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킹 1위를 임시 보호 중입니다 (230)화 (230/250)

#230

성찬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입장했다. 북적이는 홀 안에 얼굴이 익은 헌터가 여럿이었다. 샴페인을 홀짝이며 구경하던 희수는 저 멀리서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를 알아본 여자가 주변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는 듯하더니 빠져나와 이쪽으로 오는 것이 보였다. 희수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김유정 씨. 오랜만입니다.”

“국장님이 웬일로 이렇게 한가하게 숨어 있어요? 늘 인기 많아서 근처에 가지도 못하겠던데.”

웃음과 함께 농담을 건넨 여자가 씩 웃었다. 시원한 입매가 우아하게 호선을 그렸다.

솔직히 그녀가 할 말은 아니었다. 조금 전까지 여자를 둘러싸고 있던 무리는 대강 어림잡아도 예닐곱은 훨씬 넘었다. 그 정도면 대화하기 위해 번호표를 뽑고 기다려야 하는 수준이었다. 물론 그녀의 정체를 안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사 한마디라도 나누기 위해 기꺼이 주변을 서성일 터였다.

국내 랭킹 3위, 중력 조절 능력자 김유정. 모 포털 사이트에서 시행하는 투표인 ‘가장 동경하는 초능력자’ 1위 자리를 3년 내내 지키고 있는, 명실상부한 만인의 롤 모델이었다.

“김유정 씨야말로 다른 분들과 이야기하다 말고 이렇게 와도 괜찮습니까.”

희수의 말에 유정이 호탕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시원시원하고 쾌활한 성격은 그녀의 인기 요인 중 하나였다.

“국장님이랑 대화할 기회를 놓칠 수는 없죠. 요즘 초관청에 가도 얼굴 보기 힘들잖아요.”

“김유정 씨라면 비서가 시간을 어떻게든 비웠을 텐데요.”

그 말은 진심이었다. 만일 유정이 희수를 만나고자 했다면 희수는 없는 시간을 어떻게든 짜냈을 것이다. 무궁화 5단과의 일대일 면담은 어쩌면 정말로 심각한 문제일 수도 있었으므로.

농담조차도 진지하게 답하는 게 유정은 퍽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희수의 어깨를 두드렸다.

“에이, 국장님의 죄 없는 비서분들을 울릴 수는 없지. 적공저지일 행사 때마다 만나는 걸로도 충분합니다.”

유정은 무궁화 5단치고 성실한 편이었는데, 특히 초전력이나 적공저지일 같은 중요 행사는 급한 임무가 없다면 대부분 참석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별일 없어도 1년에 두세 번씩은 꼬박꼬박 간단한 안부를 나눌 수 있었다.

“오늘 초전력 때나 볼 수 있는 귀한 얼굴들이 엄청나게 납셨던데요. 성찬이도 있고, 민이도 왔고……. 태빈이는 미국이라서 못 온다고 했지만, 제희 언니는 늦는 한이 있어도 꼭 올 거라던데?”

“박성찬 씨는 조금 전에 봤습니다. 허민 씨가 이미 오신 건 몰랐군요.”

랭킹 5위인 허민은 수줍음이 많아 공식 석상에 나오는 것을 매우 부담스러워했다. 산오와는 다른 의미의 두문불출인이었다. 유정이 어깨를 으쓱였다.

“성격상 어디 숨어 있거나 하겠죠. 어차피 걔 얼굴 아는 사람도 거의 없을 거고……. 그래도 모처럼 외출한 거니까 이따 밥이나 같이 먹기로 했어요. 오면 나한테 인사하라니까 아주 죽어도 안 해.”

유정은 그렇게 투덜거렸으나 큰 기대는 없는 듯했다. 사람이 많은 곳에 가는 것도 꺼리는데 아예 주변에 사람을 구름처럼 몰고 다니는 유정에게 행사 중에 다가갈 리가 만무했다.

“허민 씨는 낯을 많이 가리시니까요.”

두 사람이 이미 친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희수는 심상하게 대꾸했다. 유정은 그건 그래요, 하고 고개를 끄덕이다가 갑자기 눈빛을 바꿨다. 이미 성찬에게 비슷한 시선을 받았던 희수는 그녀가 다음에 할 말을 대강 예측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태민은 왔어요? 소개 좀 해 줘요.”

예상대로다.

“안 왔습니다.”

희수가 무뚝뚝하게 대답하자, 유정이 어디서 신입이 이렇게 늦게 다니냐며 가벼운 푸념을 내뱉었다. 나 때는 빠릿빠릿했다는 가벼운 농담 뒤에 은근슬쩍 본론이 흘러나왔다.

“여기서 이태민 얼굴 아는 거 진 선생님하고 국장님밖에 없는 것 같단 말이에요. 7년 전에도 얼굴 한 번 안 보여 주더니, 뭘 이렇게 사린대요? 궁금해 죽겠어.”

“어머니가 벼르고 있는 듯하니 곧 아실 수 있을 겁니다.”

그 말에 유정의 눈빛이 묘하게 변했다.

“오? 소문이 사실인가 보네?”

“무슨 소문 말입니까?”

“진 선생님이 이태민과 친하다는 소문이 있거든요.”

뉘앙스가 묘했다. 희수가 대답 없이 유정을 빤히 바라보자, 유정이 씩 웃으며 제가 들은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듣기로는 예전부터 아는 사이였다던데? 심사를 아직 안 받았으니 초능력자가 아닌 이태민은 여기 못 오는데도 참석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잖아요. 그거 출처가 진 선생님이더라고?”

사람들이 유정과 이야기를 하지 못해 안달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사람들에게 늘 파묻혀 있었다. 자연스럽게 유정은 온갖 정보를 알게 되었다. 그녀가 헌터 행사에 꼬박꼬박 참여하는 이유 중 하나기도 했다.

“그런데 진 선생님 성격이 좀 보수적이야? 야반도주한 공직 개발자를 초호시 개국공신 집안 가주님이 알고도 가만히 있으셨을 리가 있나. 그런데도 그런 소문이 날 정도로 챙겨 줄 이유가 있는 거지. 그래서 사람들이 말하기를…….”

유정의 표정이 장난스럽게 변했다. 목소리 크기를 확 낮춘 유정이 희수에게 속닥였다.

“진 국장님한테 형이 생길지도 모른답니다.”

도를 넘은 개소리에 순간적으로 희수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으나, 그는 수년간 단련된 사회인의 내공으로 버텨 냈다.

“어머니의 친분 관계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좀체 정보를 풀지 않는 희수가 얄미웠는지, 유정이 심술궂게 중얼거렸다.

“국장님도 알고 있잖아요. 국장님 집안이 고위 초능력자를 좀 좋아해? 아마 국장님이 여자였으면 이태민 씨랑 결혼시키려고 들었을걸?”

“……끔찍한 소리 마십시오.”

생각만 해도 싫었다. 희수의 낯이 창백해지자 유정이 그제야 깔깔 웃으며 화제를 돌려 주었다.

“그럼, 올해 특별 순서는 뭔지 알아요? 설마 이것도 모른다고 하진 않겠지. 주최 찬스 좀 써 줘요.”

안타까운 사실이지만 몰랐다. 희수가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요즘 바빠서 본가에 거의 가지도 못했습니다.”

“에이, 그래도 무슨 큰 비밀이라고 아들한테까지 숨겨? 어차피 조금 지나면 다 알게 될 텐데요. 아, 혹시 지금 나 속이는 거? 미리 알면 동네방네 떠들까 봐? 진 국장님, 섭섭하게 이러기예요? 내가 말하면 또 누구한테 말한다고.”

유정은 타인에게 쉽게 말하지 않겠지만, 지금 귀를 쫑긋 치켜세우고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는 이가 여럿이었으니 그가 입을 여는 즉시 모두에게 퍼져 나갈 것이다.

물론 입을 열 수도 없었다. 몰랐으니까. 희수가 괜스레 유정의 눈을 피해 홀 쪽을 훑었다. 적당히 그녀의 말에 장단을 맞춰 주는 것처럼. 예상대로 유정이 모른 체하지 말라며 종알댔으나, 희수는 꿋꿋하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가 무언가를 발견한 것은 우연이었다.

의미 없이 움직이던 눈동자가 고정되었다. 환한 조명을 받아 반짝이는 홍채에 막 입구에서 들어서는 남자가 비쳤다.

짙은 남색의 정장. 깔끔하게 넘긴 머리. 이렇게 꾸민 모습은 처음 보았지만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국장님?”

희수의 시선이 한곳에 못 박히자 옆에서 유정이 의아하게 물어 왔다. 희수는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네.”

티 내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눈치 빠른 유정은 벌써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그녀의 눈빛 역시 남자에게로 움직였다. 제기랄. 희수가 절로 찌푸려지는 인상을 펴기 위해 숨을 가다듬었다.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도 실제로 보니 그 뻔뻔함에 기가 찼다.

막 홀에 들어선 태진이 유유히 홀의 중앙을 건너며 샴페인을 한 잔 받아 들고 있었다.

마치 몇 번이나 와 본 것처럼 노련한 태도였다. 자연스러운 움직임에 따라 슬쩍슬쩍 당겨지는 소매 아래로 금속질의 무언가가 반짝이는 것이 언뜻 보였다.

그러다 몸을 돌린 희수와 태진의 눈이 마주쳤다. 시간이 얼어붙은 것 같은 감각 속에서 희수는 아주 오래 머물러 있었다.

시선을 떼지 않고 물끄러미 바라보던 태진이 불현듯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리고 그대로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저 남자군요?”

유정이 옆에서 소곤댔다. 이미 확신이 담겨 있는 음성이었다. 희수는 눈만 한두 번 깜빡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따 그의 어머니가 대대적으로 광고를 할 텐데 굳이 지금 숨길 이유는 없었다. 없는데…….

왜 이쪽으로 오지?

“안녕하세요, 진 국장님.”

희수가 당황하는 사이 태진은 그들의 앞에 도착했다.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까딱이는 모습은 퍽 정상인 같아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희수는 마지못해 인사했다. 사회인으로서 최소한의 예의였다.

“어머, 두 분 아는 사이?”

기회를 잡은 유정이 뻔한 질문으로 냉큼 끼어들었다. 안 그래도 아까부터 노골적으로 궁금해하던 사람이 제 발로 등장했는데, 그녀가 이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희수에게로 시선을 고정한 폼이 아주 명확한 의도를 내포하고 있었다. 희수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그를 소개했다.

“이미 이름은 들어 보셨을 겁니다. 이태, 민 씨입니다. 이쪽은 김유정 씨.”

“역시. 안녕하세요? 김유정이라고 해요.”

반색한 유정이 먼저 붙임성 있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태진 역시 선선히 손을 뻗어 가볍게 악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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