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
일시적으로 자유를 얻은 태진이 이연을 부른 곳은 도심부에 있는 어느 사무실이었다.
새하얀 벽의 사무실은 커다란 평수에 맞지 않게 여백이 굉장했다. 사무용 책상과 노트북, 서류 몇 뭉치와 기력 추출을 위한 기계 장비가 다였다. 누가 봐도 임시로 빌린 듯한 분위기가 팍팍 풍겼다.
“이번엔 그리 많이 추출하지는 않을 거야. 오랜만이기도 하니까, 당장 응급 처치가 가능할 정도로만.”
태진이 제법 자상한 어른처럼 지껄였다. 막무가내로 기력을 뽑아내려고 들었던 진씨 집안 저택의 지하에서와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아마 그의 작전이 바뀌었다는 뜻이겠지. 강압에서 회유로.
그러나 이연은 그렇게 빈정대는 대신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괜히 기력 없다고 주변에 티 내 봤자 좋을 것도 없으니까요.”
이연의 앞에 놓여 있는 의자는 이전에 기력을 추출했었던 침대 형식의 실험대와는 조금 달랐다. 부드러운 천 재질의 커버는 푹신해 보였고, 사지를 구속할 수 있는 벨트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해치지 않을 테니 안심하라고 온몸으로 광고하는 것 같은 의자였다.
그간 태진은 공식적으로 구금 상태였기 때문에 병실에서 자유롭게 나갈 수 없었다. 짧은 시간 안에 이 설비를 갖추기 위해서는 틀림없이 외부의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추출 과정 자체를 초능력관리청에서 알지 못하게 진행되어야 한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태진이 취했을 방법은 사실 빤했다.
희수가 이 실마리를 잡길 바랄 뿐이다.
“앉아 보렴.”
이연은 부드럽게 몸에 감겨드는 의자에 몸을 내렸다. 순순히 당해 주러 온 게 아니라는 걸 몇 번이고 되뇌어 봐도 긴장이 되었다. 부정적인 생각을 몰아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딴생각을 했으나, 태진에게는 그 모습이 보인 모양이다.
“괜찮아. 긴장할 필요 없단다.”
“안 되게 생겼어요?”
이연은 저도 모르게 불퉁하게 대꾸했다. 태진이 귀엽다는 듯 웃어넘겼다.
그러나 태진의 장담대로, 과정은 이연이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평범했다. 아니, 평범한 것을 넘어 거의 아무 일도 없는 수준이었다. 추출할 때에 기력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있긴 했지만, 이연이 능력을 쓸 때 빠져나가는 정도였다. 대신 끊임없이 빠져나가긴 했으니 헌혈하는 기분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추출은 금방 끝났다. 30분 정도 흐르자 태진은 기계를 정지했다.
“이전에 말한 대로 응급처치할 정도의 분량만 일단 확보했어. 초관청이 눈에 보이는 결과를 당장 원해서 말이야.”
팔에 붙였던 전극을 하나하나 떼 주며 태진이 설명했다. 이연은 조금 저리는 팔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앞으로도 이 정도만 하면 되나요?”
“음, 아마도? 만일 도시를 오래 비우거나 할 일이 생기면 조금 더 많이 해야 하긴 하겠지만, 웬만하면 최소 기력으로 최대 효율을 뽑도록 하자.”
태진이 빙긋 웃었다. 그가 늘 달고 다니던 여유로운 웃음이었다.
“우리 정연이와의 신뢰도 회복해야 할 테니까.”
태진은 내내 그들 사이에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양 다정한 삼촌인 것처럼 굴었다. 기력을 채취할 준비를 할 때에도 친절했고, 채취하는 과정에서도, 채취한 후에도 이런저런 설명을 해 주며 차까지 대접해 주었다. 마치 십 년 전 여름방학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오늘 고생했어. 조심해서 돌아가렴.”
“네.”
그리 멀지도 않은데 문가까지 따라 나오는 모습이 영 어색해 이연이 머쓱한 얼굴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친절한 웃음을 입가에 걸친 태진이 문을 열어 주었다.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말을 덧붙이면서.
“다음 날짜는 다음에 연락을…….”
별안간 목소리가 부자연스럽게 뚝 끊겼다. 응? 이연이 의아한 얼굴로 뒷말을 이을 생각을 하지 않는 태진을 바라보았다.
태진의 눈은 찢어질 듯이 크게 벌어진 채로 문 너머를 응시하고 있었다.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에 이연이 태진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이런 데에서 작당을 하고 있었군.”
악당마냥 삐딱한 얼굴을 하고 있는 남자가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선명한 초록색 눈과 마주친 찰나, 이연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제산, 잠…….”
그러나 말을 마치기도 전에 바닥에서 미묘한 진동이 울렸다. 이연은 본능적으로 기력을 끌어모았다. 하얀 모래가 옅은 안개처럼 모여 시멘트 바닥을 뚫고 태진을 향해 돋아나는 가시를 간신히 막아섰다.
카앙!
날카로운 소리가 복도에 울렸으나, 다행히도 나와 보는 사람은 없었다. 이연이 다급하게 태진을 돌아보았다. 그는 자신의 얼굴에서 불과 한 뼘쯤 떨어진 곳에서 공격을 막아 낸 방패 앞에서 얼어붙어 꼼짝하지 못하고 있었다.
가시 모양대로 살짝 우그러진 방패는 조금만 더 늦게 만들어졌더라면 그대로 태진의 머리통으로 돌진하는 가시를 막지 못하고 대참사를 냈을 것이다. 인상을 와락 일그러트린 이연이 산오를 향해 소리쳤다.
“미쳤어? 죽을 뻔했잖아!”
“죽일 생각이니까.”
소름이 돋을 정도로 서늘한 대꾸가 돌아왔다. 은근하게 빛나는 녹색 눈동자는 감정을 읽을 수 없을 정도로 건조했다. 이연조차 놀라서 움찔할 만큼.
“내, 내가 말했잖아. 삼촌만 시스템 복구를 할 수 있다니까……!”
잠깐 움츠러들었던 목소리는 합리적인 논리를 주장하며 점점 커졌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이연이 태진의 앞을 보호하듯 막아서자, 산오의 얼굴이 굳었다.
“너야말로 제정신인가? 그놈은 널 죽이려고 했어.”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그에 그치지 않고 반 발자국 앞으로 다가서는 기세가 사뭇 위협적이라, 이연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안 죽었잖아.”
“뭐?”
“난 그때도, 지금도 안 죽었어.”
잠깐의 망설임 후에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네가 상관할 일도 아니잖아.”
산오는 정말로 황당하다는 표정이었다. 찌푸린 눈살 사이사이에 확연한 짜증이 배어들었다.
이연은 의도적으로 초조한 척 태진을 흘끔 바라보았다.
“지금 말 다 했나?”
“내 기력을 어떻게 쓰는지는 내 마음이지. 너 이러는 거 오지랖이야.”
산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연은 그의 전신에 감돌고 있는 불온한 기운을 눈치챘다. 기력을 다시 끌어모은 것은 직감에 따른 행동이었다. 새까만 그림자 같은 철가루들이 산오의 발밑을 맴도는 것을 발견하자마자 이연의 기력이 그물처럼 넓게 퍼졌다.
쿵! 새하얀 모래가 몰려들어 산오의 몸을 벽까지 밀었다. 철가루들이 튀어나오려다 말고 다시 와르르 흩어졌다. 순식간에 밀려 나 벽에 등을 박은 산오에게서 둔탁한 소리가 났다. 새하얀 고치에 감싸인 것 같은 커다란 몸에게 이연이 다가섰다.
“도와주는 것까지는 기대도 안 하니까, 방해라도 하지 마.”
“……날 공격한 건가?”
조금 위에 있는 시선은 충격을 받은 것처럼 동공이 살짝 풀려 있었다.
“저 새끼 때문에?”
이연은 제 뒤에 있는 태진에게로 향하는 시선을 차단하듯이 산오의 앞에 바짝 붙어섰다. 연기의 연장선이기도 했지만, 산오의 낯빛을 보니 진짜로 홧김에 태진을 죽일 것 같았던 것이다.
“삼촌 죽이면 가만 안 둬.”
적대적이고 경계가 서린 목소리. 처음 듣는 톤에 산오는 확연히 동요했다. 악문 턱에 힘이 들어가다 못해 핏줄이 돋았다. 이연은 애써 그 모습을 못 본 척 하며 말을 이었다.
“아니, 그냥 너 제산으로 돌아가는 게 낫겠다.”
“…….”
“어차피 네 억지로 시작된 거잖아. 이 정도면 어릴 적 친구 재회는 찐하게 하지 않았어? 엄한 곳에서 시간 낭비는 그만해. 예전으로 돌아가자. 다들 그걸 바랄 거야.”
이연이 또박또박 각인하듯 말했다.
“이제 그만 네 삶을 살아.”
정적이 흘렀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침묵의 온도는 아찔할 정도로 낮았다.
그러나 이연을 뚫어질 것처럼 노려보던 시선의 힘이 점점 약해졌다. 잔뜩 일그러진 채로 끝이 치켜 올라간 눈썹이 제자리로 돌아오고, 새파랗게 빛나던 눈동자가 점점 어두워졌다. 마치 거세게 타올랐던 불꽃이 서서히 꺼져가는 과정을 보는 것 같았다. 이연은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내내 산오를 응시했다.
“멍청한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한참 후 새어 나온 것은 질렸다는 듯한 중얼거림이었다.
“네 마음대로 해. 어디 가서 뒈지든 말든.”
그 말과 함께 산오는 가볍게 팔을 휘둘렀다. 그를 구속하고 있던 하얀 모래는 언제 그랬냐는 듯 가볍게 스러졌다.
그리고 눈을 한 번 깜빡인 다음 순간, 산오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복도는 텅 빈 채로 싸늘한 한기만 풍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