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
모든 사람들의 동작이 멈추었다. 단번에 소름이 돋은 팔뚝을 애써 무시한 이연이 고개를 들었다. 가게 문간에 몸을 기댄 산오가 살벌하게 눈을 빛내고 있었다. 태산 같은 기세로 서 있는 폼이 누가 봐도 약간 빡친 것 같았다. 이연이 급하게 변명하기 위해 입을 뗐다.
“아니, 잠깐만.”
그러나 무시당했다.
“왜, 더 해 봐.”
“…….”
“흥미로운데.”
당장이라도 죽여 버릴 듯한 얼굴로 내뱉는 나직한 음성은 음산하기까지 했다. 들어 봐, 내가 그런 의미로 한 게 아니고……. 주섬주섬 변명하던 이연이 억울하다는 얼굴로 테이블의 사람들을 쳐다보았으나, 약속이나 한 것처럼 다른 곳을 응시 중이었다. 아니, 같이 해명해 달라고……. 우리 방금 훈훈했잖아!
“여, 여긴 어떻게 알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연만 죽어라 노려보는 산오의 얼굴에 결국 변명을 포기한 이연이 물었다. 조무래기 악당 같은 대사에 매서운 눈매가 더욱 살벌하게 꺾였다.
“몰랐으면 좋았겠나?”
상황은 조금 더 악화되었다.
“……우린 이만 해산할까?”
냅킨으로 입가를 톡톡 두드려 닦은 D.S가 미래 쪽으로 몸을 틀었다. 이 소란에도 곤히 자고 있는 모습이 천사 같았다. 그녀가 딸을 조심스레 안아 드는 사이 수아와 혜강이 빠르게 눈빛을 교환했다.
“그럴까요? 저 사실 새벽에 떼쟁 하기로 해서 슬슬 가야 되긴 했어요.”
“아, 혜강이 오늘 거기 나가? 나도 갈 건데.”
“누나 장사하셔야 되는 거 아니에요?”
“오늘만 빨리 닫으려고 했지. 마침 타이밍도 딱 됐네.”
두 사람이 도란도란 대화하며 테이블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재경 역시 그럼 나도 내일 출근을 위해, 라고 웅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영은 안절부절못하며 산오와 이연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혜강이 고개를 저으며 속삭인 남자 친구라는 말에 그제야 조금 안심한 얼굴로 반쯤 졸고 있는 재이를 챙겼다.
놀라울 정도로 빠른 파장 분위기에 이연이 억울하다는 호소를 할 새도 없이, 산오가 이연의 팔을 낚아챘다.
“그럼 너도 이제 집에 가면 되겠군.”
술에 취해서 그런가? 방금 집이 지옥으로 들렸다.
“형, 내일 봐.”
질질 끌려가는 이연의 등 뒤로 혜강의 산뜻한 인사만 남았다.
*
“…….”
“…….”
집에 도착한 이연과 산오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나란히 소파에 앉은 채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오는 내내 살벌했던 분위기는 식탁에서 싸늘하게 식은 저녁밥이 발견되면서 한층 심화되었다.
분명히 거실 등이 환하게 켜져 있는데 칠흑 속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우중충했다. 오늘따라 뭉치도 안방 침대에서 잠들었는지 조용했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산오였다.
“점심 먹으라고 했지, 저녁 먹으라는 소리는 안 한 것 같은데.”
“……미안. 기다렸어?”
이연이 머쓱하게 물었다. 눈치를 보니 산오는 이연과 함께 저녁을 먹고 싶었던 것 같았다. 연락할걸……. 희미하게 풍기는 음식 냄새가 죄책감을 가중했다.
“배고프지. 일단 먹자.”
이연이 막 일어서려는데, 팔목이 잡혔다. 아플 정도로 센 힘은 아니었지만 멈춰 서게 할 강도는 되었다. 이연의 몸이 잡아당기는 힘에 자연스럽게 돌아 움직일 생각을 않는 산오를 마주 보게 되었다. 자세 덕에 눈높이가 뒤바뀌어 정수리가 훤히 보였다.
“왜 온갖 놈들에게 그딴 말을 하고 있었던 거지.”
워낙 떠들썩한 분위기였고 모두에게 한 말이니 당연히 농담으로 여기고 넘길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산오는 정말로 궁금한 듯했다. 그런 걸 물어볼 줄은 몰랐던 이연이 맹하게 입을 열었다.
“어, 그게.”
산오가 시선을 들어 이연을 직시했다. 빤히 쳐다보는 눈동자가 묘하게 반질해 이연은 저도 모르게 버벅거렸다.
“내, 내가 오늘 뭘 좀 고민했는데…… 사람들이랑 이야기하니까 좀 알 것 같아서. 다들 좋은 사람들이기도 하고…….”
“고민?”
산오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왜 나한테는 말하지 않지?”
“그거야…….”
너도 말 안 했잖아. 이연은 심술궂게 말하려다가 생각을 고쳐먹었다. 아직 저에게 숨겼다는 사실에 화가 풀리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산오를 빼놓으면 안 됐다. 그는 이연이 움직일 수 있게 만드는 가장 큰 원동력이니까. 작게 심호흡을 하자 술렁거리던 심장이 조금 진정되었다.
“제산오, 내가 오늘 전투 구역에 들어가서 확인했는데.”
“…….”
“지형 설정 기능이 안되더라고.”
밝은색 눈동자가 산오의 눈에 정확히 닿았다. 새까만 동공이 조금 수축했다.
“진짜야?”
문장 성분이 죄다 생략된 질문은 명확한 속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못 알아들었을 리가 없었다.
산오가 대답하지 않자, 이연이 다시 물었다.
“알고 있었어?”
산오는 역시 대답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무엇보다 확실한 긍정이 되었다. 대신 고집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게 없어도 변이종 잡는 데에는 문제없어.”
“넌 그렇겠지.”
도시의 헌터들 모두가 제산오는 아니었다. 대부분 어떤 약점이 있었고, 지형 설정 기능은 그 약점을 훌륭하게 보완해 주곤 했다.
게다가 전투 구역은 단순히 변이종 전투에만 쓰이는 공간이 아니다. 전투 시설인 동시에 공공 편의 시설 중 하나였다. 초전력은 물론이고 헌터 안전 교육이나 비상 훈련 등에도 요긴하게 쓰였다. 그때마다 목적에 맞게 공간을 변화시키는 과정, 즉 지형 설정 기능 활용이 포함되었다.
모두가 중요하게 쓰고 있는, 그것도 도시 전역에 깔려 있는 시스템이 한순간에 사라진다면 적잖은 혼란이 도래할 것은 뻔했다. 당장 초전력부터 연기되지 않았는가. 벌써 균열은 시작되었다.
아마 태진이 노린 것 역시 이것일 터였다. 절박한 사람을 상대로 협상하는 것은 태진의 장기였으니까.
“내일 날이 밝으면 초관청에 가려고.”
“…….”
“가서 내가 실체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밝히고, 이태진에게…….”
휙!
이연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몸이 흔들렸다. 이연의 멱살을 잡아 눈앞으로 끌어온 산오의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연은 의연하게 말을 이었다.
“왜, 너도 내가 5단이 되면 좋겠다고 했잖아.”
“누가.”
“…….”
“누가 그딴 걸 바랐어?”
산오가 당장에라도 씹어 먹고 싶다는 얼굴로 윽박질렀다.
이연이 이 상황을 알게 되면 할 소리는 빤했다. 제 기력을 다시 가져가라고 하겠지. 이태진이든, 초능력관리청이든. 상황을 복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든. 마음껏 가져가라고, 어차피 죽지는 않는다는 개소리나 지껄일 것이다.
“도시 하나를 너 혼자 지탱하겠다고? 아주 눈물겨운 희생이군. 비석이라도 세워 줘?”
“제산오.”
“네가 하려는 건 학대야.”
싸늘한 목소리가 이연을 공격하는 것처럼 마음에 꽂혔다. 이연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
“난 그걸 두고 볼 생각이 없고.”
산오가 이연의 멱살을 끌어당겨 으르렁댔다.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푸르게 일렁이는 눈동자가 이연을 곧장 쏘아보고 있었다.
“넌 절대 진희수한테 가지 못할 거다. 물론 이태진과도 접촉할 수 없어.”
“무슨…….”
“내가 막을 거니까.”
“…….”
“믿을 수 없으면 한번 해 보든가.”
산오의 얼굴은 완전히 진심이었다. 위협적인 기세에 조금 질린 이연이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그럼 어떡해? 그냥 이대로 가만히 있어? 어떻게 그래? 원인을 뻔히 아는데.”
“그딴 걸 해결책이라고 내놓을 거면 차라리 입 다물고 있는 게 낫겠군.”
단호한 얼굴은 바늘 하나도 찌르지 못할 만큼 빈틈없었다. 이연은 그런 산오를 빤히 바라보다가, 문득 물었다.
“내가 왜 능력을 숨기고 심사를 본 줄 알아?”
사실 이 이야기는 이미 산오에게 한 적 있었다. 지형 설정 기능은 도시에 필요하니까. 함부로 밝혔다간 산오의 과거까지 드러나게 되니까.
지극히 그다운 이유였다. 이타적이고 사려 깊고 합리적인, 남들은 물론 이연 자신까지도 그렇게 믿었을 정도로 그럴듯한 변명.
그러니까 지금처럼 오히려 능력을 숨김으로써 시민들의 안전에 문제가 생긴다면, 당연히 밝히려고 나서야 했다.
그런데 막상 그것을 숨길 이유가 사라진 후에도 이연은 바로 초능력관리청으로 찾아가지 않았다. 걸음을 멈추고 망설였다.
“난 그냥 그 능력이 부담스러웠던 거야.”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잔상이 뱅글뱅글 맴돌았다. 아버지, 어머니, 이태진, 연구원들……. 제 초능력으로부터 비롯되었던 모든 사건과 결과, 후폭풍까지.
“웃기지, 비공식적으로는 마음껏 능력을 써 대면서 고작 공식 서류에 그거 몇 글자 올리는 걸 고민하는 게.”
그림 실체화 능력자로 사는 것은 제 피부 위에 가죽을 한 겹 더 쓰고 사는 것 같았다. 두꺼운 껍질 속에 들어 있는 커다랗고 못생긴 알맹이는 일부분만 드러내면 그럭저럭 괜찮아 보였다. 눈에 선이라는 형태로 보이는 물리적인 물건만 구현하는 것은 응용조차도 되지 않는 가장 단순한 운용이었지만, 이 정도가 딱 좋았다.
그런데 좁고 어두운 틈 사이에서, 이연도 모르는 사이 조그마한 싹이 자라고 있었다.
척박하고 울퉁불퉁한 표면을 간신히 뚫은 새순은 용케 떨어지지 않고 조금씩 몸집을 불렸다. 어느 날 그의 집에 눌러앉은 남자가 자꾸 물을 준 탓이었다. 벌어진 속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대한 탓이었다.
그것을 보고 있으니 이연도 그게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위급할 때가 아니라면 절대로 쓰지 않던 것을 장난칠 때 무심코 쓰게 되었다. 오래도록 만나지 못한 친구처럼 낯설던 능력이 점점 익숙해졌다. 능력을 쓰면서 웃을 수 있게 되었다. 마치 어릴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아무런 고민도 없이 온갖 놀이기구를 만들어 대던 그 시절로.
‘같이 헌터 한다고 했잖아.’
눈앞의 사람이 그렇게 만들었다.
‘너와 비슷한 인간이 되어야 네가 내 옆에 있을 테니까.’
이연의 발자국을 따라 걸었다고 온몸으로 외치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