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킹 1위를 임시 보호 중입니다 (161)화 (161/250)

#161

기습처럼 떠오른 잔상에 정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목구멍이 뜨거운 것으로 가득 찼다.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새어 나오고 붉어진 눈가가 흠뻑 젖는 건 순식간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주먹을 아무리 힘껏 쥐어도 멈춰지지가 않았다.

단번에 무너져 웅크리는 작은 등을 변호사는 안절부절못하며 쳐다보다가, 아주 조심스레 고개를 돌려 모른 척해 주었다.

아버지가 초호시에 사 놓은 집은 이전 집과 비슷한 크기였지만, 구조가 전혀 달라서 낯설었다. 아무런 가구도 사지 않아 휑한 공간이 첫 입주자인 정연을 맞이했다. 삐리릭. 도어 록이 잠기는 소리가 멎자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제 정말 혼자였다.

현관에 짐을 내버려 두고 터덜터덜 걸어간 정연은 아무것도 없는 널찍한 거실 바닥에 주저앉았다. 가만히 쪼그려 있으니 익숙해진 그리움이 파도처럼 몰려들었다. 심장이 쪼그라드는 듯 아프고, 목 아래가 뜨거웠다. 깨어난 후 병원에서 재활하는 내내 느껴 온 감정이었다.

정연은 무릎을 가슴께로 모아 끌어안았다. 한껏 몸을 웅크려도 허전함이 가시지 않았다. 환하던 밖이 서서히 어두워지고 적공의 희미한 붉은 빛만 창으로 들어올 정도로 시간이 흐를 때까지, 계속 그대로 앉아 있어도 마음은 도무지 가벼워질 줄을 몰랐다.

이름을 바꾸고 부모님과의 연결 고리를 떼어 냈지만 당연하게도, 정연이라는 인간은 바뀌지 않았다. 상실감이 날이 갈수록 커져 정연의 마음속 구멍을 점점 키웠다. 영원히 채워지지 않을 것 같았다.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끔찍했다.

보고 싶었다.

내내 무릎에 얼굴을 묻고 있던 정연이 문득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아, 제발.’

그러지 마. 이연은 정연을 향해 말했지만, 정연에게는 닿지 않았다.

하얀 모래가 그의 앞으로 모여들었다. 예쁘게 빛나는 알갱이가 점점 커졌다. 약한 바람이 불어 정연의 앞머리가 조금 날렸다.

이윽고 만들어진 것은 두 사람의 형상이었다.

“…….”

정연은 가만히 손을 뻗었다. 어느새 섬세한 형태를 갖춘 가짜가 웃으며 허리를 굽혔다. 정연은 저를 안아 주는 부모님을 멍하니 보았다. 정말로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그립고 그리워 악몽으로라도 만났으면 했던 얼굴이었다.

그건 이연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마치 진짜인 것처럼 따뜻했다.

진짜 부모님이었다면 이런 취급을 받을 수 있을 리가 없는데. 자기들을 죽인 살인자가 이러는 모습을 보면 불쾌해하실 텐데. 죄책감이 쉴 틈 없이 심장을 찔렀지만 도저히 제 손으로 부모님을 없앨 생각이 들지 않았다. 거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 온기가 너무 기꺼워 손을 덜덜 떨면서도 그 품에 안겼다.

부드러운 힘이 자신을 단단히 끌어안는 순간 마음 안의 무언가가 끊어진 것 같았다.

그다음부터는 그냥,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가장 큰 불행은 정연의 능력이 너무나 강했다는 점이었다. 적당한 정도였으면 기력이 다 빨리거나 너무 자주 사라지니 새로 만들며 정신을 차렸을 텐데, 정연이 만들어 낸 가짜 부모님은 웬만한 일로는 사라지지도 않았다.

정연은 이사한 후로 밖으로 거의 나가지 않았다. 그는 말 그대로, 집 안에서도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다. 나갈 필요가 없었다. 뭐든 전부 만들어 낼 수 있으니 사람을 집에 들일 필요도 없었다. 하얀 모래는 손쉽게 3인 가족을 위한 가구와 식기, 생필품 따위를 만들어 냈다.

실로 재앙 같은 능력이었다.

정연은 졸업조차 하지 못한 중학교는 물론이고, 고등학교 진학 과정도 밟지 않았다. 부모님이 남긴 변호사는 몇 번인가 집에 찾아와 설득했지만, 정연이 내내 고개를 젓기만 하는 데에는 도리가 없었다.

정연의 시간은 열넷에 머물러 나아가지 않았다. 아빠와, 엄마와, 정연이 함께 살던 그 시절.

동화처럼 행복하던 그때.

“엄마, 아빠. 안녕히 주무셨어요.”

방금 일어나 까치집이 된 머리로 정연이 고개를 숙였다. 어김없이 정수리 위로 따뜻한 손길이 내려앉았다. 정연이 어머니를 껴안자, 어머니가 제 손을 잡고 부엌으로 이끌었다.

부엌에는 삼 인분의 식사가 놓여 있었다. 밥그릇도, 앞접시도, 수저도 모두 세 쌍씩이었다. 하얀 모래는 뭐든 3인분을 만드는 데에 더없이 익숙해졌다. 음식이 모두 소화될 때까지 실체화 능력이 유지되면 만들어 낸 밥이어도 영양분 섭취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정연은 밥을 먹는 내내 즐겁게 떠들었다. 어떤 말을 해도 부모님은 늘 웃던 얼굴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주의 깊게 경청해 주었다.

입맛대로 만들어 낸 환상은 얼마나 눈이 부신가.

이 모든 게 거짓이라는 건 알았다. 능력을 해제하면 전부 사라질 것도 알았다. 그는 이제 소꿉놀이에 불과한 장난 같은 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도 알 정도로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먼 멍청이는 점점 자라는 몸을 좁디좁은 세계에 억지로 욱여넣었다. 맞지 않는 크기에 숨이 막히는 줄도 몰랐다. 그저 몸을 최대한 웅크리고 앉아 낡게 바래고 있는 행복만 영원한 것처럼 쉼 없이 쓰다듬었다.

그건 아주 느리고 거대한 자기파괴였다.

부스러지는 감각은 아주 안온했다. 그래서 괜찮은 줄 알았다.

그러나 끊임없이 외면한 죄책감은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점점 몸집을 불렸다. 한계까지 부푼 풍선이 터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저녁을 먹고 나서 후식과 함께 TV를 보는 것은 가족의 일상 중 하나였다. 주체인 정연이 TV 프로그램에 전혀 관심이 없기 때문에 몇 분 보지 않고 끌 정도로 형식적이긴 했지만, 그래도 꼬박꼬박하는 일과였다. 오래된 기억은 그런 식으로 고집스럽게 늘려지고 있었다.

[다음 소식입니다. 초호시에 새로운 영웅이 등장했습니다.]

그 뉴스가 마침 흘러나온 것은 어쩌면 기적에 가까운 우연이었다. 아버지가 건네주는 사과를 우물거리던 정연이 저도 모르게 시선을 TV로 돌렸다.

[제산오는 광물 변형 및 운용, 동기화 능력을 가진 초능력자로, 올해 성인이 되었습니다. 제산오는 스무 살부터 할 수 있는 초능력 등급 심사에서 곧바로 무궁화 5단을 받고, 온라인 페이지에서 집계하는 비공식 랭킹에서 단숨에 1위를 차지했습니다. 보통 무궁화 5단 판정을 받아도 순위는 같은 단의 맨 아래에서부터 차근차근 올라간다는 점을 미루어 보면 굉장히 이례적인 현상으로…….]

“……제산오?”

정연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제산오. 몇 년이나 전이지만 그 이름을 잊을 리가 없었다. 연구소의 소년.

하지만 산오는 초능력이 없었는데. 동명이인인가? 아니면…….

“아빠, 들었어요? 제산, 오…….”

놀라서 덩달아 커진 목소리는 금세 쪼그라들었다. 부모님은 산오에 대해 전혀 몰랐다. 태진의 함구령 때문에 말할 수 없었고, 그 후로도 한 번도 만나지 못했으니까. 정연 혼자 신나서 이야기해 봤자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알고 있다는 얼굴이었다.

“…….”

그 모습을 본 정연은 돌처럼 굳었다. 누가 정신에 찬물을 확 끼얹은 것처럼 섬찟한 감각이 뒷머리로 날아들었다.

당연한 일이다. 지금 정연의 옆에 있는 부모님은 그가 만들어 낸 아바타였다. 생전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똑같은 얼굴로 웃지만 진짜가 아니었다. 정연의 기억을 바탕으로 재창조된 가짜다.

잔인할 만큼 파괴적인 실감이었다.

‘제산오를 찾아야 해.’

문득,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흘러 들어왔다. 정연은 아주 희미하고 흐릿한 잔상 같은 사고를 용케 캐치했다. 어디서 누가 말한지도 모르는 외침을 자연스럽게 제 생각으로 받아들였다.

그러고 보니, 연구소에서 헤어진 후로 소식을 듣지 못했다. 부모님의 소식만으로 뇌가 가득 차서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꿈결 같은 기억이 슬그머니 떠올랐다. 새하얀 연구소 안에서 함께 간식을 먹으며 수다를 떨던…….

그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더라?

‘여기서 나가야 돼.’

강한 어조가 머리통 안에서 메아리쳤다. 정연이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며 관자놀이를 짚었다. 그제야 미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뭐지? 대체 누가, 왜 이런 말을……. 혼란에 빠진 정신이 갈팡질팡 흔들렸다. 분명히 제 몸인데 낯선 이가 들어차 있는 것 같았다. 어지러운 감각 사이로 다시 강하게 누군가 소리쳤다. 환상은 여기서 끝내. 현실을 봐.

내가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니야.

“잠깐만 혼자 떨어져도 사고를 치는군.”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강한 힘이 뒷덜미를 잡아채는 것과 동시에, 이연의 몸이 어딘가로 쑥 끌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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