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킹 1위를 임시 보호 중입니다 (166)화 (166/250)

#166

“지금은 괜찮나.”

산오는 그렇게 물으며 손으로 가볍게 이연의 발목을 훑어 내렸다. 복숭아뼈를 스치는 손가락의 감촉이 이상할 정도로 생생했다. 피부에 전기라도 통하는 것처럼 찌릿한 감각이 들어, 이연이 저도 모르게 발에 힘을 주었다.

“그때 초능력으로 치료받았잖아. 지금은 별 느낌도 없어.”

그저 대답하는 제 목소리가 이상하게 들리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배는.”

“……그건, 발목보다도 훨씬 전인데…….”

이연은 멍하니 중얼거리며 산오를 바라보았다. 매트리스에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그를 올려다보는 산오의 얼굴이 선명하게 눈에 박혀 들었다. 이상하다. 왜 이러고 있지. 누워 있는 산오의 배 위에 다리를 벌리고 앉아 있는 제 자세가 묘하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사고가 다섯 박자는 느려졌다. 두근, 두근. 심장이 크게 두방망이질 쳤다.

“왜 능력에 쓸데없는 사족을 붙여 놔서.”

산오는 평소와 비슷하게 무뚝뚝한 어조였으나, 이연의 발목을 잡은 손만큼은 놓지 않았다. 따뜻한 온기가 느리게 한쪽 다리에만 퍼졌다. 불균형하게 올라가는 체온이 어색하다 못해 도망치고 싶었다.

이상하다. 오늘따라 제산오가 왜 이렇게 순순하지. 이제 내가 무겁다면서 구박하고 날 밀쳐야 하는데. 이 분위기를 깨야 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이연은 제가 먼저 일어선다는 생각은 못 했다. 산오에게 잡힌 발목이 마치 천 근짜리 족쇄라도 되는 것 같았다. 정작 이연을 붙잡은 산오의 손에는 거의 힘이 들어가 있지 않은데도.

어쩔 줄 모르고 굳어 있는 이연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산오가 문득 나머지 한 손을 들었다. 초록색 눈동자가 유독 어둡게 그림자가 져 있었다.

그건 어떤 신호 같았다.

이연의 본능이 경종을 울렸다. 여기서 가만히 있으면 안 될 것 같다는 강한 예감이 머리통을 퍽퍽 때렸다.

“그, 그때.”

다급하게까지 느껴지는 목소리에 산오가 행동을 멈추고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연은 아무렇게나 말을 뱉었다.

“취미 찾으러 다닐 때 말이야. 왜 그림 그리기 시킨 거야?”

산오는 대답이 없었다. 뜬금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게 빤했다. 그러나 직전의 산오 말을 들어서 그런지, 이연에게 당장 떠오르는 건 그런 의미 없는 물음뿐이었다. 산오가 별 반응이 없자 이연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것처럼 급하게 말을 이었다.

“이미 나인 거 알고 있었다며. 그럼 그림 실력 키울 필요가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을 거 아니야.”

산오는 무언가를 재 보는 것처럼 한참 이연을 쳐다보기만 했다. 그 시선에 되레 초조해진 이연이 마른 입술을 슬쩍 깨무는 순간, 아래에서 느릿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제 속을 내보이지 않는 것과 원하는 바가 없는 건 별개지.”

“응?”

뜬구름 잡는 것 같은 대꾸였다. 이연이 어리둥절하게 되물었다.

“보통 최악의 선택지를 내놓으면 본심을 토해 내기 마련이거든.”

가볍게 대꾸하는 산오의 얼굴은 평소와 같았다. 어딘지 위험하게 느껴졌던 조금 전의 분위기가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네게 그게 최악까지는 아니었던 모양이지.”

“……그림 실체화 괜찮지 않아?”

헌터 자격증을 얻기 위해서는 초능력 등급 심사를 받아야 했고, 그 당시 이미 지형 설정 기능이 실용되던 중이었으니 이연은 제 능력을 온전히 드러낼 수가 없었다. 능력을 어디까지 숨길까 고민하던 이연의 눈에 시의적절하게 띈 것이 펜과 종이. 임기응변으로 이루어진 심사는 용케 2단에 턱걸이로 합격할 수 있었다.

꽤 똑똑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연은 슬쩍 자기 자신을 변호했지만, 산오에게 먹히지는 않았다.

“최악이다.”

넌 엄청나게 그림을 못 그리잖아. 산오는 그렇게 덧붙이며 피식 웃었다. 어이없다는 반응에 가까운 웃음은 이상하게 천진한 소년 같아 보여서, 이연은 멍하니 그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두다다.

그런 이연의 주의를 끈 것은 뭉치였다. 두 사람이 밥 먹는 내내 거실에 얌전히 늘어져 있던 뭉치는 부엌에 느닷없이 생긴 매트리스와 그 위에 엉킨 두 사람을 뒤늦게 알아채고는 깜짝 놀라 달려왔다. 몸의 털을 전부 곤두세운 채였다.

산오와 이연을 노려보는 뭉치는 마치 적이라도 만난 것 같았다. 날카로운 으르렁 소리가 주둥이 사이에서 흘러나왔고, 기다란 꼬리도 바짝 서 있었다.

“뭉치, 이리 와. 괜찮아.”

가끔 산오에게 이런 반응을 한 적 있었기 때문에, 이연은 뭉치를 달래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 모습을 흘깃 바라본 산오가 몸을 일으켰다. 발목에 닿아 있던 손이 드디어 떨어졌다.

“그릇이나 넣어 놔라.”

무덤덤하게 말하는 산오는 방금 상황이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았던 사람처럼 보였다. 그야 산오는 저를 친구로 생각하니 그런 거겠지만……. 뒤늦게 과민 반응 했던 것 같아 조금 머쓱해진 이연이 뭉치를 부르던 것을 그만두고 슬그머니 일어나 접시를 챙겼다.

이번엔 욕심 없이 서너 개씩 들고 옮겼더니 금세 끝났다. 매트리스는 두 사람이 자리에서 벗어나는 즉시 해체되어 하얀 모래로 되돌아갔다.

정리를 마치고 나니 산오는 벌써 거실로 가 소파에 앉아 있었고, 뭉치만 식탁 아래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뭐 하는 거지? 이연이 무릎을 굽히고 쪼그려 앉아 뭉치를 살폈다.

“뭉치야, 왜 그래?”

그런데 뭉치의 반응이 좀 이상했다. 산오는 관심 없다는 의사를 풀풀 풍기며 거실로 가 버린 지 오래인데, 경계하는 기색이 전혀 수그러들지 않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몸을 낮추고 있는 뭉치가 어색해, 이연이 다시 불렀다.

“……뭉치야?”

평소라면 벌써 이연에게 들러붙어 애교를 피우고 난리가 났을 텐데, 뭉치는 요지부동이었다. 이연은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깨끗하게 정리된 부엌엔 저밖에 없었다. 심지어 FT-4까지 부엌 청소를 마치고 작은 방에 들어가 버린 참이었다. 이연이 뭉치를 달래서 데려가기 위해 무릎걸음으로 거리를 슬쩍 좁혔다.

“괜찮아, 제산오 이미 멀리 갔잖아.”

그러나 그 말에도 뭉치는 으르렁거리는 소리로만 화답했다. 왜 이러지? 이연이 고개를 갸웃하며 막 손을 뻗을 때였다.

캬악!

뭉치가 별안간 튀어 올랐다. 울음소리와 함께 부드러운 털가죽이 뒤틀렸다. 이연이 놀라서 멈칫한 순간, 뭉치는 거칠게 사지를 휘저으며 이연에게 달려들었다. 휘둥그렇게 뜬 이연의 눈동자 앞에서 뭉치의 발톱이 번쩍였다.

카앙!

막 이연의 얼굴에 발톱이 닿으려는 순간, 얇은 철판이 이연과 뭉치의 사이로 끼어들었다. 뱀처럼 꿀렁이며 뭉치를 구석에 패대기친 철판은 푸른 번개를 정통으로 얻어맞고 사라졌다. 콰앙! 타는 냄새와 함께 바닥에 까만 그을음이 생기고, 식탁은 아예 동강이 났다.

동시에 이연은 목덜미를 잡혀 뒤로 끌어당겨졌다. 쿠당탕, 하고 부서진 식탁이 무너지는 소리는 그 후였다.

“딱 봐도 공격할 것 같으면 경계를 해, 멍청아.”

어느새 온 건지 이연을 잡아당겨 품에 안은 산오가 혀를 찼다. 몇 발자국 떨어진 뭉치는 여전히 이연을 노려보고 있었지만, 바로 다시 덤벼들지는 않았다. 그러나 언제든 달려들 수 있게 몸을 한껏 낮추는 건 잊지 않았다. 노란 눈이 살벌하게 번뜩였다.

충격 그 자체인 광경이었다.

“뭉…… 우리 뭉치가 왜 이러지?”

이연의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이연이 뭉치에게 공격을 당한 것은 처음이었다. 늘 순하고 착한 우리 뭉치가…… 날 공격? 꿈이지? 얼굴이 하얘진 이연이 중얼중얼대다 급기야 버럭 소리 질렀다.

“야, 날 제산오랑 착각하는 거야? 나 정이연이야!”

“내 욕 하는 건가?”

“우리 뭉치가 나한테 발을 휘두르는 게 말이 돼?”

처음 만나자마자 다리에 얼굴을 비비며 애교를 발산하던 뭉치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놀아 줄 때마다 즐거워서 펄쩍펄쩍 뛰던 것도, 산책 나가며 신나게 뛰던 것도…….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던 뭉치와의 추억의 마지막 장면이 이연을 공격하는 거라니?

“설마 사춘기? 변이종도 그런 게 있어?”

“알 게 뭐야.”

산오가 심드렁하게 대꾸했지만 이연에게는 들리지도 않았다. 산오에게 완전히 안겨 있는 것도 평소라면 몇 박자 늦을지언정 알아채고 후다닥 물러섰을 텐데, 본인이 무슨 자세인지 아예 인식하고 있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이연은 사정없이 흔들리는 눈으로 뭉치를 빤히 바라봤다. 뭉치야, 나야. 나라고. 그러나 아무리 간절하게 쳐다봐도 뭉치는 사나운 기색을 거두지 않았다. 이연이 조금이라도 다가갈라치면—산오가 계속 붙들고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 움직이지는 못했지만— 잇새로 작게 으르렁대는 소리가 흘러나왔고, 뭉치라고 부르면 늘 쫑긋대던 귀도 고장 난 것처럼 잠잠했다.

마치 이연 같은 건 전혀 모르는 사람인 양 굴었다.

이…… 이건 말도 안 된다. 한참 얼빠진 상태로 뭉치와 대치하던 이연에게서 최후통첩 같은 엄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재경 씨 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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