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킹 1위를 임시 보호 중입니다 (213)화 (213/250)

#213

함께 다니던 쌍둥이 중 한 명이 불법 행위를 저지르다가 체포되었는데, 같은 의상과 머리를 하고 같은 장소에 있던 나머지 한쪽을 의심하지 않기란 퍽 어려운 일일 터였다. 희수는 세미 체포 후 당연히 세은에 대한 신병 인도를 본가에 요청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처리가 느렸다. 몇 번이고 세은이 머물고 있던 희수의 본가로 연락을 보냈지만, 번번이 핑계만 돌아왔다. 직접 본가로 들어가 말해도 마찬가지였다. 진정원은 희수에게 공적 권위를 앞세워 집안을 마음대로 뒤집는 일 없이 자신들을 존중하길 바란다는 요지의 이야기를 고상하고도 고압적으로 전달했다. 그러는 동안 조잡한 변명들은 끝없이 이어졌고, 희수의 요청은 계속해서 미뤄졌다.

뿐만 아니라 세미를 조사하려는 과정도 지연되었다. 그녀를 만나려고 일정을 빼면 다른 곳에서 타이밍 좋게 새로운 일거리를 안겨 주거나 긴급 미팅을 요청하는 식이었다. 비서에게 몇 번 주의를 주었지만, 정말 급한 건이라 어쩔 수 없다고 울상 짓는 데에야 별수가 없었다. 실제로 희수 본인도 인정할 정도로 중요한 안건들이기도 했고.

방편으로 다른 사람에게 취조를 부탁했지만, 별 소득은 없었다. 낯선 사람은 무섭다며 세미가 연신 고개를 저었다는 것이다. 진희수 국장과 아는 사이라고, 희수가 아니라면 이야기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통에 상황만 차일피일 뒤로 넘겨지고 있던 판이었다.

세미가 만든 팔찌 조사를 부탁한 국립 연구소에서도 미적거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새로운 방향의 발명품이라 면밀한 검사가 필요하다는 말과 함께 의례적인 정보만 보내 왔다. 이를테면 타인의 기력을 이용하여 초능력을 사용하는 기계라는, 희수도 뻔히 아는 사실들 같은 거.

그래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면서도 정작 초능력 팔찌 사건의 진도는 더뎠다. 그런 상황이 계속 반복되자 이상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너무 공교로웠다. 갑작스럽게 바빠진 희수의 일정, 묵묵부답인 세미와 세은, 그리고 소식이 없는 연구소.

마치 어디서 희수가 이 건을 캐지 못하게 의도적으로 막고 있는 것 같았다.

그즈음, 이연이 국장실 문을 박차고 쳐들어왔던 것이다. 손에 새로운 기력 정제 보석 몇 개를 쥔 채로.

“아무래도 국립 연구소에서는 완전히 별개의 건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정이연 씨가 보내 주신 보석 조사는 금방 해서 주더군요.”

연구소에서 초능력 팔찌에 대해서는 검사조차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이연이 보낸 보석과 세미의 보석이 같은 것이라고 알아보지도 못했다.

“그래서 저는 무리해서라도 이세미를 초능력 관리청으로 불러들였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이세은 씨가 나타나서 둘이 탈주했군요.”

호송 차량에 난입한 세은의 행동은 태진의 지시였다. 희수의 동태를 그가 고스란히 알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희수가 시무룩하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본가에 급하게 연락해 보니 이세은은 사실 사건 이후부터 연락 두절이었다고 하더군요. 제가 요청한 건이니 보내려고는 했는데 집에 없으니 백방으로 찾고 있었다고…….”

희수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는 집안에서 하는 변명이 허술하기 짝이 없다는 사실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러나 그것을 뻔히 알고도 희수는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정확히는 그럴 힘이 없었다.

그전에도 휘둘린다는 자각은 있었다. 사실 조금 상관없었던 것 같기도 했다. 말이 휘두르는 거지, 실제로 희수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대부분 관철할 수 있었다.

초능력 관리청 내부에는 희수 외에도 집안의 힘이 되어 주는 사람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었다. 그들은 희수에게 대체로 친절했다. 도움을 준 적도 많았다. 집안이 하는 몇 가지 일들—비초능력자를 쫓아낸다거나, 미래와 덕선을 떨어트린다거나—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른들이 워낙 보수적이시니까.

그럭저럭 괜찮지 않나? 가문은 나를 사랑하고, 도시를 사랑하니까.

도시를 위해 나쁜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이 나이 먹고 참으로 순진하지 않습니까.”

희수가 싸늘하게 자조했다. 편애를 받아 온 사람은 그것이 거두어지고 나서야 그것이 편애임을 알았다.

집안의 손이 닿은 사람들은 가문의 사람인 희수에게 상냥했지만, 그의 뜻에 무조건 따라 주지는 않았다. 초능력 팔찌 건으로 이야기라도 좀 할라치면 다들 젊은 국장님이 패기가 있네, 하는 식으로 말을 돌렸다. 친근한 어조 바닥에 아주 옅게 깔린 모멸을 알아채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자존심 상했으나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희수는 그제야 그 사실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절절이 체감했다. 최희원의 손자, 최연소 국장, 무궁화 5단……. 전부 희수가 이룬 게 아니었다. 그냥 어쩌다 보니 받은 거였다.

그야말로 허수아비다.

“제가 국장으로서 그간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집안이 암묵적으로 저를 지지 중이었기 때문입니다.”

가문이 의도적으로 자신이 하는 일을 막기 시작한 순간, 희수에게로 돌아오는 정보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연이 아니었다면 희수는 아직까지도 초능력 팔찌의 보석이 핵인 줄도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희수의 낯빛은 말을 하면 할수록 어두워졌다. 현실을 소리 내어 말하며 자괴감이 몰려오는 듯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연이 입을 열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으신 거 알아요.”

“예?”

“저한테 물러날 생각 없다고 말씀하셨잖아요.”

‘여기서 물러날 생각은 없습니다.’

언젠가 희수가 했던 선언이었다.

이연의 말대로였다. 상황이 힘들어져도 희수는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난항을 겪으면 겪을수록 집요해졌다. 팔찌 그 자체에 대해 캘 수 없다면 그 핵인 보석에 대해 캐면 된다. 공장을 알아내고, 산오에게 조사를 부탁하고, 김철재를 잡고. 유일한 정보원이었던 이연마저 가차 없이 용의자로 불러내 조사할 정도로 그는 진심이었다.

“아, 맞아요. 저 부르셨던 거 엄청 흐지부지됐던데. 이제 절 향한 의심은 거두신 거예요?”

안 그래도 궁금하던 부분이다. 이연이 묻자 희수가 눈썹을 슬쩍 찌푸리며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입꼬리가 삐딱하게 치켜 올라갔다.

“의심을 거둔 게 아니라 갑작스레 이관되어 책임자가 바뀐 겁니다. 하지만 보아하니 추가적인 조사는 받지 않으신 것 같군요.”

그가 무리하면서까지 태진의 사건 이관을 수락하지 않은 이유는 이미 한 번 당해 봤기 때문이었다. 제대로 마무리되지 않고 희수의 손을 떠난 사건이 어떻게 되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그럴 줄 알았다는 희수의 반응에 이연이 어리둥절하게 물었다.

“이관이요? 누구한테…….”

질문에 대신 대답한 것은 산오였다.

“네 정체가 그런 식으로 탄로 나면 곤란한 게 누군지 생각해 봐.”

당장이야 얼버무릴 수 있을지 몰라도, 조사가 계속된다면 이연은 사정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연의 기력 보석을 김철재가 만들 수 있던 이유. 그건 태진이 김철재에게 제 기력을 줬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태진이 제 기력을 가지고 있었던 이유마저 밝혀지게 된다.

그건 실체화 능력을 제 것인 양 행세하고 싶은 태진에게는 그다지 달갑지 않았을 터였다.

“실질적으로 이관해 간 것은 초능력자관리국 쪽으로, 따지자면 원래 그쪽이 해야 하는 일이긴 합니다.”

특례법에 따라 희수가 맡고 있긴 했지만, 말도 안 되게 바빠지는 것과 동시에 이관 요청 역시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당시엔 타이밍이 인위적이라는 의심을 할 여유도 없었다. 희수는 살인적인 업무량을 견디다 못해 초능력 팔찌 사건을 넘겼고, 그 후로 아무런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리고 미래가 제 사무실에 순간 이동으로 나타난 날, 집에 테러가 있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겁니다.”

그제야 희수는 제가 살던 집 지하에 태진과 세은은 물론이고 세미까지 모조리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초능력관리청에 상주하다시피 지내며 동분서주하면서도 정작 등잔 밑에 뭐가 있는지 아무것도 몰랐다. 심지어 본인이 보호자로 있는 미래의 상황조차도.

그건 정말로 충격이었다.

“저희 가족은 아마 이태진과 그 쌍둥이가 뭘 하고 다녔는지 얼추 알았을 겁니다.”

희수의 집안은 허술하지 않았다. 만일 그간의 일을 몰랐다 하더라도 세미가 잡힌 순간 모든 사정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런데도 탈출한 세미, 그리고 그녀를 도운 세은을 다시 집안에 불러들인 것은 명확한 의도를 시사했다.

“그래도 상관없다는 거겠죠.”

그 부분을 믿을 수가 없었다. 다소 독선적이고 편협한 부분은 있어도 희수는 제 가문을 사랑했다. 집안 어른들을 존경했다. 자랑스러운 가문의 명패를 섬세하게 닦아 내리는 손길을 좋아했다.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그것이 타인의 강제적인 희생 위에 세워진 거라면 대체 무슨 영광이 남는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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