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
모두가 제자리에 앉고, 서버들이 식사와 음료를 나르고, 정원이 축사를 할 때까지도 사람들의 흥분은 가시지 않았다. 손님들은 밥을 먹으면서도 같은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주최 측 테이블에 앉은 태진을 연신 흘끔거렸다. 그 테이블에 같이 앉은 희수가 불편해 죽겠다는 얼굴로 슬그머니 일어섰다.
“어디 가?”
자신을 두고 도망치는 것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얼굴로 D.S가 물었다. 그러나 희수는 슬그머니 모른 체 하며 중얼거렸다.
“난 제산오 녀석 좀 보고 올게. 사고 칠까 걱정돼서.”
“뭔 개소리야? 너 지금 날 이딴 데에 버리고…….”
“아이참, 언니. 이거 맛있다. 먹어 봐.”
눈치 빠른 미림이 적절하게 끼어들어 D.S를 달랬다. 희수는 그 틈에 빠져나와 근처에 있는 무궁화 5단 테이블로 향했다.
참석 여부와 관계없이 무궁화 5단의 자리는 늘 국내에 존재하는 무궁화 5단의 사람 수만큼 행사에 준비되어 있었다. 의자가 주인 없이 비어 있는 것보다 바쁜 와중에 시간을 쪼개 돌발적으로 참석한 무궁화 5단이 고작 의자가 없어 돌아가는 사태가 더 참사였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희수 역시 주최 측 테이블에 자리가 있음에도 이 테이블 역시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제 명패가 쓰여 있는 자리에 착석한 희수는 테이블이 두 자리를 제외하고는 빠짐없이 차 있는 모습에 조금 감탄했다. 심지어 초전력 때에도 이렇게 출석률이 좋았던 적이 없었는데.
“어머, 거기 잘 앉아 있다가 여긴 갑자기 왜?”
“국장님 오랜만.”
희수가 자리에 앉자 그를 알아본 5단들이 반갑게 인사했다. 이쪽도 태진의 퍼포먼스에 시끌시끌한 분위기인 건 마찬가지였다. 희수는 적당히 대꾸하다가, 옆자리에 앉은 민이 자꾸 단상이 아닌 다른 곳을 흘끔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허민 씨, 나가고 싶으십니까?”
그는 수줍음이 많았으니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이 힘들 수도 있겠다 싶긴 했다. 오늘의 제일 화제는 단연 이태민이었으나, 무궁화 5단들의 모임 역시 쏠쏠한 눈요기임에는 분명했으므로.
그러나 민은 예상외로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건 아니고…….”
“그럼 이제부터 올해만 경험하실 수 있는 특별 순서를 시작하겠습니다!”
민이 문장을 제대로 만들기도 전에 사회자의 쩌렁쩌렁한 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벌써 그런 순서인가. 올해는 유독 행사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도 모르게 속도가 빨랐다. 초반에 보여 준 태진의 능력이 그만큼 압도적이었다는 뜻일 터다.
“올해의 특별 순서 역시 많은 분들이 예상하셨다시피, 이태민 씨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 말에 장내의 소란스러운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았다. 그 틈을 타 사회자의 말이 이어졌다.
“조금 전 이태민 씨의 초능력 시연을 다들 보셨을 텐데요. 사실 이태민 씨가 초능력을 펼치실 때, 회장 곳곳에 기력 측정 기계를 배치해 두었습니다.”
그가 말을 하는 동안 태진이 다시 단상에 올라왔다. 정중앙에 태진이 서고, 뒤이어 나이 지긋해 보이는 남녀 몇이 액정이 달린 기계와 함께 올라왔다. 기계의 부피가 크고 개수가 많아서 그렇게 커 보였던 단상의 절반이 금방 찼다.
“이태민 씨는 그간 개인 사정으로 초능력 심사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초능력관리청과 주최 측인 진정원 님의 설득 끝에, 드디어 긍정적인 의사를 보여 주셔서 특별히 뜻깊은 행사의 특별 식순으로 이태민 씨의 초능력 심사를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행사장 안의 사람들이 흥분한 얼굴로 옆 사람과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위원회를 제외하면 타인의 초능력 심사는 도통 볼 일이 없었던 탓이다. 그것도 무려 무궁화 5단이 확실시되는 실체화 능력자의 심사가 아닌가.
그사이 준비가 끝난 모양이다. 바쁘게 움직이던 단상 위의 사람들이 기계 옆에 가지런하게 섰다. 사회자가 잊지 않고 소개했다.
“이 식순을 위하여 특별히 초능력관리청의 초능력심사위원회 분들을 모셨습니다. 귀한 분들을 모시게 되었으니, 모두 박수 부탁드립니다.”
노련한 호응 유도에 다시 한번 박수가 터져 나왔다. 화답하듯 고개를 꾸벅 숙인 위원들이 손에 들린 서류를 마지막으로 점검했다.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초능력자가 한 번씩 경험한, 익숙한 광경이었다.
아마 저곳에 태진의 심사 결과가 적혀 있을 것이다.
“그럼 심사 결과를 발표하기 전에, 이태민 씨에게도 간단한 말씀 들어 볼 수 있을까요?”
곧 태진이 마이크를 넘겨받았다. 그는 여유로운 웃음을 만면에 띤 채로 입을 열었다.
“두 번째로 뵙겠습니다. 이태민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 서 봤던 경험이 전무할 텐데도 태진은 긴장이라곤 전혀 하지 않았다. 마치 이 자리를 위해 준비된 사람 같았다.
“그간 시민 여러분께 염려를 끼쳐 드린 점 죄송합니다. 부끄럽지만 제가 겁이 많은 사람이라 그런가 봅니다. 하지만 진정원 선생님이 저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셨고.”
그 말에 앞쪽 테이블에서 지켜보던 정원이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두 사람이 공고한 관계라는 것을 누가 봐도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저는 한 발짝 나아가기로 했습니다. 많은 초능력자 분들이 그러하듯이, 제 힘이 초호시에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매끄러운 소감이 끝나고 마이크는 위원 중 한 명에게 넘어갔다. 엄숙한 인상의 남자가 선언했다.
“그럼 이태민 씨의 초능력 심사 결과를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꼬장꼬장한 목소리가 행사장 내에 고르게 퍼졌다.
“실체화 능력자 이태민.”
톤이 낮은 중후한 음성은 끝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긴장, 흥분, 희열. 그런 것들이 한데 섞인 음성이 거대한 사실을 뱉어 냈다.
“무궁화 5단입니다.”
고요하던 행사장에 소곤거림이 전율하는 것처럼 순식간에 퍼졌다. 무궁화 5단의 탄생 과정을 실시간으로 보고 있다는 긴장감이 만연했다. 그들은 역사의 한 장면 안에 있는 것이다. 벅차오르는 감각을 이기지 못한 몇몇이 다시 박수를 쳤다. 박수는 전염되듯 소리가 점점 커져, 행사장을 무너트리기라도 할 것처럼 몇 초간 지속되었다.
희수는 인상을 찌푸리지 않도록 노력하며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분위기가 점점 태진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오늘 행사에 온 사람들은 누구나 이 이야기를 할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너무나 영웅적인 말과 행동이었다. 대중이 좋아할 수밖에 없는 소재였다.
이대로 가만히 있어도 되는 건가? 어떻게든 해야……. 그런 생각을 하다가, 희수는 본능적으로 자신과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있는 제산오를 바라보았다.
“……제산오?”
희수가 혼잣말에 가깝게 중얼거렸다. 산오는 다른 사람들처럼 단상을 보고 있지 않았다. 단상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느라 다른 조명의 조도가 낮아져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어딘가를 노려보는 것 같은…….
착각이 아니었다. 흉흉한 기세의 산오가 외곽 어딘가를 뚫어 죽일 듯이 째려보다 말고 급기야 일어섰다. 워낙 덩치가 컸던 탓에 그 행동은 매우 눈에 띄었다. 바로 옆에 앉아 있던 다른 무궁화 5단들이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희수가 재빨리 산오의 시선 끝을 따라갔다. 그 끝에는.
“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조금 잦아든 박수 소리를 뚫고 튀어나왔다.
“이의를 제기합니다!”
단상에서 가장 먼 위치, 가장 높은 층에서 한 손을 번쩍 들어 올린 옅은 색 머리칼의 남자는 출처 모를 무선 마이크를 쥐고 있었다. 덕분에 그의 목소리는 행사장 구석까지 단번에 닿았다.
이연이 자신만만한 얼굴로 외쳤다.
“그 자식은 가짜입니다!”
발랄한 음성은 너무 또박또박해서 알아듣지 못할래야 못할 수가 없었다. 장내에 박수 소리가 뚝 끊기고, 소름 끼치는 침묵이 흘렀다.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한 태진의 웃음이 뚝 그쳤다. 구부러져 있던 눈매가 딱딱하게 굳고 두 눈이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처럼 벌어졌다.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될 인물이 그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뭐야?”
“가짜라고?”
“저 사람은 누군데?”
뒤늦게 사람들의 목소리가 하나둘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느릿하게 퍼지던 웅성거림은 순식간에 구석구석까지 파도치듯 일렁였다. 흥미로 반짝이는 시선이 단상에 선 태진과 우뚝 서 있는 이연을 번갈아 훑었다.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정원이었다. 안색이 창백해진 그녀가 급하게 손짓하자, 행사 진행 위원들이 허둥지둥 이연에게 다가갔다.
“저기, 잠깐 저희와 가 주셔야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연의 근처에도 도달하지 못했다. 어디선가 나타난 새하얀 모래들이 장정들을 부드럽게 밀어 냈기 때문이다.
그 광경을 똑똑히 지켜본 헌터들 사이에서 조그마한 탄성이 터졌다. 웅성임에 그쳤던 소란이 점점 커졌다.
모두가 그 능력이 뭔지 알았다. 그도 그럴 게, 조금 전 직접 보지 않았는가.
서서히 태진에게로 시선이 쏠렸다. 남자는 얼어붙은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럴 리가 없었다. 정이연은 여기 있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오늘 아침에도 확인하고 나왔다. 아무도 만날 수 없는 곳, 심지어 스스로 나가지도 못하는 곳인데…….
“……너.”
태진이 별안간 고개를 휙 돌렸다. 격노가 담긴 눈동자가 향한 곳은 도시에서 가장 강한 초능력자들이 모여 있는 테이블이었다.
“무슨 짓을 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