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
“산오 님이 남의 말을 듣다니…… 두 분이 사귀는 사이가 맞긴 하군요.”
“시끄러워.”
아, 제산에서 둘러댔던 당시에는 거짓말이었는데…… 이젠 거짓말도 아니지. 부정할 틈도 없이 진실이 되어 버린 위장은 보이는 것보다 오랜 역사를 품게 되었다. 아이러니한 현실에 피식 웃은 이연이 산오에게 손을 설렁설렁 흔들고는 가던 방향을 향해 마저 발을 뗐다. 오늘은 이연이 저녁 당번이니, 볼일을 마치고 산오의 입맛에 맞을 만한 근사한 식사를 만들기 위해서는 꽤 서둘러야 했다.
산오와 헤어져 이연이 도착한 곳은 두터운 철문 앞이었다.
차가운 냉기가 도는 문에는 문고리 외에 아무것도 달려 있지 않아 안의 모습을 확인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문 옆에 쓰여 있는 호수를 확인한 이연이 심호흡을 했다. 후. 강한 숨과 함께 손을 뻗었다.
덜컹. 묵직한 쇳덩어리가 열리며 보인 것은 회색 콘크리트로 마감된 벽이었다. 크지 않은 공간을 감싼 콘크리트 벽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는 책상, 의자, 그리고 그것을 비추는 하얀 조명과 벽 한쪽을 가득 채운 매직미러 외에는 인테리어랄 게 아무것도 없는 삭막한 방.
책상 앞에는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잔뜩 구겨진 정장, 헝클어져 흘러내린 머리, 잔뜩 찌푸려진 인상. 얼마 전의 혈색 좋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단상 앞에서 자신만만하게 소개를 하던 남자와 동일 인물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지친 얼굴은 커다랗게 울리는 문소리를 들었음에도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삼촌.”
이연이 조용히 그를 불렀다. 태진은 고집스레 같은 자세를 유지했다. 그게 마치 마지막 자존심이라도 되는 것처럼.
“비웃으러 온 거니?”
악의를 담은 빈정거림이 잇새로 흘러나왔다. 참으로 그다운 물음이라서, 이연은 그만 웃어 버리고 말았다.
소리도 내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아챈 건지 태진의 고개가 휙 들렸다. 분노로 형형한 눈동자가 이연을 쏘아보았다.
“넌 지금 이겼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게 곧 착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거다. 네 이기적인 욕심 때문에…….”
“그만 인정해요, 삼촌.”
더 이상 들을 가치도 없었다. 이연은 태진의 말허리를 뚝 끊었다.
“삼촌은 시민들의 안전을 가지고 절 협박했고, 납치해서라도 제 기력을 가지고 싶어 했죠. 그리고 그걸로 저 대신 실체화 능력자 행세를 하려고 했어요. 초호시에 기여하고 싶다고 했잖아요. 그럴 마음이 전혀 없는데도요.”
맑은 눈동자는 하얗게 내리쬐는 조명은 물론이고 일그러진 상대의 얼굴까지 그대로 비췄다. 이연은 줄곧 그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드디어 내뱉었다.
“그건 그냥 사기꾼이에요.”
태진의 눈매가 누군가가 마구잡이로 주무른 것처럼 찡그려졌다. 파르르 떨리는 눈 밑의 경련이 뺨으로 흘러내려 입까지 닿았다. 부들거리는 입술이 신음 같은 고함을 내질렀다.
“이……!”
“제가 여기 온 건.”
그러나 이연은 태진의 말을 끝까지 들어 줄 생각이 없었다. 태진은 너무나 많은 말을 했고,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온들 이전과 크게 다르지도 않을 것이다.
이제 자신이 말할 차례였다.
“정정하고 싶은 부분이 있어서예요.”
이연이 책상을 사이에 두고 태진의 맞은편에 섰다. 앉아 있는 태진과 시선 차이가 조금 났다.
“삼촌이 지형 설정 기능을 만든 이유를 알아요.”
그 말에 태진이 멈칫했다. 뜬금없는 화제에 짜증이 어렸다. 그가 날카롭게 노려보든 말든 이연은 무표정한 낯을 유지했다.
면담실에서 마주한 태진은 제 생각보다 훨씬 왜소하고 허술했다. 거기 있는 건 악마도, 귀신도 아니었다. 그냥 신경질적인 남자 한 명이었다.
“도시를 위해 그걸 만들었다는 건 거짓말이죠?”
처음에는 그렇게 믿었다. 초호시 전역에 깔린 안전 시스템의 개발자. 시민을 지키고 헌터를 도운 공신. 이연의 실체화 능력을 본인보다 더 멋지게 사용해 낸 사람.
그렇다면 그것만은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비록 빼앗긴 기력이라도 그런 데에 사용했다면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태진을 찾겠다거나 복수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거였다. 기력의 주인이 누구면 어떤가. 누가 만들었든 그건 도시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고, 그게 다였다. 그런 마음으로 침묵했다.
그렇기 때문에 태진이 지형 설정 기능에 넣어 뒀던 기력을 모조리 빼내 썼다는 걸 알았을 때, 그 기분을 이연은 영원히 말로 설명하지 못할 것이다.
태진은 애초에 도시의 발전이나 시민의 안전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개인적인 업적이나 성취감과도 전혀 상관없었다. 그는 오로지 필요에 따라 개발한 거였다.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그렇다면 태진이 지형 설정 기능을 만든 이유는 무엇인가.
“그건 그냥 덫이었잖아요.”
간단했다. 그건 이연에게 보여 주기 위한 함정이었다.
실체화 능력에 대해 본격적으로 연구를 시작했을 때부터, 태진은 이 놀라운 초능력에 대한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어떤 허상이든 실재하는 것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말은 이 능력만 있다면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는 이야기였다.
그 뒤로 따라오는 것은 단연 욕심이었다.
몇십 년은 충분히 사용할 수 있을 만한 기력을 가지고도 만족하지 못했다. 능력은 써야 가치를 발했으니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었고, 산더미처럼 쌓아 뒀어도 자원이 점차 소비된다는 감각은 초조함을 불러왔다. 더 있어야 해. 더, 더. 죽을 때까지 사용할 수 있도록.
그러기 위해서는 뭐가 필요하지?
“저더러 보라고 그걸 만든 거였어요.”
당연히 실체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초능력자 본인이다.
자취를 감춰 버린 사람을 직접 찾아내는 것은 어려우니 제 발로 찾아오도록 해야 했다. 그래서 만든 것이 지형 설정 기능이었다.
그래서 태진은 의도적으로 지형 설정 기능을 정확한 능력명으로 알려지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이정연 본인이 본다면 누구 기력으로 만들었는지 반드시 알아챌 수 있도록 만들었다. 성장한 정연이 외국으로 가 버리지 않는 이상 한 번쯤은 접할 수 있도록.
지형 설정 기능을 만드느라 남아 있던 정연의 기력 대부분을 썼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건 정연을 끌어들이기 위한 미끼였다. 본체를 얻기 위해 짠 어마어마한 규모의 거미줄. 이것이 빌미가 되어 정연을 잡을 수 있게 된다면 어차피 이득이다. 태진이 손해 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언제든 없애도 된다고 생각했죠.”
게다가 거기 넣어 둔다고 완전히 없어지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태진에게 있어서 지형 설정 기능은 저금통이나 다름없었다. 산더미 같은 정연의 기력을 합법적으로 저장해 둘 수 있는 공간. 가지고 있던 기력이 부족해지면 거기서 언제든 빼낼 수 있었고, 거기에 죄책감은 없었다.
아니, 당연한 것 아닌가? 제가 만든 기능이니, 어떻게 쓰든 제 마음이었다. 타인은 그저 자신의 재능에 빌어 잠깐 호의를 받는 것뿐이었다. 조금이나마 쓰게 해 준 것이 어디란 말인가. 그가 마음먹으면 영원히 쓰지 못할 수도 있었는데.
“고작 그런 말을 하려고 온 거니?”
태진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티끌만 한 감흥조차 주지 못하는, 가소롭기 짝이 없는 설교였다. 특히 제산오를 옆에 끼고 일을 벌인 이연이 하기에는 가식적인 말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너 같은 바보야 모르겠다만, 너랑 그렇게 붙어 다닌 그 친구는 뭐가 다를 거 같아?”
그 모순이 우습다 못해 황당했다. 고고하고 잘난 척해도 사람의 본질은 결국 같았다. 모두 자신을 위해 살아간다. 태진은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주제에 감히 날 가르치려고 들어?
“영웅? 수호신? 웃기지 마. 난 너보다 더 그놈을 잘 알아. 그 녀석은 그런 데에 아무런 관심도 없어. 장담하는데,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 가도 아무렇지 않을걸? 그 녀석이 어디 사람 구하고 행복하다든? 그것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하든? 그놈도 똑같아! 다른 욕심이 있었고, 그걸 채우려고 그 자리에 올라간 거다. 그게 우연히 선하게 보이는 행보였을 뿐이고.”
뭔지 모를 감정으로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이연을 바라보았다. 그 안에는 여전히 멍청한 이를 향한 동정이 섞여 있었다.
“그런 놈이 영웅은 무슨……. 살인마가 되지 않은 게 기적이겠지.”
돌고 돌아 제산오라니. 기괴한 웃음이 어느새 태진의 얼굴 전체에 퍼졌다. 금방이라도 폭소를 터트릴 것 같은 표정으로, 태진이 이기죽거렸다.
“불쌍한 내 조카! 넌 결국 나랑 똑같은 놈을 곁에 둔 거야.”
그 긴긴 말을 들으며 이연이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은, 산오와 함께 오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것이었다. 들을 필요도 없는 폭력적인 언사에 노출되지 않아서 정말로 다행이었다.
“삼촌의 말은 틀렸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