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킹 1위를 임시 보호 중입니다 (165)화 (165/250)

#165

14. 고양이를 부탁해

……라고 다짐한 것이 무색하게.

“뭐 하냐?”

이연이 고개를 기울여 산오의 어깨 너머를 훔쳐보았다. 키 차이가 나는 만큼 어깨 높이도 차이가 많이 나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무언가 푸짐한 한 상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요란한 소리를 내는 밥솥과 냄비에서 새어 나오는 맛있는 냄새. 밥 당번이 산오인 날에만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입 안에 절로 침이 고였다.

입맛을 다시는 이연을 쳐다보지도 않은 산오가 싸늘하게 일갈했다.

“부엌에 짐승 데려오지 마라.”

“털도 안 떨어지는데.”

뭉치의 외형은 털가죽을 두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 포유류 같은 가죽은 아니었다. 보들하긴 하지만 집 안에 털 같은 걸 흘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 후로도 조금 더 버텨 봤지만 산오의 표정은 단호했다. 결국 이연은 품에 안은 뭉치와 함께 거실로 다시 쫓겨났다.

“빡빡하긴.”

입을 삐죽인 이연이 소파에 앉아 뭉치의 등을 슬슬 쓰다듬었다. 뭉치가 가르릉대며 이연의 품에 파고들어 팔뚝을 꾹꾹 눌러 댔다. 잠깐 뭉치를 훑는가 싶던 이연의 시선이 슬그머니 요리 중인 산오에게로 향했다.

뒤돌아선 자세인지라 이연이 보는 방향에서는 귓불과 뺨 아주 조금, 윤기가 도는 검은 머리카락, 그리고 어깨로 이어지는 목선 정도밖에 보이지 않았다. 엄밀히 따지자면 제대로 보이는 것도 없는 셈이다.

그런데도 자꾸 눈길이 갔다. 어느새 하염없이 산오가 움직이는 모습을 구경하던 이연은 문득 제 발을 무언가가 툭툭 치는 감각에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청소 경로 방해. 비키십시오.]

소파 아래로 내려 두었던 다리 한쪽을 FT-4가 툭툭 치고 있었다. D.S가 선물해 준 이 똑똑한 로봇 청소기는 인간을 피해 가지 않는 기능이 탑재되어 있었다. 어어, 하고 떨떠름한 음성과 함께 이연이 다리를 마저 올리자, FT-4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쌩하니 이연의 발이 있었던 곳을 쓸고 닦았다. 규칙적으로 작동되는 기계 동작을 멍하니 바라보던 이연이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내내 이런 꼴이다. 이상하게 정신만 차리면 산오에게 온 신경이 다 가 있었다.

아니, 뭐. 원래도 그런 경향이 없지 않아 있긴 했지만. 이연이 변명하듯 속으로 웅얼거렸으나, 아주 예전부터 산오를 줄곧 신경 쓰고 있었다는 것이 썩 개운한 핑계는 아니었다.

마음이 참 마음대로 안 됐다. 아무리 꾹꾹 눌러 접어도 무럭무럭 자라서 점점 부피를 키워 갔다. 분명히 현상 유지가 목표였는데. 비장하게 다짐해도 산오를 보다 보면 어느새 벽이 말랑해지곤 했다.

오히려 산오는 그대로인 것 같아서 더 민망했다.

그는 처음 만났을 때와 거의 달라진 게 없었다. 늘 무뚝뚝하고, 심드렁하고, 제멋대로 굴었으며, 입에서 나오는 말은 죄다 재수 없었다. 어디 학원에서 배워 왔나 싶을 정도였다.

하고많은 사람들 중에 제산오 같은 걸. 난해한 취향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번엔 숨기지도 못하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쉰 이연이 뭉치를 쓰다듬었다. 뭉치는 심란한 속도 모르고 좋다고 배를 뒤집었다.

푸짐한 저녁 식사 후 식기세척기에 그릇을 옮겨다 놓는 건 이연의 몫이었다. 여러 번 왔다 갔다 하기 귀찮아 그릇 예닐곱 개를 한 번에 쌓은 이연이 끙차, 하고 들어 올렸다. 높은 그릇 탑이 아슬아슬하게 흔들렸다. 식사를 마치고도 자리를 아직 뜨지 않은 산오가 한심하다는 듯 그 꼴을 바라보았다.

“왜 그따위로 옮기는 거지?”

“말, 시키지 말아 봐…….”

이연이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릇 탑만을 바라보며 대꾸했다. 균형이 깨지지 않도록 조심스레 내딛는 발걸음은 변이종 임무 때보다 더 신중했다. 굼벵이가 기어가는 것처럼 느린 속도였다.

쓸데없는 긴장감이 흐르는 그때, 이연의 발뒤꿈치를 무언가가 조심성 없이 툭 쳤다.

[청소 경로 방해. 비키십시오.]

“아, 안 돼. 지금은 안 돼.”

[비키십시오.]

음성의 고저 없이 똑같은 말만 반복한 FT-4가 다시 발을 툭툭 쳤다. 감히 인간 따위에게 청소를 방해받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가 돋보였다.

그릇에서 조금이라도 시선을 떼면 바로 무너져 내릴 것 같아 FT-4를 어쩌지도 못했다. 이연이 떨리는 목소리로 웅얼거리며 산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야……. 얘 좀 어떻게 해 봐.”

“뭘.”

대답과 함께 산오가 일어섰다. 진짜 도와준다고? 그냥 말만 한번 해 본 거지, 산오가 정말 움직여 줄 거라고는 기대도 안 했던 이연이 놀란 얼굴을 했다. 여전히 시선은 탑에만 꽂혀 있는 채라 그냥 그릇을 보고 놀란 사람처럼 보이긴 했지만…….

그러나 몇 걸음 만에 이연의 곁으로 다가선 산오는 FT-4를 전혀 건드리지 않았다. 그는 대신 이연이 두 손으로 소중히 받쳐 들고 있는 그릇 탑의 윗부분을 툭 건드렸다.

“묘기라도 하는 것 같군.”

“아, 아니…….”

산오의 심드렁한 손길에 따라 그릇 탑이 흔들리자 이연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알고 보니 사방 천지에 방해꾼들뿐이었다. 다행히 위험천만하게 흔들리던 그릇들은 간신히 쏟아지지 않고 다시 균형을 맞췄다.

“저런.”

산오가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 자식이. 이연은 울컥했으나 손이 묶인 상황에서는 별다른 수가 없었다.

“야, 너 이렇게 나올 거야?”

“원래는 그러지 않았던 것 같나.”

“…….”

이 녀석……. 자기 객관화가 상당히 잘 되어 있었다. 이연이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분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내가 이런 얄미운 놈을? 조금 전과는 비교가 안 되는 통한이 몰려왔다.

[비키십시오.]

발밑에서 FT-4가 지치지도 않고 경고했다. 옆에서는 산오가 심술궂은 얼굴로 그릇 탑을 툭툭 두드렸다. 미간을 구긴 이연이 눈을 두어 번 감았다 떴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이연은 탑을 위태롭게 받치고 있던 손을 그대로 놓았다.

그릇이 그대로 추락하는 것과 동시에 로봇 청소기를 발로 밀어 낸 이연이 산오의 멱살을 당겼다. 하얀 모래가 빽빽하게 모여들어 그릇을 부드럽게 감싸는 동시에 산오를 강하게 잡아챘다. 끌어당기는 대로 휘청인 산오가 균형을 잃었다. 상체가 흔들리며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이연은 마지막 배려로 바닥에 새하얀 모래를 깔아 주었다. 두텁게 쌓인 모래는 곧 푹신한 매트리스로 변했다.

의기양양한 얼굴로 멱살을 놓으려는 그때, 커다란 손이 허리를 감쌌다.

“으잉?”

멍청한 탄성을 내뱉은 이연이 순식간에 끌어당겨졌다. 미처 손 쓸 틈도 없이 균형을 잃고 중심이 앞으로 쏠렸다. 동그랗게 뜬 베이지 색 눈동자와 짓궂은 녹색 눈동자가 마주친 것은 찰나였다. 순식간에 시야가 뒤집혔다.

푸욱.

“…….”

완전히 엎어진 이연이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탄탄한 근육으로 이루어진 가슴과 배가 저를 받치고 있었다. 물론 산오의 밑에 깔린 매트리스보다야 딱딱했지만, 생각만큼 아프지는 않았다. 이연의 허리를 감싸고 있던 산오의 두 팔이 쓰러지면서 뒤통수와 등으로 올라와 흔들림을 최소화한 덕일 것이다.

뒤늦게 투둑, 하는 가벼운 소리와 함께 그릇들이 떨어졌다. 착지 위치는 전부 매트리스 위였기 때문에 깨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이건 계획대로였지만…….

뺨 아래로 천 한 장을 사이에 두고 산오의 가슴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한 박자 늦게 상체는 물론이고 허벅지나 발목까지 죄다 겹쳐져 있는 것이 의식되었다.

체온이 금세 뜨거워졌다. 후다닥 허리를 세워 앉은 이연이 마치 의도한 상황처럼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어때?”

“……재능 낭비 한번 대단하군.”

산오가 누운 채로 대꾸했다. 빈정거리는 건지 감탄하는 건지 모를 말투였다.

“능력 사용이 점점 능숙해지고 있어.”

“원래 능숙했거든?”

이연은 그렇게 투덜거렸지만, 산오의 말이 맞았다. 몇 년 동안 거의 쓰지 않던 능력은 요 근래 이런저런 일로 사용이 잦아지면서 숙련도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그 숙련도로 제산오 넘어트리기나 하고 있는 건 좀 웃기긴 했지만…….

“적어도 이제 멍청하게 맨몸으로 비탈을 구를 일은 없겠군.”

“야, 그게 언제 적 일인데…….”

이연이 머쓱한 얼굴로 대답했다. 벌써 몇 달은 된 일이었는데도 산오는 간간이 그때 이야기를 꺼내 이연을 구박하곤 했다.

“발목을 다쳤었지.”

산오의 손이 제 옆구리의 양옆을 감싸고 있는 이연의 종아리를 쥐었다. 다쳤던 상처를 확인하는 것처럼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트레이닝 바지 천 너머로 전해져 오는 체온은 따뜻했으나, 이상하게 소름이 돋았다. 길고 두꺼운 손가락들이 종아리에 달라붙어 있는 감각이 선연했다.

그제야 이연은 산오의 위에 엎어져 있는 것뿐만이 아니라 배 위에 올라타 있는 이 구도 역시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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