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
그런데.
‘네가 나를 살렸잖아.’
‘그러니까, 나를 두고 가지 마.’
이 얼마나 달콤한 말인가. 과거에 대한 기억이라면 온통 죄의식뿐이었던 이연에게 마치 면죄부라도 쥐여 주는 것 같았다. 이연은 산오가 건넨 말을 허겁지겁 받아 마실 수밖에 없었다.
단호하게 말하는 산오는 너무 반짝여서, 있는 줄도 모르던 갈망까지 불러왔다. 실패투성이 과거 속에서 오직 하나의 성공. 어쩌면, 어쩌면 이것만은. 예전처럼 욕심부리지 않을 테니까, 이거 하나만 있으면…….
그러다가 그를 좋아하게 될 줄도 모르고.
좋아하게 된 후에야 진실을 알게 될 줄도 모르고.
“난 그래도 조금은 도움이 된 줄 알았는데…… 내 착각이더라고.”
과거에 이연이 성공했던 건 아무것도 없었다.
더 이상은 한계였다. 도무지 더 버티고 있을 수가 없었다.
“걔는 여기 있는 것보다 영웅 노릇 하는 게 더 잘 어울리잖아.”
“여기가 뭐가 어때서.”
“그냥……. 내가 너무 붙잡아 뒀지.”
이연이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혜강은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입을 몇 차례 달싹이다가, 이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뭐. 그것도 형 선택이니까.”
어깨를 으쓱이며 대화를 마무리한 혜강이 소파에서 일어났다. 조금 전까지 나름대로 진지하던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툭 던져졌다.
“그럼 조심할 일만 남았네. 좀 집요하긴 하겠지만, 당분간 잘 피해 다니면 괜찮지 않을까?”
“응? 뭐가?”
이연이 어리둥절하게 묻자, 헤강은 오히려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냐니. 산오 형을 그렇게 쫓아냈는데, 제산에서 가만히 있겠어?”
*
지이잉…….
“야, 전화 온다.”
“스팸이에요.”
“아까부터 계속 오는 것 같은데?”
“요즘 개인 정보 유출 문제가 아주 심각해요. 기업들의 사리사욕이…….”
이연이 ‘김종찬’이라고 적힌 발신자 화면을 뒤집어 수신 보류로 만들며 웅얼거렸다.
과연 혜강의 예언대로, 점심때부터 종찬과 종희에게서 번갈아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아마 그즈음 산오의 소식을 전해 들은 모양이었다.
곧 이연의 휴대폰에 집요한 통화 목록이 한가득 쌓였다. 김종찬, 김종찬, 김종희, 김종찬, 김종희, 김종찬, 모르는 번호, 김종희, 김종찬……. 지금까지도 실시간으로 쌓이고 있는 부재중 전화는 애저녁에 두 자릿수가 넘어갔고, 곧 세 자릿수를 돌파할 예정이었다. 이연이 일부러 받지 않는다는 것을 충분히 알아챘을 텐데도 끈질겼다.
이러다 사무실로 찾아오는 것도 시간문제일 것 같아, 이연은 급하게 D.S의 공방으로 피신했다. D.S는 여느 때와 같이 여기가 네 놀이터냐고 신경질을 부렸지만, 이연이 이따 학교를 마치고 귀가할 미래를 돌봐 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나자 얌전해졌다.
“딸이랑 같이 사는 소감은 어때요?”
잠깐 잠잠해진 휴대폰을 아예 저 멀리 치워 버린 이연이 일부러 명랑하게 물었다. 공방은 이미 알록달록한 장난감에게 반쯤 함락당한 모양새였다. 소꿉놀이 세트나 세계 명작 동화, 어린아이가 가지고 놀기엔 과하게 정교해 보이는 귀여운 외형의 로봇들이 곳곳에 널려 있는 모습은 퍽 이질적이면서도 흐뭇한 광경이었다.
“어떻긴 뭘 어때. 그냥 같이 사는 거지.”
D.S는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미래랑 재회했을 때 울고불고하던 모습은 어디 가고 새침하기 짝이 없는 얼굴이었다.
“왜요, 미래는 엄청 좋다던데?”
“……걔가 그래?”
“당연하죠. 제가 미래랑 얼마나 연락 자주 하는지 알잖아요.”
이연이 제 휴대폰을 흘끗 턱짓하며 짓궂게 웃어 보이는데, 타이밍을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다시 전화가 울렸다. 드르륵. 책상과 맞물려 진동 소리가 요란했다. 발신자는 조금 전과 똑같은 이름이었다. 깜짝이야. 제풀에 놀란 이연이 빠르게 수신 보류를 누르며 말을 마저 이었다.
“전 미래가 오늘 무슨 옷 입고 나갔는지도 안다고요. 그런데 너무 두껍게 입히는 거 아니에요? 땀띠 나겠던데.”
“걔가 그거 입고 싶다고 했어. 춥다고.”
“뭐, 환절기라서 날씨가 오락가락하긴 하니까요. 아무튼, 엄마랑 여기저기 놀러 다니겠다고 벼르고 있다고요. 미래가 리스트도 다 뽑아 둔 거 알아요? 부지런히 움직여야 진짜 추워지기 전에 다 가 볼 수 있을걸요.”
겨울까지는 몇 달 남긴 했지만, 이상 기후가 나날이 심해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보니 정신을 조금만 놓고 있어도 날씨가 훌쩍 바뀌곤 했다. 아마 매주 주말마다 부지런히 돌아다녀야 간신히 미래의 성에 찰 터였다.
이연이 아는 한, D.S의 공방은 딱히 정해진 휴일이 없었다. 또한 이연이 언제 방문하든 D.S는 늘 일에 몰두하고 있을 정도로 작업량이 어마어마했다. 이전에야 딸을 빼앗겨서 허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일에 매진했다손 쳐도, 이제는 일을 좀 줄이고 휴일을 만들어 미래와 함께 보내는 것도 중요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가볍게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일 줄 알았던 이연의 예상과 달리, D.S는 인상을 찌푸렸다.
“……요즘 집을 비우기는 좀 그래.”
“그렇게 일이 많아요? D.S 씨 그 정도면 일 중독 아니에요? 사람이 로봇도 아니고, 쉴 때도 있어야죠.”
“아니, 그게 아니라…….”
D.S는 작업하던 손까지 멈추고 말을 골랐다. 이연은 그녀의 얼굴이 어딘지 난감한 빛을 띠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아무래도 내 집에 우렁 각시가 있는 것 같아.”
“……예?”
뭔 각시? 뜬금없는 말에 이연이 저도 모르게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으나, D.S는 놀랍게도 진지한 얼굴이었다.
“우렁 각시 몰라? 주인이 자리 비운 사이에 집안일 해 주는 걔 있잖아.”
“아니, 알긴 아는데……. 그게 현대 사회에 통용될 만한 존재인가요?”
누구보다 첨단 기술과 가까이 지내고 있는 D.S가 설화 속 존재를 언급하니 위화감이 대단했다. 이연은 얼빠진 소리만 중얼거리다, 문득 멈칫했다.
우렁이 각시는 우렁이에서 나온 처녀가 집주인이 일하느라 집을 비운 사이 몰래 밥을 해 준다는 설화였다. 그러니까, D.S의 집에 우렁 각시가 있는 것 같다는 말은…….
“경찰에 신고는 했어요?”
D.S의 집은 공방과 붙어 있었기 때문에 집을 비운다는 표현은 살짝 어폐가 있었지만, 그녀는 공방을 열었을 때 집에 거의 들어가지 않긴 했다. 누군가가 잠입했을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말이 좋아 우렁 각시지, 스토커 아닌가. D.S가 합법적인 거래만 하는 엔지니어가 아니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상당히 위험한 상황일 수도 있었다. 실제로 초능력자가 침입해 공방을 뒤집어 놓은 적도 있었고. 뭐, 그건 오해로 이루어진 우연이긴 했지만…… 아무튼. 대번 심각해진 이연의 얼굴에 비해, 정작 D.S는 태평했다.
“아니, 안 했어.”
“예? 요즘 세상이 얼마나 위험한데. 어린애도 있는 집에 모르는 사람이 드나들면 어떻게 해요?”
“그게…… 그렇게 위험한 건 아닌 것 같은데.”
“누가 무단 침입을 하는데 왜 안 위험해요?”
“그놈이 뭘 훔쳐 가거나 한 적은 없어. 미래는 본 적도 없다고 하고, 집을 어지르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D.S는 아리송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말하면서도 이게 맞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집에 들어가면 좋은 냄새가 나.”
“네?”
“엄청, 좋은 냄새가 난다고.”
D.S가 또박또박 강조했다. 뭐 얼마나 좋은 냄새길래…… 꽃 냄새라도 나나? 그런 쪽에 지식이 없는 이연으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냥 디퓨저 바꾼 게 잘 맞는 거 아니에요?”
“난 디퓨저 안 써.”
단호하게 고개를 저은 D.S가 차근차근 설명을 시작했다.
“내 집은 공기 정화 장치가 돌아가긴 하지만, 관리하는 데에 한계가 있어.”
당연하다. D.S는 집에 있는 시간이 거의 없다시피 하니까. 기본적인 관리 장치가 있는 덕에 공방에서 온갖 기계와 기름 냄새를 묻혀 가도 집에 배지는 않지만, 일부러 향기로운 냄새가 나도록 설정해 놓지도 않았다. 끼니 역시 대부분 공방에서 때웠으므로, 그녀의 집은 아무런 향도 나지 않는 게 정상이었다. 가끔 희미한 소독 냄새 정도나 날까.
“그런데 얼마 전부터 집에 들어가면 엄청 좋은 냄새가 나. 향수나 디퓨저처럼 특색이 있는 향기는 아니고…… 왜, 그 마른 햇볕 냄새 같은 거 있잖아. 비누 향이랑.”
공감각적 심상을 늘어놓으면서도 D.S의 얼굴은 실험에 돌입한 학자처럼 엄숙하기만 했다.
“그리고 침대에 눕는데 이불이 너무 뽀송해. 분명히 계속 쓰던 이불인데, 깨끗하게 빨아서 바짝 말려 가지고 바스락거리는 느낌 뭔지 알지? 그런 촉감인 거야. 이불뿐만이 아니야. 베개도, 심지어 밑의 시트까지 그래. 마치 우렁 각시가 세탁이라도 해 주고 간 것처럼.”
오히려 진지해서 더 무서웠다. 심각한 얼굴로 줄줄 읊는 목소리에는 은근한 만족감까지 깃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