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
지형 설정 기능을 만들었다는 개발자가 사라지기 전, 정원은 몇 번 그의 얼굴을 본 적이 있었다. 명문가의 수장인 정원은 초능력관리청에 연줄이 여럿 있었다. 아무리 외부인과의 접촉을 극도로 꺼려하는 신비주의 천재 개발자라고 할지라도 얼굴을 확인하는 것쯤이야 그녀에게는 일도 아니었다.
그리고 어느 날 그가 잠적했고, 비밀리에 정원을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저는 초능력자를 만들 줄 압니다.’
이 얼마나 꿈같은 문장인가.
확신이 있다면 투자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래서 정원은 태진과 계약을 맺었다. 그가 원하는 연구를 지원해 주는 대신, 그녀가 원하는 기술을 제공받기로. 자취를 감춰 버린 남자가 도시의 심장부에 있는 땅 아래에서 호화로운 연구를 한다는 사실은 그녀 외에는 아무도 몰랐다.
두 사람은 꽤 괜찮은 공생 관계였다. 태진이 만들어 낸 것들은 정원에게 유용하게 쓰였고, 초기 투자금 역시 적잖게 회수할 수 있었다. 한번 성과를 맛본 정원은 재투자 역시 아끼지 않았다. 어차피 연구실을 오래 굴리면 굴릴수록 부가 쌓이는 구조였다. 금덩이를 지하에 숨겨 두고 있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금덩이를 잔뜩 품은 지하가 폭발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되새기기도 끔찍한 사고의 범인은 금방 밝혀졌다. 늪에 잠겨 버린 것처럼 모조리 사라진 자료들은 한 남자의 손에 들어가 있었다.
제산오.
대체 어디서, 어떻게 그가 연관된 건지 알지도 못했다. 자연재해 같은 남자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었다. 거대한 연구실도, 방대한 연구 자료도, 그 안에 들어앉아 있던 이태진과 그의 딸들조차도.
아니, 그건 오히려 다행이었다. 연구실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덕분에 금으로 쓰인 데이터들과 더불어 태진의 연구실이 정원의 집 지하에 있었다는 사실까지도 전부 유실되어 버렸으니까. 증거가 없으니 추궁할 수도 없었다. 정원은 구사일생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라고 생각했으나.
‘어머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다음 날 희수가 그녀를 찾아왔다. 건방진 피후견인이 가져다줬을 자료를 바리바리 싸 들고.
정원은 미래의 거취를 걸고 희수와 협상하며,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희수는 그녀가 하는 일을 단 하나도 이해할 생각이 없을뿐더러, 심지어 그만두길 원했다. 어떤 것을 들이밀어도 그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그렇다면 곁에 두는 것보다 두지 않는 것이 이득이다. 정원은 결심을 굳혔다. 이제까지 소소하게 방해되지 않도록 정보를 차단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태세였다. 정원은 희수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무궁화 5단인 자랑스러운 아들. 항상 순종적이고 얌전한 아들. 그녀의 가장 커다란 트로피를 포기하는 것은 실로 뼈아팠으나, 정원은 망설이지 않았다. 희수는 이미 독배였다.
진씨 가문은 초호시를 만들어 낸 개국공신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초호시가 변이종 방어 도시로 기능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강력한 발언권을 가지고 있었고, 초대 초능력관리청장 배출이라는 역사적인 업적을 바탕으로 강력한 커넥션을 구축했다.
특히 가문의 가주는 초능력관리청을 포함한 초호시의 모든 공식 행사에 초대되는 것은 물론이고, 설령 무궁화 5단과 함께 있어도 순위가 밀리지 않았다. 초능력만 없다 뿐이지 도시의 최정점이라고 평가받는 무궁화 5단과 거의 다를 바가 없는 사회적 지위인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제 아들을 그토록 쉽게 버릴 수 있었다.
“요즘 소문이 돕니다.”
남자가 정원에게 내민 것은 갈색 서류 봉투였다. 그 안에는 사진 몇 장이 들어 있었다. 정원도 익히 알고 있는 얼굴들이 즐비했다.
“희수가 제 사촌들에게 접촉하고 있더군요. 그래 봤자 애들이니 뭘 하겠냐 싶습니다만…….”
물론 정원과 희수는 달랐다. 정원의 권력이 지위로부터 온다면, 희수의 것은 제 일신상의 능력에서 오는 권력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그녀와 달리 진짜 무궁화 5단이지 않은가. 가주 자리에서 밀려나면 끝인 정원과는 토대가 달랐다.
그렇기 때문에 정원은 희수에게 가문의 지지가 쏠리지 않도록 조절하기 위해 아주 오래전부터 의도적으로 바깥, 즉 초능력관리청으로 집어넣었다. 그러나 무궁화 5단은 그녀의 집안에서 가지는 의미가 유독 큰 탓에, 본인에게 큰 힘을 주지 않으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상징적인 존재감이 생겼다.
그건 정원에게 이제까지 호재로 작용했지만, 희수와 사이가 틀어진 지금은 고스란히 악재로 돌아왔다.
가장 우수한 자식을 낳았다는 명분이 그녀의 가주 자리에 적지 않은 힘을 실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희수의 분가는 다른 형제들이 기어오를 빌미를 주는 꼴이었다. 정원이 이제까지 공고하게 지켜 오던 권력 구도에 균열이 생긴 것이다.
상식적으로, 희수는 본가에서 떨어져 나왔으니 이제 제 할 일만 하면 됐다. 번듯한 직업이 있지 않은가. 도시 공공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직분이. 정원 역시 희수가 업무에 집중할 수 있도록 응원하기 위해 힘을 잔뜩 실어 준 참이었다.
그녀가 얹어 준 일을 하려면 24시간 내내 서류만 들여다봐도 모자랄 텐데 진씨 일가, 그것도 제 또래로만 골라 자주 만남을 가진다는 사실은 퍽 수상한 일이긴 했다. 마뜩잖은 얼굴로 사진을 흘끗 흘겨본 정원이 툭 던졌다.
“오빠랑 정기한테 애들 단속 좀 잘하라고 해. 어디 낄 데가 없어서…….”
정원은 물론이고 현재 정원의 주변에 둘러앉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녀의 세대, 혹은 그 바로 윗세대였다. 그들에게 희수를 포함한 아랫세대는 아직 한참 어린아이였다. 살아온 연륜으로나, 집안 내 입지로나.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들이 낄 판이 아니었다.
“제산오는 어쩌시게요? 희수 녀석한테 제산오가 붙으면 골치 아파집니다.”
“붙으려면 진작에 붙었어야지. 그 녀석이 제산오 주워다 기른 게 몇 년 전인데.”
산오가 본가 지하를 습격한 것에 대해서 희수는 몰랐거나 뒤늦게 알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희수가 정원에게 협상하러 왔을 때, 그는 철저히 연구 자료에 대한 것만 내밀었다. 일의 자세한 내막을 모른다는 뜻이었다.
제산오가 불법 연구자라면 치를 떤다는 사실은 과장 보태 전국민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아마 태진에 대한 실마리를 잡은 것도 희수 쪽이 아니라 다른 곳일 터였다.
제산오에 대해서는 정원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유일하게 주의하는 희수의 주변 인물이 그였으므로 당연했다. 희수는 본인이 무궁화 5단인 만큼 타 5단과도 교류는 있었지만, 막역한 사이는 아니었다. 그것은 대부분 나름의 세력이 있는 무궁화 5단과 필요 이상 긴밀하게 지내지 않겠다는 공직자적인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자발적 고립이었다.
그러나 제산오는 달랐다. 어렸을 적 주워서 얼결에 후견까지 맡았더니 우연히 무궁화 5단이었던 진희수의 복권. 제산오는 철저히 혼자 움직이는 인간이었고, 따르는 사람은 있을지언정 나서서 엮일 만한 곳은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 그의 회사라고 알려진 제산조차 실제로는 전혀 관련점이 없었다.
위의 이유들로 제산오는 희수가 정치적인 생각을 하지 않고 함께 지내도 괜찮다고 판단한 유일한 무궁화 5단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어느 정도 친분을 유지했다. 물론 제산오의 성격상 충성이나 유대가 오가는 관계는 아니었고, 타인과 비교해 봐도 단순 지인 이상의 친밀도라고 보기 어려웠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게 희수의 가장 밀접한 인맥인 동시에 산오의 가장 밀접한 인맥이었다.
‘어느 정도 친분’으로도 제산오는 충분히 위협적인 존재였다. 희수에게 산오가 함께 한다면 정원도 쉬이 무시할 수는 없었다.
“뭐,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는 말게.”
지금 상황으로는.
“무슨…… 방법이 있으십니까?”
정원이 느긋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손에 쥐고 있던 서류 봉투가 바스락, 하는 소리와 함께 테이블에 놓였다.
“이 사람 좀 봐. 그런 것도 없어서야 이 커다란 집안 이끌 수 있겠는가?”
무궁화 5단이 빠졌으니, 무궁화 5단으로 채워야 수지가 맞았다.
마침 그녀가 손바닥에 올릴 수 있을 만한 예비 무궁화 5단이 하나 더 있지 않은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즉시 정원은 구금되어 있는 태진에게 방문했다. 두 사람의 이해는 다시 한번 일치했다.
다만 태진이 새롭게 요구한 것은 그녀로서도 다소 부담되는 일이었다.
그는 아주 거대한 감옥을 원했다.
태진의 표현에 따르면 새로운 연구실이었지만, 그건 감옥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태진 본인 외에는 아무도 찾을 수도, 갈 수도 없는 하늘 위의 섬.
온갖 공을 들였던 지하 연구실이 폭삭 망해 버린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그 상황에서 그의 요구를 들어주려면 제아무리 정원이어도 제법 무리를 해야 했다.
그러나 그런 것쯤은 새로운 무궁화 5단이 제 옆에 생긴다면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었다. 이건 투자였다. 계산을 마친 욕심만큼 그녀의 집안이 축적해 둔 재산이 비워졌다.
“다 안배해 둔 바가 있지.”
정원이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모든 일이 조금만 순차적으로 일어났어도 이따위 영양가 없는 대화를 할 필요는 없었다. 재수 없게 한 번에 터진 것뿐이었다.
뒤집어 말하면 결국은 시간문제다. 전부 해결할 수 있었다.
“적공저지일 행사만 지나면, 다들 시답잖은 요구는 하지도 못하게 될 거야.”
승리자는 언제나 자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