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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킹 1위를 임시 보호 중입니다 (225)화 (225/250)

#225

그러니 진덕선과의 접촉은 이전의 위상을 조금이라도 회복하기 위한 그 나름의 발버둥이었다. 진덕선 외에도 가문 내의 다른 혈연들과 접촉했다는 보고 역시 벌써 여럿이었다.

진덕선은 진정원이 저질렀던 일의 최대 피해자 중 하나였으므로 협조를 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을 터였다. 게다가 그녀가 이연의 가까운 지인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세 명의 연결고리는 놀랍지도 않았다.

그러나.

“공생도 사람 봐 가면서 해야지.”

[네?]

“아무것도 아닙니다.”

태진이 가볍게 웃으며 흘려 넘겼다. 이연이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감히 그렇게 허술한 계획으로 속이려고 하다니. 이연이 생각할 수 있는 건 태진 역시 생각할 수 있었다. 아무리 고분고분하게 굴려고 노력해도, 눈에 담긴 반항심은 지우지 못했다. 그걸 못 본 척 속아 주는 것도 고역이었다.

게다가 그 돼먹지도 않은 계획의 파훼법은 또 얼마나 쉬운가. 두 사람의 계획은 이연이 멀쩡하게 나돌아다닐 수 있을 때에나 실현 가능한 것이었다. 지금처럼 이연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면, 희수 역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애초에 세력에 특별한 흠집을 내지 않는 이상 정원과 희수는 상대도 되지 않는 체급이었다. 지하 연구실의 자료를 내밀어도 정원이 아무런 타격을 입지 않았을 때 충분히 깨달았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뭐, 이제 정말로 깨닫게 되겠지. 태진이 어깨를 으쓱였다.

진희수는 만약 이연이 납치되었다는 걸 알게 되어도, 아무것도 못 한다.

진덕선은 원래 사업가가 아니다. 처음 걷는 길이니만큼 무수한 시행착오를 겪을 것이다. 그러니 그녀의 자본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다. 적어도 그녀의 사업이 출범해서 성공할 수 있을 정도의 기간. 회사가 안정되어 다른 일에도 신경을 쏟을 여유가 생길 정도의 기간.

그러나 감히 판을 뒤집기 위해 손을 뻗는 애송이들을 그렇게까지 봐줄 생각은 없었다.

현재 희수가 당장 운용할 수 있는 인력은 대부분 가문의 손아귀 안이었다. 초능력관리청 내의 권력도 명예도 모두 남이 쥐여 준 것이었다. 그는 태진이 이태민이라는 이름으로 언론에 등장해도 입 한번 벙긋하지조차 못했다. 희수의 뒤에 있던 힘이 그대로 태진의 뒤로 옮겨 갔으므로.

그런 상황이니, 희수가 그나마 가문을 거치지 않고 이용할 수 있는 힘이라고 해 봐야 딱 하나.

“타깃은?”

제산오.

솔직히 이리저리 떠돌던 제산오를 진희수가 후견인으로 키웠다는 우연은 좀 황당했다. 워낙 정이 없는 놈이니 그런 것에 크게 연연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빚을 갚는다는 개념인지 산오는 종종 희수의 말을 들어주는 듯 했다. 그나마도 모든 일을 도와주는 건 또 아니었다. 그건 제산오다웠다.

[독일 쪽에서 진행되었던 임무는 공식적으로 4일 전에 종료되었습니다. 그런데 귀국 기록은 아직 없고, 한국 내에서 따로 발견된 정황도 없습니다. 비서들과의 접촉 역시 전무합니다. 비서진의 경계심이 워낙 높고, 타깃의 능력이 이쪽을 훨씬 상회하는 만큼 저희가 발견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고 생각하셔도 무방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연과 산오의 단절에 그렇게나 신경을 쓴 거였다.

산오가 내린 이연의 최종 평가는 두 사람이 싸우고 떠나기 전 보인 싸늘한 눈빛을 보면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멍청할 정도로 무모한 부나방. 그나마 남아 있던 조금의 호감까지 모조리 말라 버린 것 같은 경멸.

제 손을 뿌리치는 사람을 굳이 붙들고 늘어질 정도로 제산오는 정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태진은 당연히 그때 등을 돌린 그대로 두 사람은 다시 만나지 못할 거라고 예상했으나, 이연은 산오가 그렇게까지 단호하게 내쳐 버릴 줄은 상상도 못 했던 듯했다.

‘그럼, 제산오랑은 그게 정말로 끝인 거예요?’

그 질문은 너무 순진해서 어이가 없기까지 했다. 절로 나오는 헛웃음을 가리기 위해 태진은 턱을 쓰다듬었다.

아무튼 계획대로였다. 제산오는 설령 진희수에게서 요청이 온다고 해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진희수는 아무것도 못 하고, 정이연은 영원히 잠들었으며, 진정원은 수면 위로 올라온 이태진을 제 공개적인 우군으로 만들고 싶어 했다.

그리고 태진 역시 제 앞에 줄줄이 놓인 명예를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변동 사항 생기면 연락 주세요.”

[알겠습니다.]

통신을 끊은 태진이 왼쪽 소매를 슬쩍 걷었다. 손목에 둘러진 동그란 액정이 달린 시계는 일견 평범한 액세서리 같아 보였다. 액정 옆에 붙어 있는 버튼을 누르자, 까맣게 죽어 있던 화면에 반짝 불이 들어왔다.

액정 안에 가득 들어찬 것은 너른 방 안의 풍경이었다. 1인용 침대와 그 주변을 둘러싼 기계들. 정중앙에 미동 없이 누워 있는 청년. 움직이는 거라곤 아무것도 없는 정적인 화면을 태진은 재미난 TV 프로그램이라도 되는 것처럼 계속 들여다보았다.

이연을 이곳으로 옮긴 후 가장 먼저 한 일이 그 방에 감시 카메라를 설치해 워치와 연결한 거였다. 태진은 습관적으로 시간을 확인하듯 제 손목을 들어 바뀔 리 없는 그 장면을 다시 확인하곤 했다. 대제국의 황제가 제 보물 창고를 수시로 들여다보는 것처럼.

문득 태진이 피식 웃었다. 만에 하나, 그의 예상을 깨고 제산오가 뒤늦게 정이연을 찾으려고 해도 쉽게 발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연이 있는 곳은 상공 20,000미터 위를 떠다니는 거대한 부유형 저택. 스텔스 기능을 탑재해 육안은 물론이고 레이더로도 탐지할 수 없었다. 오로지 순간 이동으로만 내부 입장이 가능하며, 정확한 좌표는 태진만이 알고 있었다.

절대로 대지에 착륙하지 않는 하늘섬. 땅을 밟아야 힘을 사용할 수 있는 남자를 상대로 이보다 좋은 대피소는 없었다.

완전한 해피 엔딩이다. 태진이 액정을 두드려 화면을 껐다. 검은색으로 죽은 액정은 손쉽게 소매 아래로 깊숙이 감춰졌다.

*

“이대로도 괜찮겠습니까?”

소파는 넓은 거실에 걸맞게 대단히 컸다. 둔한 광택이 도는 어두운색의 가죽 시트는 크기만큼 웅장한 느낌이 강해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면 꽤 장관이었을 터였다. 거실 벽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강물 그림의 배경과 어우러져 어떤 명화처럼 보였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열 명도 더 둘러앉을 수 있는 소파에 앉은 것은 고작 서넛 정도로, 그나마도 상석을 중심으로 옹기종기 붙어 있었다. 상석에 자리한 여자에게서 가장 가까이 앉은 중년 남성이 답답하다는 듯 재차 입을 열었다. 주위가 온통 조용해 유독 목소리가 크게 들렸다.

“누님, 그냥 희수를 다시 불러들이시죠.”

그 말에 상석의 여자, 진정원이 얼굴을 움찔 굳혔다. 순식간에 매서워진 눈매가 한기를 내뿜었다.

“제 발로 나간 걸 다시 앉혀 놓는다고 모든 일이 해결될 것 같니?”

그녀의 아들인 진희수가 분가해 버린 지도 벌써 몇 주째였다. 나이도 먹을 대로 먹은 자식이니 이제 와서 따로 산다고 해서 놀라울 건 없지만, 문제는 그가 원만히 나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균열은 세미와 세은의 일을 알게 되었을 때부터 생겨났고, 미래의 일이 도화선이 되었다. 희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몇 번이고 화를 내다가 떠나 버렸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가문 유일의 무궁화 5단이 그녀에게서 등을 돌려 버린 거였다.

“그럼 어쩌시려고요? 희수가 별채에 없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다들 하루가 멀다 하고 본가에 드나들잖아요. 뭐라도 얻어먹으려고!”

“목소리 낮춰. 지금 누구한테 언성을 높이는 거야?”

“……죄송합니다.”

날카로운 어조에 남자가 찔끔하며 고개를 숙였다. 정원이 찌푸려진 미간을 꾹 누르며 눈을 감았다.

“이미 정기 녀석이 무슨 냄새를 맡은 건지 가문 계좌 내역을 공개하라며 성화입니다. 막는 데에도 한계가 있어서, 이대로 가면 다른 식솔들도 상황을 파악할 겁니다.”

차분한 어조로 말을 건넨 것은 반대편에 있던 남자였다. 그는 심기가 불편한 정원의 낯을 살피며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일단 임시로라도 어떻게든 수습해서…….”

“임시로, 어떻게?”

정원이 눈을 떴다. 예리하게 반짝이는 눈동자는 신경질을 담고 있었다.

“그 많은 돈을 임시로 수습할 방법이 있긴 해? 지금 나더러 사채라도 쓰란 말이야?”

본디 연구라는 것이 그럴듯한 결과가 나오기 위해서는 많은 자본과 시간을 쏟아부어야 하는 종류였다. 고작 하급 변이종 몇 마리 관찰하는 조그마한 연구도 그럴진대, 본채 지하에 있던 거대한 연구실의 주인이 원하는 연구를 하기 위해서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가 요구하는 것 하나하나가 웬만한 자본가도 난색을 표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금액이 들어갔다. 드높은 명성을 쌓은 이에게도 그정도는 쉽게 지원하기 힘들진대, 어디서 굴러먹다 떨어진 건지 알 수 없는 불법 연구자에게는 말할 것도 없었다. 실제로 태진이 정원에게 왔을 때는 이미 여기저기서 거절을 당하고 온 상태였다.

그러나 정원은 알았다. 태진의 기술과 능력은 진짜였다.

“하지만 그 많은 금액을 어떻게 메꾸려고요. 이미 감당하기 힘들 정도지 않습니까!”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

“누님.”

왜냐하면 그는 지형 설정 기능의 개발자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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