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
“……상사 서랍을 뒤졌어요?”
아니, 이 인간이……. 이연의 눈이 금세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그 반응에 재경이 화들짝 놀라 마구 손사래를 쳤다.
“아니, 아니! 뒤진 게 아니라 우연히 본 거야! 진, 진짜야!”
재경의 열변으로 파악한 상황은 대강 아래와 같았다.
상사인 연구소장은 오늘 외출하면서 제 책상에 놓여 있던 서류들을 분류하는 작업을 재경에게 맡겼다. 그런데 그 서류가 박스 하나에 가득 담겨 있던지라, 비실한 근력의 재경은 억지로 들려다 손이 미끄러졌고, 묵직한 상자는 떨어지면서 소장의 책상 서랍 손잡이를 박살 냈다.
“……구라 아니에요?”
“진짜라니까. 내가 이런 걸 왜 구라를 쳐!”
난데없는 기물 파손에 대경실색한 재경이 황급히 손잡이를 다시 서랍에 맞춰 봤지만 당연하게도 한번 떨어진 손잡이가 순순히 붙을 리가 없었다. 안절부절못하며 어떻게든 수습하려고 하던 차에 서랍이 조금 열렸는데, 틈새로 보이는 서류 제목이 심상치 않았단다.
“인공 보주라는 단어가 보이면 아무래도 좀 수상하긴 하겠죠.”
“아니, 내가 본 건 「변이종 대백과 집필 계획서」였어.”
“…….”
홀린 듯 계획서를 집어 든 재경이 내용을 훑어보니 무려 800페이지가 넘는 대작업에 대한 계획이 조목조목 쓰여 있었고, 심지어 진행 중인 프로젝트였다! 저자 목록에는 소장은 물론이고, 재경이 아는 저명한 변이종 연구자들 역시 이름을 다수 올리고 있었다. 말도 안 돼, 짱이다……. 재경은 황홀한 얼굴로 계획서를 쓰다듬다가, 그 아래의 또 다른 서류를 발견했다.
그게 바로 <인공 보주 프로젝트>였다.
“이건 또 뭔가 싶어서 읽었는데, 어디서 들은 내용인 데다가 심지어 아는 변이종이 사례로 실려 있잖아. 바로 뭉치가 생각나서 관련된 내용 전부 복사해서 이연 씨한테 연락했지.”
“그렇다는 건…….”
“맞아. ……아마 소장님이 과거에 참여했던 실험인 것 같아.”
그 말을 하는 재경의 얼굴색이 조금 침울해졌다. 이번엔 틀림없는 합법 연구소라고 자랑스럽게 외치던 그의 얼굴이 스쳐 지나가서, 이연은 조금 아차 하며 일부러 밝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에이, 괜찮—”
“무슨 수를 쓰더라도 소장님을 더 예전에 알았어야 했는데…… 응? 이연 씨 뭐라고 했어?”
“……아니에요. 어묵이나 마저 건져 드세요.”
이연이 국자로 재경에게 어묵을 몰아 주었다. 먹을 걸 양보하다니, 이연 씨가 웬일이야? 재경은 해맑게 기뻐하며 어묵을 우물댔다. 이연은 묵묵히 꼬치 한 접시를 추가 주문했다.
이런저런 타박을 하긴 했어도 재경이 가져다준 것은 귀한 정보였다. 뭉치가 인공 보주 프로젝트의 실험체였다는 게 사실이라면, 인공 보주 프로젝트에 참여했을 재경의 상사를 한번 만나 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어떤 연유로 연구소에서 뭉치가 방생된 건지도 알고 싶었고…….
……잠깐만. 청호를 만난 연구자?
벼락처럼 스쳐 지나간 어떤 가정에 이연이 돌처럼 굳어 눈만 깜빡였다. 그는 마침 오늘, 청호의 목숨을 구해 줬다는 연구자를 만난 적이 있었다.
“재경…… 재경 씨, 혹시 그, 재경 씨 다니는 연구소…….”
“응?”
“재경 씨 상사, 아니, 연구소 이름이 뭐예요?”
“우리 연구소 이름? 말 안 했나?”
굳은 혀를 간신히 움직여 묻자, 재경은 의아하게 이연을 바라보더니 이내 가방을 뒤적였다.
“아, 그냥 내 명함 하나 줄게. 사실 어제 나왔거든.”
뿌듯해 보이는 얼굴로 건네는 종이를 받아 드는 손가락이 조금 떨려, 이연은 일부러 손에 힘을 주었다. 빳빳한 명함이 조금 구겨진 채로 이연의 시야에 들어왔다. 하얗고 도톰한 종이. 단정하게 적혀 있는 재경의 소속과 이름.
<공생 지향 연구소 / 연구원 당재경>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었다.
*
“정이연 씨. 많이 기다렸어?”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에 이연이 일어섰다. 은주가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들어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권 박사님.”
“이렇게 빨리 부를 줄은 몰랐는데. 왜, 위험한 변이종이라도 만났어?”
“아뇨, 그런 건 아니고…….”
이연은 은주를 바라보았다. 재경의 상사는 푸근하고 순한 인상이었지만, 웬만한 사람은 명함도 못 내밀 화려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무려 이태진의 옛 동료이자 뭉치의 인공 보주를 만든 불법 연구자라니.
그 사실을 안 순간, 이연의 직감이 그녀를 다시 만나야 한다고 강하게 속삭였다.
“청호에 대해서 더 물어볼 게 있어서요.”
두근, 두근. 불길한 긴장감이 손가락 끝까지 퍼져서, 이연은 무의식적으로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어머, 뭘까?”
엊그제 재경과 이야기를 마치고 집에 돌아간 이연은 틈만 나면 은주와 재경의 명함을 꺼내 번갈아 보았다. 은주의 이야기와 재경이 보여 준 서류 내용이 머릿속을 빙글빙글 맴돌며 나선형으로 섞였다.
은주가 인공 보주 프로젝트에 참여했다는 재경의 추측은 사실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일반인인 은주가 청호의 특성과 성향에 대해서 그 정도로 자세하게 아는 건 이전에 뭉치를 만나 봐서였다. 대체 어떤 상황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은주와 연락해 방문 약속을 잡는 내내 이연은 고민했다. 그녀에게 물어봐서 무슨 결론을 얻겠다고 이렇게까지 하는 건지 이연 본인에게조차 명확히 설명할 수 없었던 것이다.
뭉치가 인공 보주를 가지고 있든 말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은주가 예전에 태진과 일을 같이 했든 아니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심지어 은주는 이제 태진과 틀어졌다지 않은가. 이연과는 접점이 없는 관계였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뭔가 놓치고 있는 것 같다는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제가 무리불새 포획 임무를 하다가 청호를 만난 적이 있는데요…….”
그냥, 그냥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이연은 그 본능을 따라 은주의 연구소까지 왔다.
이연은 은주에게 뭉치와 처음 만났을 때 이야기를 했다. 혜강이 발견해 이연의 집으로 데려와 같이 살게 되었다는 말은 뺐다. 이연 나름의 보험이었다.
중간에 한 번도 끊지 않고 진지한 얼굴로 경청하던 은주는 잠깐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얘, 혹시 보주를 인공적으로도 만들 수 있다는 거 알아?”
진실의 문은 너무나 쉽게 열렸다.
“분명히 보주가 있어야 하는 최상급 변이종인데, 간혹가다 보주 없이 다니는 애들이 있어. 누군가에 의해 파괴당한 건지, 선천적으로 없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내가 아주 예전에, 보주가 없어 원래 능력을 반의반도 발휘하지 못하는 애들을 도와주기 위해서 인공 보주를 만들었던 적이 있거든.”
“……그건 사람들을 해치는 힘을 쥐여 주는 셈 아닌가요?”
보주 변이종과 싸울 때, 보주부터 부수는 것은 가장 정석적인 공략법이었다. 그런 판에 오히려 변이종의 보주를 복구할 생각을 하는 건 보편적인 인식과 정반대되는 행동이다. 인류의 위험을 확대하는 방향일 수도 있었다.
“어머, 너도 고리타분한 검사랑 비슷한 소릴 하네.”
굉장한 농담이라도 들었다는 것처럼 웃음을 터트린 은주가 부드럽게 속삭였다.
“내가 한 건 아주 기본적인 구호 활동에 가깝지. 만일 도시에 흘러들어 온 독수리가 날개가 부러져 움직일 수 없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면, 그 독수리가 사람을 해칠 정도로 강력하다는 이유로 치료하지 않을 거니?”
변이종은 야생 짐승이 아니다. 은주가 교묘하게 논점을 흐리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연은 입을 다물었다. 은주의 말은 물 흐르듯 막힘없이 이어졌다.
“모든 변이종이 사람을 해치는 것도 아니고, 그게 목적인 것도 아니야. 너도 헌터니까 알고 있잖니? 그렇지 않으면 도시에 왜 하급 변이종들이 버젓이 돌아다니는 것을 헌터들이나 초관청이 싸그리 잡아가지 않겠어? ……뭐,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내 생각은 이렇다는 거야.”
빙긋 웃은 은주가 화제를 원래 궤도로 되돌렸다.
“아무튼, 네가 만난 청호는 내가 보주를 만들어 줬던 그 아이 같구나. 잠깐 동기화가 풀린 사이 무리불새한테 그걸 빼앗겼다니, 걔도 참……. 그래도 네가 보주를 돌려줬다면 알아서 다시 안에 잘 집어넣었을 거야. 그 녀석 보주는 내 손꼽히는 역작이거든.”
“……그 청호는 언제 만나신 거예요? 만나기 쉬운 변이종은 아니잖아요.”
“아, 그것도 완전 운명 같았지.”
해맑은 소녀처럼 웃으며 박수를 친 은주가 과거를 회상하는 것처럼 시선을 먼 곳에 두었다. 이연이 그녀가 만난 변이종을 안다고 확신한 순간, 은주는 조금 더 너그러워졌다.
그리고……. 묘하게 웃음기가 담긴 은주의 눈길이 이연을 훑었다.
“초관청에서 얘기할 때 있잖아, 변이종 관리 소홀로 내 연구소가 망했다고 했던 거 기억나니?”
“네.”
“신고당해서 경찰이 몰려오기 직전에, 연구소 정원 구석에 처박혀 있던 걸 주웠어. 연구소 하나를 날리는 대가로 청호를 얻었다면 오히려 이득이지. 철책을 부수고 탈출하려고 했던 말썽쟁이 녀석이 오히려 고마울 지경이었다니까. 아, 그래도 걔도 엄청 귀여웠어. 보주 변이종이 아니라 보주를 받아들이진 못했지만, 보주에 넣어 뒀던 에너지를 계속 쐐서 성장하는 모습이 어찌나 뿌듯하던지!”
물어보지도 않은 부분까지 주절주절 설명하는 것이 재경의 여자 버전을 보는 것 같았다.
혼자 감정이 차올라 한참 주절거리던 은주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별안간 벌떡 일어섰다. 종종걸음으로 벽에 붙어 있던 서랍장 앞에 선 그녀는 서랍 하나를 열고는 팔을 넣어 뒤적댔다. 팔뚝이 전부 들어갈 정도로 커다란 서랍에 한참을 매달려 있던 은주가 꺼낸 것은 조그마한 사진 하나였다.
“이거 봐. 그때 쳐들어온 헌터들에게 잡혀서 이제 볼 수 없는 녀석이긴 하지만, 연구소에 있을 때 사진은 남아 있어서 다행이지 뭐니.”
“오…….”
변이종 오타쿠 상대하는 건 재경을 통해 많이 익숙해졌다. 이연은 능숙하게 호응하며 감흥 없는 시선으로 그녀가 보여 주는 사진을 향해 시선을 내렸다. 네모난 프레임 가득 차 있는 변이종은 전체적으로 사자를 닮았으나 머리 양쪽에는 뿔이 달려 있었고, 눈은 다섯 개나…….
“……어.”
이연이 아주 조그맣게 감탄사를 흘렸다. 특히 귀 기울여 듣지 않으면 들리지도 않을 정도의 크기였다.
그러나 은주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역시 아는구나?”
쿵. 그 말에 심장이 크게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