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
두 사람의 시선은 어느새 먼 곳으로 향해 있었다. 놀란 듯 눈매가 크게 벌어져 있는 상태였다. 뭘 보고 있는 거지? 희수가 의아하게 눈길의 끝을 좇았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미친…….”
유정의 목소리가 신음처럼 새어 나왔다. 어른을 앞에 두고 있다는 사실도 깜빡 잊은 듯 아연한 음성이었다.
희수는 가까스로 입을 다무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심정은 유정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둘 외에도 막 홀로 들어서는 사람을 알아본 몇몇이 눈을 찢어질 듯이 크게 뜨는 것이 보였다. 대부분 무궁화 5단, 혹은 일부 4단이었다.
커다란 덩치에 딱 맞는 검은 정장은 날렵한 맵시와 함께 묘한 광택이 흘렀다. 어깨에서부터 허리로 떨어지는 굴곡이나 다리를 휘감은 옷감의 태가 드라마에서 막 걸어 나온 배우처럼 비현실적이었으나, 가장 믿을 수 없는 것은 한번 보면 시선을 뗄 수 없는 얼굴이었다. 장인이 정성들여 깎은 것 같은 선명한 이목구비는 무감한 표정으로도 충분히 감탄을 불러일으킬 만큼 매끈했다.
그러나 그의 정체를 안다면 그럴싸하게 정돈한 외형쯤은 신경도 쓰이지 않을 터였다. 국내, 어쩌면 세계에서 가장 강한 인간. 초능력자가 된 이후부터 단 한 번도 가장 높은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은 헌터.
제산오가 입장하고 있었다.
희수는 본능적으로 태진의 상태를 확인했다. 태진은 일견 보기엔 멀쩡해 보였지만, 가까이 있던 사람들은 능히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아무래도 태진 역시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인 모양이었다.
당연했다. 같은 편—이 맞긴 하겠지?—인 희수조차 산오의 행차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쟤가 이런 데도 참여하던가요?”
그나마 산오와 밀접한 인물들도 이런 반응인데, 다른 사람들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한참 후에야 유정이 얼빠진 얼굴로 물었다. 그러나 정작 질문에 대답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가 멍하게 산오 쪽을 바라볼 뿐. 비서들이 대리 참석을 하면 했지, 산오가 이제까지 적공저지일 행사에 나타난 적은 없었다.
워낙 멀끔한 얼굴에 잘 차려입으면 태가 나는 인간이라, 그를 처음 보는 사람들 역시 흘끔대며 주목했다. 호기심이 이는지 슬금슬금 다가서려는 인물도 몇인가 보였지만 산오가 뿜어내는 살벌한 기세에 차마 말을 걸지는 못하고 주변에 서는 걸로 그쳤다.
“제 헌터가 나타날 줄이야.”
정원이 혼잣말하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그 말 한마디에 얼음땡을 한 것처럼 한껏 딱딱하던 분위기가 조금 풀렸다.
“이태민 씨 소식이 정말로 뜨겁긴 한 모양이에요. 저 녀석이 다 오네.”
그제야 표정을 가다듬은 유정이 따라서 고개를 주억였다. 산오의 얼굴이 이제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을 수 있는 이유. 그건 비서들의 수완이 훌륭해서도 있겠지만 공개적인 행사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가까이서 볼 기회가 없으니 같은 헌터들 역시 잘 모르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이렇게 한번 모습을 드러낸 이상, 오늘 행사에 온 헌터들은 귀가할 때 즈음엔 모두가 산오의 얼굴을 알게 될 것이다.
그건 앞으로 공개적으로 활동하겠다고 돌려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언론 노출이나 공식 석상에는 등장하지 않는다고 해도, 적어도 헌터들 사이에서는 제산오에 대한 것들이 알음알음 퍼져 나갈 것이다. 가뜩이나 한번 보면 쉽게 잊기도 힘든 얼굴이지 않은가. 오로지 태진을 보기 위해 그 모든 것을 감수한 거라면 그것도 나름대로 놀라웠다. 그 정도 의미라는 이야기였으니까.
그 사실을 아는 건지 무시하는 건지 성큼성큼 행사장 안으로 걸어들어온 산오는 만사 관심 없다는 심드렁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중에서 특히 눈에 띄는 희수의 무리를 발견하는 것은 금방이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내지른 눈빛이 태진에게 직통으로 닿았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는 것을 똑똑히 목격한 희수가 저도 모르게 손끝에 힘을 주었다. 이연이 현재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D.S의 말이 흐릿하게 스쳐 지나갔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니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을 앞에 둔 기분이었다. 최악의 경우 산오가 예고 없이 태진을 공격하려 들 수도 있었다. 성격상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고, 장소가 장소인 만큼 문제의 소지가 될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태진을 제가 보호하게 된 이 상황이 황당했으나 긴장을 늦출 수는 없었다. 희수가 다소 경직된 얼굴로 산오를 주의 깊게 살폈다.
그러나 산오는 태진을 흘깃 바라보는 듯싶더니 이내 시선을 돌렸다. 짜증은 나도 손을 쓸 생각까지는 없는 것 같았다. 아니, 그것을 넘어 아예 없는 사람 취급이었다. 태진을 마음에 들어 하는 건 아니었으나 산오는 노골적으로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지도, 공격하지도, 심지어 자리를 벗어나지도 않았다.
그건 정말로 다행이었다. 아무리 같은 무궁화 5단이라고 해도 산오가 작정하고 달려든다면 희수가 막기는 쉽지 않았다. 사람 하나 찍어서 해를 입히는 데에 걸리는 시간은 눈 한 번 깜빡이는 정도로 충분했다. 그 후에 저지당한다고 해도 이미 일어난 일은 돌이킬 수 없을 터였다.
희수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목과 어깨에 잔뜩 들어간 힘이 그제야 풀렸다.
그런데 다음 순간, 예상도 하지 못한 상황이 이어졌다.
“아, 제산오 헌터랑은 저도 이전에 인연이 좀 있습니다.”
희수는 진심으로 이 인간이 미친 게 아닌지에 대해 고찰해야 했다. 그가 이연에게 들은 바로, 태진과 산오의 관계는 이런 자리에서 뻔뻔하게 언급할 수 있을 만한 것이 못 되었다. 희수가 아연하게 태진을 바라보았으나 정작 그는 기묘한 표정으로 웃기만 할 뿐, 주춤하는 기색이라곤 전혀 없었다.
“어머, 그래요? 그것도 신기하네요. 무궁화 5단 아니면 제산오라는 거 알기도 힘들 텐데.”
멈칫한 사람들 사이에서 말을 받은 것은 유정이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뭔지 직접 보여 주듯, 그녀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산오에게 손을 흔들었다.
“제산오, 이리 좀 와 봐.”
우연히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유정이 흘린 이름을 듣고 입을 떡 벌리며 산오의 전신을 샅샅이 훑었다. 저러다 눈알 뽑히면 안 되는데. 희수의 걱정이 무색하지 않게 산오의 얼굴이 조금 사나워졌다. 선명한 이목구비에는 저게 뭔데 자신을 오라 가라 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또박또박 쓰여 있었다.
그러나 금방이라도 무시하고 다른 곳으로 가 버릴 줄 알았던 산오는 놀랍게도 그들에게 순순히 다가왔다.
아무도, 심지어 부른 유정조차도 산오가 정말 올 줄은 몰랐는지 눈만 동그랗게 뜨고 그를 맞이했다.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여기 올 줄은 몰랐는데.”
그쯤에서 희수는 슬그머니 행사장을 벗어나 이연과 연락하려는 생각을 접었다. 연락이고 나발이고 눈앞의 불부터 꺼야 했다. 희수의 인사에 산오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불청객 취급 할 거면 초대장을 보내지 말든지.”
산오치고는 선선한 어투였으나, 평범한 사람이 느끼기엔 너무 불온했던 모양이다. 정원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진 국장이 원래 말을 좀 딱딱하게 하는 편입니다. 물론 제 헌터가 참여한 덕에 더 뜻깊은 행사가 되겠지요.”
그 말에 산오의 시선이 희수에게서 정원으로 이동했다. 정원은 무슨 재앙신 제사라도 지내러 온 사람처럼 결연한 낯이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지 5초쯤 흘렀을 때에야 희수는 산오의 눈빛이 다소 멀뚱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쪽은 내 어머니. 어머니, 제산오 헌터입니다.”
생각해 보니 산오와 정원은 초면이다. 양측 모두 너무나도 유명한 인물들이라 모두가 간과하던 사실이었다. 산오는 공식 행사에 모습을 거의 드러내지 않고, 정원은 헌터 소집에 참여하지 않으니 사적 교류가 없다면 사실상 두 사람이 만날 일은 없는 것이다. 실제로도 두 사람이 대화하는 것 역시 이번이 처음이었고.
그러나 정원이 산오와 만나지 않았어도 그를 이미 아는 것처럼, 고위급 헌터인 이상 진정원의 얼굴을 모르기는 쉽지 않았다. 따라서 이건 고의성이 담긴 싸가지 없는 처신이었다. 성격 한번 참……. 희수가 혀를 내두르며 허겁지겁 소개한 후에야 산오는 고개를 슬쩍 까딱했다.
“원래 애가 좀 무뚝뚝해요.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선생님.”
분위기를 풀기 위해 나선 것은 유정이었다. 그녀는 수더분하게 정원을 달랜 후, 이어서 산오에게도 말을 건넸다.
“너도 그래. 평생 이런 거 참여 안 하던 애가 갑자기 예고도 없이 오니까 다들 놀란 거 아냐. 귀하신 몸이 웬일이야? 독일 갔다는 소리가 있던데?”
산오는 당장에라도 ‘알 바인가?’ 따위의 소리를 내뱉고 싶어 하는 얼굴을 했지만, 얌전히 유정의 말에 대꾸해 주었다.
“잔치 구경하러 왔다.”
“역시, 너도 이태민 씨 보러 온 거구나? 그래, 실체화 능력이면 아무리 너라도 만만치 않을걸.”
유정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이어서 그녀는 반 발자국 몸을 물려 옆에 있던 태진을 내세웠다.
“타이밍도 좋지. 마침 소문의 그분이 우리랑 대화하고 있었거든. 둘이 아는 사이라며?”
산오의 시선이 느릿하게 이동했다. 서늘한 온도에도 태진은 태연하게 부드러운 미소를 유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