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킹 1위를 임시 보호 중입니다 (207)화 (207/250)

#207

“어머, 이연 씨. 웬 애기예요? 우리 어린이 몇 살?”

“여덟 살!”

“내 딸이야.”

“덕선 언니!”

미래를 보며 손을 흔들어 주던 수아가 이연의 뒤를 따라 들어오는 D.S를 발견하고 반갑게 소리쳤다. D.S는 높은 데시벨에도 흔들리지 않고 심드렁하게 걸어가 자리 잡았다. 수아가 자연스럽게 이연을 보고 물었다.

“웬일이에요? 덕선 언니는 이 동네 안 살잖아요.”

“오늘은 제가 한턱 쏘는 날이라서요.”

제 가슴을 툭툭 두드린 이연이 씨익 웃었다. 밤꼬치는 오늘도 한산했다. 기껏해야 바에 앉은 두 사람 정도밖에…….

“……혜강이, 랑 재경 씨?”

“이연 씨.”

“어, 형. 고글은 잘 고치고 왔어?”

심지어 그 테이블도 아는 얼굴뿐이었다. 이연이 얼떨떨하게 중얼거렸다.

“아니, 두 사람이 웬일로…….”

그가 기억하기로 혜강과 재경 사이에 큰 접점은 없었다. 재경은 주로 이연과 연락하곤 했고, 혜강 역시 그리 사교성 있는 성격이 아니었으니까. 따로 연락할 만한 수단이 있었다는 것도 신기했다. 맹한 물음에 혜강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뭐 좀 물어볼 게 있어서.”

생각해 보면 재경은 변이종 전문가니 임무 하다 궁금한 부분을 물어보기에는 제격이긴 했다. 그럴듯했지만 어딘지 석연치 않은 느낌에 이연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혜강에게 물어볼 심산이었다.

“그런데 이연 씨 뒤의 분들은 누구야?”

“아, 이쪽은 D.S 씨. 제 장비 만들어 주는 엔지니어예요. 그리고 서영 씨랑 신재이 씨. D.S 씨의…… 동거인이고요. 이쪽은 이혜강이랑 당재경 씨예요. 혜강이는 제 동료고, 재경 씨는 친구.”

이연은 서로서로 초면일 사람들을 위해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다섯 사람은 가벼운 눈인사를 주고받았다. 이연이 재경과 혜강을 향해 손짓했다.

“두 사람도 이야기 끝났으면 이리 와요. 같이 먹으면 좋잖아. 내가 쏠게.”

“나야 좋지. 술도 사 줘?”

“당연하지.”

혜강이 제 맥주잔을 들고 냉큼 일어났다. 재경 역시 엉거주춤 이쪽으로 다가왔다. 테이블 두 개를 이어 붙이자 일곱 명이 앉을 자리가 넉넉하게 만들어졌다.

“와~ 네가 언니 딸이구나. 너무 귀엽게 생겼다.”

심지어 가게 주인인 수아마저 착석해 만석이 되었다. 미래가 야무지게 대꾸했다.

“그런 말 많이 들어요.”

“당돌하기까지. 역시 피는 못 속여.”

“아니, 잠깐만. 사장님은 여기 앉으시면 안 되죠.”

뭐가 이렇게 자연스러운 거야? 이연이 뒤늦게 저지하자 수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왜요?”

“왜냐니……. 주문받아야 하잖아요.”

가지런한 눈썹 끝이 대번 처졌다. 수아는 쓸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렇군요. 저는 소외되는 거네요…….”

“예?”

왜 얘기가 그렇게 되는데? 고독하게 먼 곳을 응시하는 시선 처리는 순한 인상의 미인에게 처연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기 충분했다. 한순간에 말려든 이연이 버벅거렸으나 수아는 본 척도 하지 않았다.

“모두 노는데 저만 일을 시키려고 하다니, 이연 씨 생각보다 냉정하군요.”

“저, 여긴 사장님 일터잖아요.”

“다들 맛있는 걸 먹고 마시면서 제가 노동하는 모습을 구경하겠다는 속셈이군요…….”

“아니, 아무도 구경을 하지는…….”

“이제 관심도 없다 그건가요?”

“제 말에 관심이 없는 건 사장님이 아닐까요?”

두 사람의 설전은 너무 만담 같아서 크게 주목을 끌지도 않았다. 일례로 그 옆에서는 혜강과 영이 태평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 어쩐지 얼굴이 익숙하더라니. 초전력에서 이연이 형이랑 같이 편먹었던 그분 맞죠?”

“……보고 있었나?”

“네. 배신하는 것까지 똑똑히 봤어요.”

“…….”

영의 얼굴이 얼마나 우중충해졌는지 흘끔거리며 눈치만 보던 재경이 슬그머니 위로할 정도였다.

“지, 지난 일 가지고 뭘 그래. 초전력이 다 그렇지. 진짜로 다치게 한 것도 아니고 게임일 뿐이잖아. 그렇죠?”

“…….”

이연을 실제로도 공격한 영의 안색은 이제 검은색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녀의 상태를 뒤늦게 알아챈 재경이 깜짝 놀랐다.

“어? 왜? 내가 뭐 말 잘못했어?”

“언니, 집에 갈래?”

급기야 재이가 소곤댔다. 극단적 회피법을 제시하는 재이의 유혹을 간신히 물리친 영이 파르르 떨리는 손끝으로 물컵을 움켜쥐었다.

“그것에 대해서는 반성하고 있다.”

“……어이, 이봐요. 왜 수긍하는데? 여기서 수긍하면 의미가 이상해지지 않아? 진짜로 이연 씨를 공격한 거야?”

“다행히 정이연이 다치지는 않았다. 내가 더 약했으니까.”

“……나 그냥 맥주나 마실게.”

자극적인 스토리를 견디지 못한 재경이 기죽은 얼굴로 맥주를 홀짝였다. 옆에서 혜강이 흠, 하고 턱을 쓰다듬었다.

“아, 그 얘기도 이연이 형한테 듣긴 했어요. ‘공장’ 일 말이죠?”

뚱한 듯하면서도 날카로운 시선이 영을 거쳐 재이한테 향했다.

“본인이 저지른 일에 대해서 과보호하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재이 역시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했다.

“세상엔 피해도 되는 일이 있어.”

“설마 그게 지금일까?”

난데없이 두 사람의 시선에 불꽃이 튀었다. 그 모습을 이연이 흐뭇하게 바라보다 D.S에게 속삭였다.

“벌써 친해졌나 봐요. 역시 다들 나이가 비슷해서 그런가, 빨리 친해지네.”

“넌 눈이 삐었냐?”

황당하다는 얼굴로 대답한 D.S가 수아에게 메뉴판을 흔들었다.

“한수아, 추천 메뉴가 뭐야?”

“음……. 오늘 이연 씨가 쏜다고 했죠? 그럼 제가 특별 메뉴로 솜씨를 좀 발휘해 볼게요.”

찡긋 한쪽 눈을 깜빡인 수아가 자신 있게 일어섰다. 플랫 슈즈를 신은 경쾌한 발걸음이 사뿐사뿐 멀어졌다. 수아가 사라진 빈자리에서 미래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삼춘. 미래는 콜라 먹고 싶어.”

“콜라?”

이연이 슬쩍 D.S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가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얼굴이 환해진 미래가 두다다 달려가 업소용 냉장고를 열었다. 다행히 콜라는 미래의 손에도 닿는 낮은 위치에 있어, 행복한 얼굴로 뚱뚱한 캔을 껴안고 귀환할 수 있었다.

“네가 미래구나. 이렇게 보는 건 처음이지?”

자박자박 걸어와 다시 의자에 오도카니 앉는 미래의 모습을 신기한 듯 관찰하던 혜강이 말을 걸었다. 말씨가 무덤덤하다못해 무뚝뚝하게까지 느껴지는 평소와는 달리 제법 상냥한 목소리였다.

그러고 보니 실제로 둘이 만난 적은 없었다. 미래를 구출한 날에도 바로 희수의 집무실로 이동되었으니 혜강이 모니터 너머가 아닌 현실로 미래를 보는 것은 처음이다. 섬세하게 생긴 미소년이 예쁘게 웃자 미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요정님처럼 생겼어…….”

그 말과 동시에 혜강이 영과 재이를 흘끗 바라보았다. 어째 의기양양한 표정이었다.

“내가 요정 같아?”

“웅! 너무 예쁘다.”

“요정은 요정을 알아보는구나.”

혜강은 자연스럽게 미래가 쥐고 있던 캔을 집어 들어 뚜껑을 따 주었다. 플라스틱 잔에 쫄쫄 따라지는 콜라를 빛나는 눈으로 바라보던 미래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미래는 요정 아닌데.”

“어, 이렇게 귀여운데 요정이 아니야?”

“아이, 참! 아니야~.”

미래가 꺄르르 웃었다. 순식간에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가 훈훈해졌다. 그 모습을 영과 재이가 질시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D.S는 제 딸로 다른 사람들이 신경전을 벌이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고 먼저 나온 생맥주를 들이켰다. 슬슬 참견하기도 귀찮아진 모양이었다.

“이연 씨는 아는 사람이 많구나…….”

어느 순간부터 입을 다물고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기만 하던 재경이 슬그머니 중얼거렸다. 원래 사교적인 성격이 아닌 재경은 이 떠들썩한 분위기에 쉽게 끼어들기가 힘든지 손가락으로 잔만 만지작대고 있었다.

“에이, 그런 건…….”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던 이연이 멈칫했다. 의자 수가 모자라 테이블을 붙여서 앉을 정도의 인원이었다.

주변 자리를 가득 채운 사람들의 면면은 다양했다. 만난 계기도, 과정도 모두 달랐다. 이연의 시선이 사람들을 훑었다. 심드렁한 척 기 싸움 중인 혜강과 재이, 그리고 그 사이에 껴서 한마디 던졌다가 본전도 못 찾는 영. 맥주를 홀짝이는 D.S를 따라 콜라를 홀짝이는 미래. 홀이 훤히 보이는 주방에서 바쁘게 손을 놀리는 수아. 한껏 어색해하면서도 얌전히 앉아 있는 재경까지.

어느새 이렇게나 많아졌을까?

“……그러게요. 많네요.”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어딘지 싱거웠다. 재경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뭐야, 자랑해?”

“아뇨, 그런 건 아니고……. 신기해서요. 저는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초호시에 처음 왔을 때 이연은 혼자였다. 차라리 이게 낫다고 생각했다.

무언가를 가진다는 것은 잃을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그렇다면 아예 손에 쥐지 않아도 괜찮았다. 언젠가 상실이 다가올 거라는 것을 아는데 굳이 가져 봐야 뭐 하겠는가. 그렇게 좋지도 않을 것이다. 들어가지 못하는 포도밭을 앞에 둔 여우처럼 생각하려고 했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렇게 되어 있었다.

“참 나,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이연 씨가 제일 발 넓어.”

“그건…… 재경 씨의 아는 사람 규모가 좁아서 그런 거 아닐까요?”

“이연 씨!”

“농담이에요.”

이연이 피식 웃으며 입꼬리를 허물어트렸다. 결심에 확신이 더해졌다.

그는 내일 희수를 찾아갈 것이다.

“저 승단하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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