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킹 1위를 임시 보호 중입니다 (200)화 (200/250)

#200

17. 나를 걷게 하는 것은

그래서 그 후로 무슨 일이 있었냐면, 아무것도 없었다.

산오와 부둥켜안고 숙면을 취한 후 일어난 아침은 오히려 담백한 분위기였다. 산오도 이연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행동했다. 밥을 먹고 출근을 하고 소파에 나란히 앉아 각자 할 일을 하는 것도 완전히 평소와 같아서, 솔직히 좀 헷갈릴 정도였다.

둘이 사귀기로 한 게 사실 어제 꾼 꿈인가? 분명히 키스도 엄청나게 했는데……. 서류를 읽던 이연이 그런 생각을 하며 습관적으로 산오를 흘끔 훔쳐보는데, 그 순간 눈이 마주쳤다.

그는 이연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부터였는지도 모를 시선 안에서 무언가가 요동치는 것처럼 보였다. 이연은 홀린 것처럼 초록빛 눈동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곧 산오의 상체가 기울었고, 두 사람의 몸이 가까워져…….

똑똑.

“저기요. 여기 사람 있어요.”

“헉, 혜강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연은 산오의 몸 아래에 반쯤 깔리고 있는 상태였다. 아니, 이 자세는 뭐야? 화들짝 놀란 이연이 몸을 일으키려는데, 그 위의 산오가 망부석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덕분에 산오의 품에 어정쩡하게 갇힌 채로 문가에 서 있던 혜강과 눈이 마주쳤다.

“형, 사무실에서는 음란 행위 금지라는 걸 꼭 내규로 걸어 놔야 알 수 있는 거야?”

“으, 음란 행위라니…….”

솔직히 아직 입술이 닿지도 않았다. 억울함에 항변하기도 전에 혜강의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아니면 산오 형 이제 우리 알바생 아니라고 막 나가는 거야?”

“날 해고했나?”

산오의 눈매가 순식간에 스산해졌다. 이연의 등에 식은땀이 삐질 배어났다.

“아니, 해고라기보다는 이제 안 올 거라고 생각해서…….”

“네가 쫓아냈으니 말이지.”

“……그, 그게. 아, 그래, 알바. 우리 저번엔 생략했지만 이번엔 용역 계약서를 쓸까?”

이연이 허둥지둥 화제를 돌렸다. 산오가 가소롭다는 얼굴로 코웃음 쳤다.

“필요 없어.”

“야, 만약에 또 이런 일 생겼다가 종희 씨랑 종찬 씨한테 고소당하면 어떡해. 그런 거 다 처벌받는대. 계약서 미작성이랑 부당 해고 같은 거.”

“또 이런 일을 만들 셈인가?”

날카로운 시선이 이번에는 이연을 노려보았다. 기세에 압도된 이연이 웅얼거렸다.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만약을 위해서…….”

“그 만약이 일어나면 회사보다 네 안위를 걱정하는 게 좋을걸.”

“…….”

형형하게 빛나는 눈깔을 보니 거의 진심이었다. 협박…… 이거 협박 아니냐? 이연이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 꼴을 가만히 지켜보던 혜강이 이연을 구원하기 위해 대화에 끼어들었다.

“저기, 일단 두 사람 자세부터 바로 하지?”

“아, 미안. 야, 좀 비켜 봐.”

이연이 아직도 버티고 있는 산오의 어깨를 마구 밀자, 산오는 눈썹을 찌푸리며 혜강을 노려보았다. 방해꾼이라도 보는 듯한 눈빛에 혜강이 코웃음을 쳤다.

“어디 알바생이 하늘 같은 대표님한테 눈을 부라리세요?”

“무료로 부려 먹는 주제에 말이 많군.”

두 사람의 눈동자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러니까 계약서 쓰고 보수 받아 가라고……. 사이에서 이연이 소심하게 중얼거렸으나 아무에게도 닿지 않았다.

잠깐의 눈싸움은 혜강이 한발 물러서면서 마무리되었다. 몸을 돌린 혜강이 책상으로 걸어가며 툭 던졌다.

“근로 계약서 미작성은 벌금형이야. 걸려도 초범이고, 우린 아직까지 건실한 사업체니까 별로 안 나와. 그 정도는 그냥 내도 돼. 산오 형 차고 그 정도면 싸지.”

악덕 사장 같은 말투였다. 차, 차긴 뭘 차……. 이연은 우물대듯 얼버무리는 것을 보고 혀를 쯧쯧 찬 혜강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부당 해고는…… 5인 미만 사업장엔 부당 해고 같은 거 없어. 이건 당연히 농담이었는데, 형 진짜 몰랐어?”

“…….”

“나 없으면 차금 망하는 거 아냐?”

“……부디 장기 근속 바란다.”

혜강이 사라지면 정말로 이연은 혼자 회사를 꾸려 나갈 자신이 없었다. 혜강아, 너 연봉 올릴래? 갑자기? 올해 올렸잖아. 우리 회사 예산으론 그게 최대인데. ……그래?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형은 그냥 하고 싶은 거 해. 으응……. 겸허한 자세로 대화를 나누는 사이 산오는 몸을 일으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평소의 거만한 자세로 돌아가 있었다. 저와 이연을 본체만체하는 산오를 흘긴 혜강이 들으란 듯 중얼거렸다.

“둘이 화해한 건 좋은데, 앞으로도 공중도덕은 좀 지킵시다.”

“화해는 무슨……. 싸우지도 않았어.”

이연이 머쓱하게 대꾸했지만 혜강은 믿지도 않는 표정이었다.

“형 얼굴이나 보고 말해. 아주 훤하게 폈는데. 대체 언제부터 사귀게 된 거야? 산오 형이 제발 사귀어 달라고 빌기라도 했어?”

명백하게 누군가를 겨냥하는 발언이었다. 산오의 눈썹이 꿈틀 치켜 올라갔다.

“고백 받았는데.”

유치한 대답에 이연의 얼굴이 대신 달아올랐다. 제가 했던 어린애 같은 고백 멘트가 덩달아 생각난 탓이다.

“그래? 언제는 고백 절대 안 한다고 도파민이랑 아드레날린이 그만 분비될 때까지 기다린다더니. 좋아하는 건 영원한 감정 아니라며.”

“그, 그게…….”

아무렇게나 말한 과거의 발언이 부메랑처럼 되돌아오고 있었다. 이연이 산오의 눈치를 보며 말끝을 흐리자, 산오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의외로 크게 화가 난 것 같지 않았다.

“그만 좋아하는 데에 얼마나 걸린다는데.”

혜강이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요, 한 삼 년쯤 가면 많이 간 거 아닐까요?”

그 말에 산오가 입꼬리를 삐딱하게 끌어 올렸다.

“아니던데.”

“네?”

“십 년이 지나도 똑같다고.”

순간적으로 입을 다문 혜강이 복잡한 감정이 깃든 눈으로 산오와 이연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워낙 많은 심상이 섞여 있어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염병한다는 듯한 의미만큼은 정확히 전달되었다. 아니, 내가 한 말도 아닌데……. 이연이 삐질대며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혜강이 질색하며 화제를 전환했다.

“아무튼 잘됐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산오 형 며칠 없으니까 사무실이 좀 커 보이긴 하더라.”

“이 단칸방이 크게 느껴지면 공간 지각력에 문제가 있는 거다.”

산오는 여느 때와 같이 재수 없는 대답을 내뱉었으나, 혜강은 기분 상한 기색 없이 어깨만 으쓱였다. 그는 제 책상으로 가려다가 아, 하는 탄성과 함께 이연에게 다가왔다.

“맞다, 초관청에서 공문 하나 왔던데.”

“응?”

혜강이 내민 우편을 뜯어보니 몇 장 안 되는 종이가 들어 있었다. 이연이 접힌 서류를 펼쳐 들자 혜강과 산오의 시선이 모였다. 공문의 내용은 간결했다. 이연이 제목을 크게 소리 내어 읽었다.

“초능력자 전투 능력 평가 시험 신청 기간 연기?”

연기되는 기간은 고작 2주 정도였지만, 그래도 연기는 연기였다.

“아, 결국?”

혜강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주억였다. 산오 역시 별반 놀라지 않았다. 이연이 놀라며 물었다.

“다들 알고 있었어?”

“요즘 제일 핫한 소문이 그거야. 초전력 진행에 뭔가 내부적인 문제가 생겼다는 말이 헌터들 사이에서 파다해. 형은 아무 말 못 들었어?”

“아니, 나도 혜성 씨가 비슷한 말을 하는 걸 듣긴 했는데…….”

초전력이 연기될 것 같다느니 뭐니 하는 이야기를 하긴 했지만, 그게 설마 진짜일 줄은 몰랐다. 그도 그럴 게, 초전력 제도가 시행된 이후로 이제까지 행사가 연기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전부 감안을 한 거겠지만 초전력처럼 대대적인 행사를 이렇게 미루면 부작용이 이만저만이 아닐 텐데. 영 씨도 이번 초전력으로 승단 심사 제의 받아야 한다고 했고……. 이연이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딸랑.

방울 소리에 세 사람의 시선이 모두 몰렸다. 사무실 문이 열리고 나타난 방문자는 익숙하다면 익숙한 사람이었다. 반듯한 정장 차림에 깔끔하게 넘긴 머리. 완고한 인상.

진희수였다.

“어, 국장님.”

진 국장님이 여기까진 웬일이지? 희수가 연기여우 조사 의뢰 이후로 사무실에 방문한 건 처음이다. 의뢰 이후 내내 희수의 초능력관리청 사무실에 직접 방문해 진행 상황을 보고했어야 할 정도로 바쁜 사람인데. 이연이 의아한 마음을 감추지 않은 채로 고개를 꾸벅 숙이자, 그는 가볍게 인사를 받고 곧장 산오를 돌아보았다.

“제산오.”

산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제법 딱딱했다. 방금 받은 공문에 대해서 농담으로라도 물을 분위기가 아니었다.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이연이 묘한 위화감에 눈가를 보일 듯 말 듯 찌푸렸다.

“미안합니다, 정이연 씨. 차라도 한잔 마시고 싶은데 시간이 여의치가 않군요.”

“아뇨, 바쁘신 거 아는데요.”

거처가 알려지지 않은 산오를 만나기 위해서는 차금의 사무실로 오는 게 가장 정확한 방법이었다. 비록 약간의 갈등으로 어제는 부재하긴 했지만 그런 걸 희수가 알고 있었을 리도 없고……. 그러니까 희수의 차금 방문은 이연이 아니라 산오를 만나기 위한 거였다.

거기까지는 이해가 되는데.

“점심 먹어.”

“어어…….”

산오는 그 한마디만 남기고 희수와 바로 사무실을 나갔다. 탁,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방울 소리가 한 번 더 울려 퍼졌다.

이윽고 조용해진 공간 안에서, 이연이 문득 중얼거렸다.

“수상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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