지 말고 할 말 해.”
그러나 딱히 좋아 보이지도 않았다. 서늘한 목소리에 혜강이 어깨를 으쓱였다.
“제가 뭘요.”
“굳이 지목한 이유가 있겠지.”
산오와 조가 되기를 자청한 혜강은 어느 모로 보나 꿍꿍이가 있는 얼굴이었다. 일부러 거부하지 않았던 것은 혜강이 이연에 관련되면 평소보다 적극적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지금 이러고 있는 것도 정이연에 관련된 이야기일 터다.
“뭐, 그냥…….”
혜강은 굳이 발뺌할 마음도 없는지, 선선히 속마음을 터놓았다.
“제대로 말 안 하면 몰라요.”
뜬금없는 말에 산오는 대답 없이 물끄러미 혜강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아마 이연이 형이라면 평생 가도 모를걸요.”
이연은 어떤 때든 손을 내밀면 그걸 잡아 주는 사람이었다. 한껏 투덜대고 구박해도 결국은 망설임 없이 팔을 뻗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 반대편에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다.
손이 잡혔을 때 어떤 마음일지, 끌어당겨지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를 것이다. 저울의 균형은 어마어마할 정도로 차이가 나서 오히려 드러나지 않았다.
그게 이제까지는 상관없었지만.
“그런데 알면 좋을 것 같아서요.”
혜강은 솔직히 산오에게 이연이 많이 아깝다고 생각했으나, 본인이 좋아한다니 어쩔 수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한번 씐 콩깍지는 옥황상제가 와도 못 벗긴다는데…….
아무튼 그는 이연을 좋아했기 때문에, 이 서투른 남자가 행복했으면 바랐다. 지레 겁먹고 주눅 들지 않길 바랐다.
반대편에서 끌어 올려진 사람으로서 주는 약간의 도움이라고나 할까.
“과하게 신경을 쓰는군.”
사나운 목소리가 혜강을 향해 내리꽂혔다. 눈동자에 스민 적대에 혜강이 심드렁하게 마주 보았다.
“그런 신경이면 이런 말을 해 주겠어요?”
“…….”
“제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이연이 형 때문이에요. 산오 형 때문이 아니라.”
그 말을 끝으로 혜강은 고개를 돌렸다. 침묵이 이어졌다.
“……늦는데.”
정적 끝에 나온 것은 무뚝뚝한 한마디였다. 혜강은 화제를 돌리지 말라고 지적하는 대신 가볍게 고개를 까딱였다. 참견하는 것도 정도가 있다.
“그러게요. 건물이 어두워서 오래 걸리나?”
“중간에 잘렸던 그 괴담.”
예상치 못한 대답이 따라붙자 혜강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산오를 바라보았다. 산오는 언제나처럼 무덤덤한 얼굴이었다.
“네?”
“그 직원은 어떻게 됐지?”
“아, 그거.”
혜강이 일부러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목소리를 깔았다.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거기서 이상한 검은 물이 새어 나오고 있어서 비명을 지르면서 도망쳤대요. 그 후로는 그냥 사직서 내고 다시는 얼씬도 하지 않았고요.”
사무실에서 그랬듯이, 산오는 무서워하는 시늉도 하지 않았다. 돌에다 대고 이야기하는 기분에 김이 샌 혜강이 다시 평소의 심드렁한 얼굴로 돌아와 마무리했다.
“이런 것도 거짓말로 꾸며 내는 사람이 많으니까요.”
여전히 어둡고 낡은 건물을 흘끗거린 혜강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여기도 그런 거겠죠.”
*
“……뭐야?”
재경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시선은 소리가 들리는 위로 고정한 채였다. 이연이 긴장된 얼굴로 재경의 앞을 막아섰다. 기이하게 긴 계단과 이상한 소리. 어디로 보나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진짜 귀신인가? 하지만 그런 게 있을 리가…….
찰박.
발끝에 뭐가 차이는 것을 느낀 것은 찰나였다. 흠칫 놀라며 재경을 데리고 뒤로 물러선 이연이 바닥을 확인했다. 휴대폰 불빛이 혼란하게 흔들리다 아래를 비췄다.
꾸덕한 검은 액체가 계단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건 물이라기엔 지나치게 끈적했다. 점성이 있는 액체는 스멀스멀 기어 나와 바닥을 그림자 색으로 물들였다. 순식간에 서 있을 공간이 줄어들었다.
“으, 으악!”
뒤늦게 재경이 비명을 질렀다. 이연이 재빨리 재경의 등을 떠밀었다.
“내려가요, 얼른!”
액체의 정체는 몰랐지만, 척 봐도 닿으면 큰일이 날 것 같다는 것 정도는 추측 가능했다. 우당탕! 요란한 발걸음 소리가 좁은 공간 내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이연 역시 재경을 따라 발을 재게 놀렸다.
그런데 아무리 가도 계단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이연 씨, 언제까지 가야 되는 거야? 어떡해?”
재경은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뛴 지 1분은 족히 넘은 것 같은데, 고작해야 50개도 안 될 한 층 계단이 끝나질 않았다. 가는 내내 중간중간 뒤를 비춰 보자 액체는 계속 그들을 따라 내려오고 있었다. 이미 액체로 뒤덮인 위 계단은 각진 모서리가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급격한 운동으로 재경의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이연도 체력이 없어 슬슬 벅차다 느끼긴 했지만, 하루에 천 걸음도 걸을까 말까 하는 연구자와는 비교도 안 됐다.
가련하게 헐떡이는 재경의 등을 이연이 초조하게 바라보았다. 조금 더 뛴다고 계단이 끝난다는 보장도, 출구가 나온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럴 바에야…….
“재경 씨, 손잡이에 올라타요!”
이연의 커다란 외침에 재경이 버벅거리며 다가가 좁은 계단 손잡이에 올라타기 위해 버둥거렸다. 이연이 등을 밀어 주며 안정적으로 붙들 수 있게 도왔다. 다행히 계단 손잡이는 윗부분이 넓적해 중심만 잘 잡으면 얼추 버티는 것이 가능했다.
재경이 제대로 올라간 것을 확인한 이연 역시 난간에 올라탔다. 경사가 기울어진 손잡이를 단단히 쥐고 걸터앉은 이연이 휴대폰을 들어 바닥을 다시 비췄다. 방금까지 그들이 서 있던 자리를 액체가 덮고 있었다. 아래에서 기분 나쁘게 꿀렁이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그대로 저 정체 모를 것에 휩쓸렸을 터였다. 등을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저게 뭘까요?”
“몰라아…….”
재경은 이미 혼이 나간 것 같았다. 울먹이는 목소리에 이연은 재경이 진정하길 기다리며 휴대폰 화면을 열었다. 혜강에게 전화를 걸자 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안내 음성만 흘러나왔다. 찌푸려진 얼굴로 대기 화면을 바라보니 서비스 지역이 아니라는 메시지가 그를 반기고 있었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전화도 안 되네요. 통신이 막힌 건가?”
담력 체험 왔다가 정말로 공포 체험을 하게 되다니. 생각도 못 한 상황에 헛웃음이 나왔다.
난간을 구명줄처럼 쥐고 덜덜 떠는 재경에게 이성적인 판단을 바라기는 무리였다. 이연은 침착하게 주변을 살폈다. 휴대폰 손전등으로 이리저리 비추자, 일견 평범한 빌딩 계단으로 보였지만 위아래의 끝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바닥은 정체불명의 액체가 가득 채웠고…….
그렇다고 난간에 언제까지고 매달려 있을 수도 없었다. 이연이 고개를 들어 천장 쪽을 바라보았다. 워낙 어두워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래와 상황이 비슷한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남은 곳은 하나뿐이다.
“재경 씨. 손잡이 꼭 잡고 있어요. 벽을 부술게요.”
“뭐? 그래도 되는 거야?”
“여기 평생 있을 순 없잖아요. 귀 막고 있어요.”
이연이 아슬아슬하게 몸을 세워 난간 위에 두 발로 섰다. 반동이 좀 있겠지만, 다행히 지그재그형 계단이라 위 계단이 지지대가 되어 주었다. 눈앞에 하얀 모래가 길쭉하게 모였다. 곧 둥근 원통형 기계가 손에 쥐어졌다. 철컥. 방아쇠를 당기는 소리가 경쾌했다.
콰아앙!
곧이어 우레와 같은 폭발음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이연은 제 역할을 다한 무기를 없애는 것과 동시에 두 사람을 충분히 감쌀 만한 방패를 만들어 냈다. 계단의 옆 벽이 박살 나며 파편이 마구잡이로 튀었다.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천둥처럼 컸다.
“뭐, 뭐야? 어떻게 한 거야?”
재경이 뒤늦게 귀에서 손을 떼고 어리벙벙하게 물었다. 워낙 어두운 데다가 눈앞에 철 방패까지 있으니 그의 시야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겠지만,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고 있으니 의아하긴 할 터였다.
“부쉈다니까요. 괜찮아요?”
“이연 씨 때문에 놀라서 지금 무서운 건 다 날아갔어…….”
다행히 조금 전보다 정신이 돌아온 것 같았다. 의도한 건 아니어도 잘됐다. 이연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철 방패를 없앴다. 단단한 보호막은 곧 하얀 모래로 다시 변해 부서지듯 사라졌다.
그 앞으로 흙먼지가 풀풀 피어오르고 있는 박살 현장이 보였다.
커다랗게 뚫린 구멍에서는 아직 부스러기가 뚝뚝 떨어졌다. 계단에 흐르던 검은 액체가 얼마쯤 구멍 안으로 타고 들어갔지만, 계단처럼 바닥을 전부 채울 기세로 흐르지는 않았다.
구멍 너머에는 복도가 있었다.
평범한 빌딩 복도였다. 복도 끝에 있는 창문 너머로 새어 들어온 달빛에 의지한 시야로는 그렇게 보였다. 벽에 붙여 놓은 작은 사무실의 간판들과 화장실 표시, 불이 꺼져 있는 채로 천장에 달려 있는 형광등은 어디로 보나 한국에 평범하게 있을 법한 것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