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무슨 연기를 이렇게 잘해? 배우 해도 되겠다. 남 말할 주제도 되지 않으면서 이연이 풀 죽은 얼굴로 뒤늦게 중얼거렸다. ……설마 진심이 담긴 건 아니겠지? 이연을 버리고 떠날 때에 정말 저럴 것 같아서 벌써 우울해졌다. 그런 그의 모습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태진이 뒤에서 어깨를 살며시 두드렸다.
“정연아, 괜찮니?”
“……지금은 정이연이에요.”
힘이 빠진 목소리와 함께 몸을 돌리자, 묘한 얼굴의 태진이 보였다.
“네가 이 정도로 진지한 줄은 몰랐는걸.”
“삼촌 찾아온 거 보면 모르겠어요? 제가 설마 삼촌을 좋아해서 온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목소리가 절로 뾰족해졌으나, 방금 산오와의 대화가 있었으니 이정도 날카로움은 대충 넘어가질 것이다. 이런 것까지 숨길 생각은 없었다. 이연이 피곤하다는 듯 마른세수를 했다.
이연은 태진을 잡은 후로 한 번도 그를 찾아간 적이 없었다. 잡아서 넘겼으니 완전히 끝난 일이라고 생각했다. 딱히 흥미로운 주제도 아니었고. 그저 나중에 무슨 처벌을 받았는지 확인하면 끝인 문제였다.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아마 평생 볼 일 없었을 터였다. 태진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 테고.
“제산오가 자꾸 이런 식으로 찾아오면 저도 곤란해져요. ……이게 맞는 방법이에요.”
“하지만 너도 영웅이 되고 싶어 했잖니.”
태진은 아주 어릴 적 했던 말을 용케 기억하고 있었다. 이연이 흐리게 웃었다.
“사람한테는 각자의 자리가 있는 법이니까요. 저희는 다른 방식으로 도시에 기여를 할 뿐이죠.”
“……그래.”
조금 멍한 음성으로 대답하는 태진의 목소리는 다음 순간 힘이 들어갔다.
“그렇지.”
*
“제산으로 돌아가는 게 나아?”
“…….”
그날 저녁 집에 돌아가자, 삐딱한 얼굴의 산오가 소파에 늠름한 기세로 앉아 있었다. 팔짱을 끼고 이연을 노려보는 폼이 꼭 골이 난 어린아이 같았다.
“연기한 건데 그걸로 물고 늘어지기 있어?”
이연이 입을 삐죽이며 다가갔다. 거실 한구석에 웅크려 있던 뭉치가 이연의 동선을 따라 꼬리를 살랑이며 따라왔다.
“진심이 담겨 있던데.”
“초능력 없었으면 배우 할 상이었나 보지.”
투덜거리며 산오의 옆에 앉자, 뭉치 역시 소파로 냉큼 뛰어올라 이연의 다리 사이에 파고들어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산오는 여전히 표정과 자세를 풀지 않고 자연스럽게 붙어 앉는 이연을 빤히 노려보았다. 진짜 이러기냐. 이연이 뭉치를 쓰다듬어 주며 반격하듯 새침하게 중얼거렸다.
“어디 가서 뒈지든 말든 신경 안 쓰기로 한 인간이 왜 이럴까.”
이건 어차피 계속해 봤자 상처만 남는 싸움이었다. 둘 다 진심도 아니었고……. 이연도 당시에는 코앞에서 본 파괴력에 조금 주춤했으나, 집에 돌아갈 때 즈음에는 전부 잊었다. 돌아가라느니, 상관없다느니 하는 것은 역으로 그렇지 않기 때문에 내뱉은 말들이다. 산오가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니 현재 산오의 행동은 알면서도 투정을 부리는 것이었다. 거짓으로 내뱉은 말들조차 서운해서 시위하는 거였다.
누구 남자 친구가 이렇게 귀엽냐? 이연은 웃음을 꾹 눌러 삼키고는 상체를 기울여 산오에게 들러붙었다.
“나한테 꼭 붙어 있어. 안 그러면 제산 로비에서 제산오 내놓으라고 드러누울 거니까.”
산오는 그제야 단단히 끼고 있던 팔짱을 스륵 풀었다. 벌어지는 품 사이로 이연이 파고들자, 산오의 팔이 자연스레 이연을 끌어당겼다. 아직 마음이 전부 풀린 것은 아닌지 불퉁한 목소리가 머리 위로 떨어졌다.
“네 방법은 별로다.”
“왜, 제법 효과 있는 것 같던데.”
두 사람이 싸운 척한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태진에게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이연의 뒤에 산오가 있다는 인상을 무너트리고 둘의 사이가 완전히 틀어진 것 같게끔. 태진과 이연이 무슨 짓을 해도 산오가 거들떠도 보지 않을 것처럼 느껴지게끔. 싸웠다는 단순한 말 전달으로는 쉽게 믿지 않는 경계심 많은 인간도 확실하게 믿을 수 있도록.
그래야 태진이 본색을 드러낼 테고, 행동의 꼬리를 밟기도 쉬워질 테니까.
“다음엔 이딴 데에 협조하지 않겠어.”
뚱하게 대꾸한 산오가 이연의 어깨를 감싸 쥐고 뒤로 젖히자 두 사람의 몸이 크게 휘청이며 소파 등받이에 파묻혔다. 무릎 위에 얌전히 앉아 있던 뭉치가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화들짝 놀라 피하는 틈을 타 산오는 기회를 노렸다는 듯 이연을 완전히 끌어안았다. 이연이 넉넉한 품 안으로 고개를 파묻었다. 익숙한 안정감이다.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런 일이 또 있으면 그것도 문제지.”
산오는 대답 없이 이연의 정수리에 입술을 댔다. 은근하게 닿아 오는 무게감이 편안했다. 이연은 천천히 몸에 힘을 뺐다. 머리 꼭대기에 있던 입술이 이마를 타고 코를 지나 입술로 내려오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런 부분이, 신혼부부 같다니까.
*
태진과의 만남은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진행되었다. 그렇게 한 달이 흘렀으니 벌써 기력 추출도 네 번째인 셈이었다.
그는 여전히 친절하게 이연을 대했고, 추출하는 기력량도 처음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쯤 되니 이연도 태진이 정말로 개과천선한 건가 싶어 헷갈릴 정도였다.
“자, 이걸로 끝.”
체온으로 데워진 전극이 떨어지는 감각도 이제 익숙했다. 이연은 걷었던 소매를 내리며 기계를 정리하는 태진을 흘끗였다.
“……혹시 제산오가 삼촌을 찾아오거나 하진 않았죠?”
“응?”
의외의 질문이었는지 태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빙긋 웃었다.
“아아, 아니. 3호가 날 찾아온 적은 한 번도 없어. 네가 잘 말해 준 덕이지.”
산오가 태진을 찾아가지 않았다는 것은 같이 살고 있는 이연이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물어본 것은 화제의 물꼬를 트기 위함이었다.
“다행이네요. ……그렇게까지 말했으니까 다시 오진 않겠죠.”
“뭐……. 그 녀석이 질척거리는 성격은 아니니까.”
아니긴. 산오는 손이라도 잠깐 댈라치면 사납게 노려보며 손가락을 잘라 버릴 것처럼 생겨 놓고 은근히 사람을 끌어다 제 살갗을 비비는 걸 좋아했다. 오늘 침대에서도 한참 뽀뽀한다고 안 놔 주느라 이연은 사무실에 지각할 뻔했다. 지각이라고 해 봤자 그 시간대 출근자는 이연밖에 없어서 아무도 몰랐지만…….
“제가 너무 심하게 말한 걸까요?”
이연이 중얼거리자, 태진은 책상 위 서류를 정리하던 행동을 멈추고 이연의 곁으로 다가왔다. 의자에 그대로 앉아 있던 이연의 머리 위로 넉넉한 손길이 닿았다.
“3호는 나랑 같은 인간이야.”
아니, 왜 갑자기 그렇게 심한 욕을……. 이연은 순간적으로 발끈하려던 마음을 간신히 진정시켰다. 이연이 가만히 있자, 태진이 말을 이었다.
“목표가 뚜렷하고 계산이 빠르지. 아마 그 녀석은 네 곁에 있는 게 의미가 없다고 판단해서 간 거야.”
“……그게 위로예요?”
“하하.”
태진에게는 착하고 말 잘 듣던 열네 살 정연의 인상이 어지간히 깊게 박힌 모양인지, 이연이 이런 식으로 까칠하게 대꾸할 때마다 웃곤 했다. 가볍게 웃음을 터트린 태진이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내 말은, 그때 네가 말을 친절하게 했어도 그 녀석의 행동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 거라는 뜻이지. 너는 그 녀석 대신 나를 선택했잖니. 사실 그거 하나면 3호가 마음을 굳히는 데에는 충분했을 거야.”
“무슨 마음이요?”
“정연아, 3호는 너와 다르다니까.”
태진의 입가에는 아직도 웃음이 걸려 있었다.
“3호에게는 미련이 없어. 자기가 걷는 길을 돌아보지 않거든. 넌 3호에게 이미 과거의 사람이 된 거야.”
분위기가 순식간에 냉각되었다. 이연은 태진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무슨 의미로 해석한 건지 태진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넌 형을 닮았어.”
그 순간 이연은 정말로 움찔했다. 태진이 제 형, 그러니까 아버지를 입에 담는 것은 다시 만난 이후로 처음이었다. 묘한 불안감이 엄습했다. 이연이 긴장하며 태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형은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봐. 멈춰 서서 다른 사람들을 살폈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웃고 있던 태진의 얼굴은 어느새 표정이 사라져 있었다.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을 하는지 읽어 낼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그 꼴이 났고.”
“아버지를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이연이 반사적으로 대꾸했다. 어느 누구도 아버지를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됐다. 눌러 두고 있던 적대감이 불꽃처럼 일어났다. 태진은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이연과 오랜 시간 눈을 마주했다. 진득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긴 시간 끝에, 이연은 무기질적인 눈동자 속에서 아주 옅게 쌓여 있는 그리움을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