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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킹 1위를 임시 보호 중입니다 (240)화 (240/250)

#240

“그럼 지형 설정 기능은 말씀하신 대로…….”

이연이 조심스레 물었다. 사실 이 부분은 그가 가장 걱정하던 부분이었다.

공개적으로 일을 벌이는 이상 지형 설정 기능이 이연의 기력을 불법 채취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늦든 빠르든 지형 설정 기능은 폐기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이 도화선에 불을 붙이는 것이 옳은가? 이연은 내내 그것을 고민했다.

망설이는 이연에게 답을 준 것은 희수였다. 이연이 그에게 제 능력을 밝히고 도움을 요청했을 때, 희수는 명쾌하게 선언했었다.

‘제 계획은 애초에 지형 설정 기능을 폐기하는 겁니다.’

‘예?’

예상치 못한 파격에 이연이 입을 떡 벌리자 희수가 부연 설명을 했다.

‘불법적인 기술을 사용해서 만들었고, 심지어 안에 든 연료가 떨어질 수도 있다는 시스템인 것이 증명된 이상 그 기능을 계속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정이연 씨가 영원히 살아서 기력을 제공해 줄 건 아니지 않습니까.’

이 대목에서 산오가 희수를 매섭게 째려보았기 때문에 희수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제가 바라는 바도 아닙니다.’

그제야 산오의 눈에 힘이 아주 조금 풀렸다. 희수가 아무튼, 하고 말을 이었다.

‘그렇게 되면 어차피 언젠가는 쓰지 못하는 시설인 셈입니다. 지금 폐기하나, 나중에 폐기하나 별반 차이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걸 빼고 나면…….’

폐기라는 게 말이 쉽지, 초능력관리청이 그간 지형 설정 기능으로 얼마나 이득을 봤는지 계산하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터였다. 시내 변이종 전투뿐만 아니라 공공 행사에도 알차게 써먹는 시스템 아닌가.

심지어 초전력이 코앞이었다. 지형 설정 기능 때문에 또 일정을 미루면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어차피 일정 공간이 확보되는 것만으로도 변이종 전투에는 큰 이점입니다. 지형 설정 기능이 아예 없을 때에도 변이종 임무 잘만 했는데 이제 와서 없다고 전투 못 하면 전투 구역 없는 곳에서는 변이종을 상대하지 못한다는 말과 똑같으니 헌터 자격증은 반납하는 게 맞고요.’

과연, 고작 5년 차 헌터와는 비교할 수 없는 연륜 있는 대사였다. 이연은 그제야 무언가 깨달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전투 지형 기능이 개발된 것은 고작 7년 전. 희수는 그전부터 변이종 대응 임무를 수행하던 사람이었다. 이연의 고민 따위는 애초에 고려 대상도 되지 않았던 것이다.

‘문제는 초전력 같은 편의 시설로 사용할 때인데.’

이연이 생각한 부분은 희수 역시 생각한 부분이다. 희수의 눈동자가 이연의 옆에 얌전히 앉아 있는 산오에게로 옮겨 갔다. 심드렁한 얼굴이 뭘 보냐는 듯 마주 꼬나봤다.

‘무궁화 4단과 5단의 초전력은 비공개라는 사실을 알고 계시겠죠.’

‘예, 그야 뭐…….’

‘그들의 초전력이 어떤 방식으로 치러지는지도 아십니까?’

‘……그건…… 모르죠.’

당연하다. 이연은 무궁화 2단이었으니까. 그런 정보를 찾아다닐 만큼 고위급 초전력에 대한 호기심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맹한 대답에 예상했다는 듯 희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위급 헌터들의 초전력 방식을 초전력 전체로 확대하려고 합니다.’

놀랍게도 이 해결책을 제시한 것은 산오였다. 아직 이연이 상황을 모르던 시기, 태진이 지형 설정 기능을 빌미로 희수를 협박한 다음 날. 어떻게 알았는지 산오가 찾아왔었다.

그는 마치 준비라도 하고 있었던 것처럼 막힘없이 대책을 제시했다. 계획의 실현 가능성에 대해 잠깐 따져 본 희수는 난관이 있긴 하지만 의외로 괜찮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제산오가요?’

이연이 놀란 눈으로 산오를 바라보자, 산오는 재수 없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럼 이태진 망하게 하는 데 내가 정말 가만히 손 놓고 있을 줄 알았나?’

정말 제산오다운 발언이었다. 이연이 그때를 회상하며 피식 웃었다. 희수는 말을 하다 말고 웃는 이연을 잠깐 의아하게 바라보았지만, 이내 성실하게 대답해 주었다.

“네. 가상 기술을 확장할 겁니다.”

무궁화 4단과 5단은 단순히 지형 설정 기능만 이용해서 초전력을 할 수가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4단부터는 능력의 살상력이 너무나 뛰어났다.

만일 초전력으로 부상이라도 입게 되면 당장 업무 지장이 상당했다. 심지어 정신없이 전투하다 단순 부상이 아니라 치명상을 입을 수도 있었다. 치유 계열 초능력으로도 수습이 불가능한 경우가 생길 가능성도 무시하지 못한다.

변이종 전담 회사 소속 헌터들의 일정 비율 이상에게 초전력 참가가 강제되는 것을 생각한다면, 일 년에 두 번 진행되는 초전력에서 부상 위험이 높다는 것은 꽤 비효율적인 일이었다. 회사들의 항의도 거셀 터였고, 그만한 위험 부담을 안으면서까지 초전력을 진행하는 것은 초능력관리청 역시 바라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초능력관리청은 한 가지 묘수를 꾀했다. 기술 발달이 압도적인 초호시였기 때문에 만들어 낼 수 있는 장치.

<초전력 가상 신체 전송 장치>, 줄여서 초신장.

초신장을 착용하면 초능력자들의 본 신체는 보안휴게실에 그대로 남아 있는 동시에, 가상으로 신체를 구성해 전투 구역 내에 소환할 수 있었다. 일종의 증강 현실이었다.

가상 신체는 찢기거나 잘려도 피 한 방울 흐르지 않는 것은 물론 본 신체에도 전혀 해를 주지 않았고—동기화로 인한 순간적인 환상통 증상은 있을 수 있겠지만— 치명상 수준이라면 초신장에 내재된 인공지능의 판단하에 자동으로 사라진다. 게다가 가상 신체는 현실 신체와의 허브 역할을 겸하고 있기 때문에 초능력 역시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었다.

산오의 제안은 이런 상위 헌터의 초전력에만 사용하던 초신장의 사용 범위를 아예 초전력 전체로 늘리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부상 위험에서도 자유롭고, 초능력자들도 마음껏 능력을 사용할 수 있으니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썩 그럴듯한 말이었다.

다만 단점이 하나 있었다.

“문제가 되는 건 기술과 인력이었습니다. 초신장에 들어 있는 시스템 자체가 워낙 고급 기술이라 대량 생산도 어렵고, 쉽게 만들어 낼 수 있는 양도 아니지 않습니까.”

초전력을 참여하는 것은 매회 9만 명 정도. 그렇다면 초신장 역시 9만 개 이상을 만들어 내야 했다. 정부 부처 중 손꼽히는 예산 규모를 편성받는 초능력관리청에게도 상당히 부담스러운 지출인지라, 지금 같은 긴급 상황이 아니었다면 이 안이 승인되는 데에 꽤 많은 시간을 잡아먹었을 것이다.

게다가 초전력이 머지않았다. 그만한 양을 맞추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만드는 건 어림도 없었고, 진작에 준비를 마치고 생산에 들어갔어야 했다.

여기에 도움을 준 것 역시 산오였다. 그러나 그의 능력으로도 상황이 순조로웠던 건 아니었다. 대량화 기술 정도는 사전에 윤곽을 잡았지만, 막상 공장 수배에 난항을 겪었던 것이다. 정식으로 계약을 맺기도 전 비밀리에 진행하던 일이다 보니 규모를 늘리는 데에 한계가 있었던 탓이었다.

심지어 초신장은 첨단 기술을 탑재한, 신체에 사용하는 전자기기였다. 일반적인 공산 제작품을 만드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인력이 필요했다. 그의 비서들이 밤낮으로 뛰었으나 초전력 전까지 만들 수 있는 초신장의 개수는 고작 5,000개 정도. 턱도 없이 부족했다.

“이 부분은 덕선 누나도 정말로 고생을 많이 해 줬습니다.”

희수가 옆에 앉아 있던 D.S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이자, D.S가 뚱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뭔 소리야, 다 돈 받고 하는 건데.”

구원 투수로 등판한 것은 D.S였다. 그녀는 마침 대량 생산 공장을 얼마든 구해도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만한 세기의 전자제품을 하나 만들어 냈지 않은가.

“내 사업 늦어지는 값은 톡톡히 받을 거야.”

“당연합니다. 정부 기관과의 거래니 걱정 마십시오.”

보란 듯이 밀려드는 DnY 예약 주문과 투자 제안이 적절하게 타인의 눈을 가려 줄 수 있었다. D.S는 DnY를 만들 공장을 수배하는 척하며 그 공장에 초신장을 생산할 설비 시스템을 갖출 수 있었고, 현재 그 공장들은 가열 차게 가동되는 중이었다. 계산상으로, 초전력 전까지는 모든 초신장이 검수까지 마치고 출고될 것이다.

“방법이 있어서 다행이에요.”

이연이 눈썹을 늘어트리며 중얼거렸다. 혼자 하려고 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모두가 이리저리 뛰어 준 덕이었다.

“국장님이 너무 고생을 하시는 것 같아서 죄송하네요.”

희수의 뒤에 쌓인 서류 더미는 신경 쓰지 않으려 해도 존재감이 무시무시했다. 희수 본인조차 이 정도로 일이 새로 쌓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터였다. 눈에 띄게 푸석한 뺨과 퀭한 눈을 흘끗이자, 희수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저도 나름대로 목적이 있어서 참여한 거고, 성공했지 않습니까. 그리고 마무리 욕심도 있긴 해서요.”

“마무리요?”

그렇게 말하는 뉘앙스가 묘해, 이연이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예리한 반문에 희수가 조금 대견하다는 눈빛을 했다.

“예, 현재 맡은 것까지가 제가 초능력관리청에서 하는 마지막 업무입니다. 일이 모두 마무리되면 퇴직하려고 합니다.”

“예?”

희수의 폭탄 발언에 이연이 눈을 크게 떴다. D.S와 산오도 처음 듣는 소리인지 제각기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희수가 머쓱하게 웃었다.

“이 정도면 오래 하지 않았습니까. 초능력관리청에 들어가길 바란 것은 어머니의 뜻이었기도 하고요.”

희수는 무던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초능력관리청에서도 그럭저럭 적응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적성에 맞다고 하기는 애매했다. 정책을 논의하고, 사람과 조율하고, 예산을 편성하고……. 못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특출나게 잘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사무직으로만 남기엔 진희수는 너무 강한 초능력자였다.

무려 무궁화 5단이다. 초능력관리청의 상징적인 존재로만 남아 있기에는 아까운 인력이었다. 최희원이 초능력관리청장 자리에 있으면서도 굵직한 헌터 임무 역시 여러 차례 수행한 만큼 희수 역시 그러고는 있었으나,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했다. 사실 냉정하게 보면 희원처럼 희수가 반드시 공직에 앉아 있어야 할 정도로 대단한 상징성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고.

“조금 더 직접적으로 사람들을 돕고 싶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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