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6
성찬의 성화에 못 이겨 이연은 얼결에 그와 동행했다. 성찬의 말을 들어 보니 그 역시 이연과 목적지가 같은 듯한데 굳이 따로 가는 것도 이상하긴 했다.
산오는 그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인상이 조금 험해지긴 했으나 별말은 하지 않았다. 간간이 성찬에게서 이연을 떨어트리며 째려볼 뿐이었다.
세 사람이 도착한 곳은 고층의 대회의실이었다. 초능력관리청에 올 때마다 접수창구나 희수의 국장실 정도만 들른 이연은 건물 내에 이렇게 커다랗고 좋은 회의실이 있는 줄도 처음 알았다. 같은 회의실인데도 은주와 처음 마주쳤을 때 봤던 곳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번쩍거렸다.
안에는 이미 선객이 한가득이었다. 세 사람이 들어서자, 웅성거리던 회의실이 조용해지고 시선이 몰렸다.
“안녕하십니까!”
가장 먼저 입장한 성찬이 활달하게 인사를 건넸으나, 거기에 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뒤의 인물이 너무 강렬했던 탓이다.
“제산오?”
“아니, 네가 웬일이야?”
“저기, 성찬이도 왔는데요~.”
“제산오가 초전력이라니, 해가 서쪽에서 뜨겠네.”
추가로 나온 성찬의 자기 어필 또한 단숨에 묻혔다. 놀란 얼굴로 한마디씩 한 사람들의 눈은 죄다 산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산오는 호들갑스러운 분위기에 반응조차 하지 않고 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 덕에 산오의 뒤에 서 있던 이연이 노출되었다.
“어머, 정이연 씨?”
“정이연?”
“아니, 그러네!”
순식간에 관심이 옮겨 갔다. 산오를 따라가려다 타이밍을 놓친 이연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호기심을 잔뜩 담은 눈동자가 하나같이 이연을 향해 빛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정이연입니다.”
묘한 압박을 견디지 못한 이연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와, 이번 초전력 진짜 재밌겠다. 반참합니다.”
“반참?”
“반드시 참여한다는 뜻.”
“하여튼 요즘 애들은…….”
“정이연 씨, 이리 와서 앉아요.”
“그래, 우리 국장님 올 때까지 이야기나 하자. 나 궁금한 거 많았단 말이야.”
회의실 안쪽 상석 자리에 앉아 재잘거리는 사람들의 면면은 이연도 얼추 알았다.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집단 중 하나인 데다, 동종업계 톱 클래스이기까지 했으니 당연했다.
중력 조절 능력을 가진 김유정, 변신 능력을 가진 민수라, 그리고 전기 생성 및 조종 능력을 가진…….
“어, 허민 씨.”
“……아, 안녕하세요.”
요란한 사람들에게서 한 칸 떨어져 앉아 있던 민이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연의 알은척에 그새 저들끼리 한창 떠들던 사람들이 말을 뚝 그치고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헐, 민이 오빠가 정이연 씨를 안다고?”
“저 은둔형 외톨이가?”
“집 밖으로 잘 나가지도 않는데 어떻게?”
사람들이 술렁거리며 민을 추궁했다. 민은 눈 밑의 다크서클이 한층 짙어진 기색으로 그런 거 아니라며 고개만 내저었으나, 모두의 눈동자에 만연한 흥미는 떨어질 줄을 몰랐다.
“네가 저놈을 어떻게 알지?”
심지어 단순한 흥미가 아닌 인간도 존재했다. 사나운 목소리가 이연은 물론이고 좌중 모두에게 닿자, 반사적인 야유가 퍼부어졌다.
“제산오, 아무리 그래도 형한테 저놈이 뭐냐?”
“그래! 허민이랑 너랑 나이 차가 무려 10년은 난다.”
“진 국장이 잘못 키운 게 틀림없다니까. 오냐오냐 키운다고 되는 게 아닌데.”
“제가 뭘 말입니까?”
타이밍 좋게 문이 다시 열렸다. 희수가 물음을 툭 던지며 회의실 안으로 들어섰다. 와글와글한 분위기가 익숙한지 별다른 표정 변화도 없이 안쪽 광경을 훑은 희수는 가까이 있던 이연과 눈이 마주치자 가볍게 목례했다.
김유정, 민수라, 허민, 어느새 그들 옆에 앉은 박성찬과 진희수까지.
이 장소 안에 있는 모두가 무궁화 5단이었다.
총인원수가 전체 무궁화 5단의 수인 10명보다 적은 것을 보니 이번 초전력에 참여할 의사가 있는 사람만 참석한 듯했다. 그렇다고 해도 생각보다 많았다. 이연과 산오를 포함해 무려 7명이나 모인 것이다.
“아, 국장님이 육아에는 소질 없다는 이야기 하고 있었지.”
“……못해서 미안하게 됐습니다.”
“우리한테만 사과해서 되겠어요?”
“그래, 제산오 정도면 대국민 사과는 해야 해.”
“…….”
희수가 본전도 못 찾고 입을 다물었다. 이연 역시 왜, 제산오가 뭐가 어때서, 라고 하고 싶었지만 반박거리가 주변에 너무나 산재해 있어 차마 할 말이 없었다. 이연의 부루퉁한 얼굴을 눈치챈 사람들이 깔깔 웃었다.
“어머, 친구 욕해서 기분 나빠요? 미안해요. 고의는 아니었어요. 아니, 이게 고의인가?”
“제산오 싸가지 없다는 게 욕이야? 사실이지.”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이리 오라니까. 내가 특별히 산오 흑역사 알려 줄게요.”
“제산오 흑역사도 있어? 왜 난 몰라?”
“네가 초전력 외에 뭔 관심이 있겠니.”
옹기종기 모여 앉은 5단들은 내내 다른 사람들을 타박하는 것 같으면서도 호의가 눈동자에 담뿍 담겨 있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기분 나빠하는 사람이라곤 처음부터 삐딱하던 산오 정도. 제산오 흑역사? 이연 역시 거부할 수 없는 떡밥에 홀린 듯 앞으로 가려는데, 유일하게 외곽에 떨어져 앉은 산오에게서 팔이 슥 뻗어 나왔다.
“가긴 어딜 가.”
이연의 손목이 턱 붙잡혔다. 팔을 뻗어 이연을 막은 산오가 짜증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좌중을 살벌하게 부라렸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사람 전원은 즉시 야유를 퍼부었다.
“뭐야? 친구 하나 생겼다고 유세는…….”
“야, 누가 잡아먹니? 이야기만 한다고.”
이연이 희한한 얼굴로 산오와 회의실 안의 사람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산오는 평소와 다름없이 심드렁하고 싸가지 없이 굴었지만, 이 사람들 사이에 끼니 묘하게…….
“이연 씨, 신경 쓰지 마요.”
“맞아요, 제산오한테 지지 마!”
“피부도 뽀송해서 진짜 귀엽네. 정말 제산오하고 동갑 맞아?”
“뭐? 동갑이라고? 미친 거 아냐? 제산오도 슬슬 관리해야 하는 거 아냐?”
“그래, 타고난 거 믿고 막 돌아다니면 안 된다고.”
“다들 죽고 싶나?”
……묘하게 어린애처럼 느껴졌다.
그러고 보면 산오는 무궁화 5단 중에서 가장 막내였다. 항상 위압적이고 사나운 분위기를 두르고 있어 스물넷이라는 나이가 크게 실감된 적이 없었는데, 그런 아우라에 쉽게 주눅 들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있으니 선명하게 느껴졌다. 다들 삐죽거리는 남동생을 귀여워하는 분위기가 만연했다. 단순히 삐죽거린다기엔 심하게 살벌하긴 했지만…….
그게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해서, 이연은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산오를 놀리는 사람들을 살펴보았다. 그사이 산오가 재촉하듯 이연의 팔을 다시 잡아끌었다. 알았다, 알았어. 이연은 산오의 흑역사 청취를 포기하고 순순히 그가 당기는 대로 그의 옆에 앉았다. ……나중에 물어봐야지. 야무진 다짐은 잊지 않은 채였다.
그러는 동안 희수가 회의실의 단상으로 올라갔고, 이연의 자리 선정에 아쉬워하던 5단들의 관심은 금세 희수 쪽으로 쏠렸다.
“그러고 보니 국장님 일찍 왔네요? 웬일?”
“맞아. 맨날 오 분은 기다리게 하더니.”
“지각비 걷어야 한다니까. 제대로 징수했으면 지금쯤 우리 신라 호텔 주방장 불러서 만찬 먹으면서 회의하는 것도 가능했을걸?”
들어올 때부터 느꼈지만, 무궁화 5단들이 모여 있는데도 무겁거나 어려운 분위기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고등학교 쉬는 시간 같다고나 할까.—이연은 고등학교를 다니지 않았지만, 드라마에서 본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어떻게 아냐고.”
“응? 뭘?”
그 와중에 산오가 이연의 팔뚝을 끌어당겨 재차 심문했다. 앉은 상태로 상체만 딸려 가기 무섭게 뚱한 목소리가 이연의 귓가로 흘러들어 왔다.
“허민.”
“아, 적공저지일 행사에서 잠깐 봤어.”
“사람 연락 안 받아서 열 받게 만들고는 다른 남자와 시시덕거렸다는 건가.”
“아니, 미안하다고……. 배터리 나갈 줄 몰랐다니까.”
적공저지일 행사 날, 태진의 동향을 살피기 위해 산오보다 조금 먼저 나간 탓에 길이 엇갈렸는데, 하필 그때 간당간당하던 휴대폰 배터리가 나갔던 것이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D.S와 산오의 전화가 산더미만큼 와 있었다. 난 왜 행사장에서 그렇게 째려보나 했지…….
산오는 어지간히 빡이 쳤던 건지 그 후로도 며칠 동안이나 휴대폰으로 구박했다. 덕분에 이연은 언제 어디서나 배터리를 완전히 충전해 놓고 다녀야 한다는 산오의 상식론에 거의 세뇌된 참이었다.
“그리고 시시덕거린 거 아니야. 도와준 거라고.”
“또 뭘 도와줘? 네놈은 한순간이라도 자원봉사를 하지 않으면 병에라도 걸리는 건가?”
속닥대느라 대화 내용은 잘 새어 나가지 않았지만, 언제 어디서나 비협조적으로 덩그러니 앉아 있던 산오가 누군가와 몸을 붙이고 소곤거리는 것만으로도 주위의 주목을 모으기에는 충분했다. 제각기 잡담을 나누던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둘 산오와 이연에게로 향했다. 두 사람은 그 사실을 미처 인지하지 못하고—혹은 무시하고— 대화에 열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