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나는 세상에 작별을 고하던 패기가 무색할 만큼 번쩍 눈을 떴다.
수영도 할 줄 몰랐지만, 마음이 급하니 초인적인 힘이 나오는 건 왜일까.
‘하, 언제 또 이렇게 멀리 왔담!’
성실하게 개헤엄을 쳐서 강기슭에 당도했다.
이 추운 날씨에 물이 뚝뚝 떨어지는 몰골이란. 지나가는 사람들이 봤다면 귀신이라 착각할 법했다. 벌써 수군대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이미 미친 여자로 점 찍힌 모양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죽더라도 역대 최고 당첨금이 걸린 이번 로또 결과는 봐야 한단 말이다. 그러니까, 죽는 건 결과 발표 뒤로 미뤄둔 것뿐이다.
제국 헤르본의 황제 막시무스 로텐탈 폰 헤르본은 평민들의 결속을 다지기 위해 고심했다.
그리고 삼 개월마다 돌아오는 ‘제국 로또’, 즉 복권 제도를 시행했다.
신분에 상관없이 모두 복권을 살 수 있어 아주 인기가 좋았고, 황제 또한 그 돈으로 제국을 발전시킬 수 있으니. 이 얼마나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인가.
사실 귀족들이야 내기나 추첨, 도박 등을 거리낌 없이 행했지만, 하루 벌어 겨우 입에 풀칠하는 평민들에게 그런 돈놀이는 말도 안 되는 짓이었다.
그러나 로또 한 장의 가격은 아주 저렴했다.
딱 100 드랑.
빵 한 조각이 10 드랑 정도인 제국에서 단돈 100 드랑으로 삼 개월을 행복할 수 있다니!
당첨금은 모두 현금으로 주어졌는데, 이번 로또는 더욱 특별했다.
그도 그럴 것이 벌써 2년 동안 당첨자가 나오지 않은 탓이다.
일 년에 단 네 번. 그렇게 여덟 번 동안 아무도 당첨금을 가져가지 못해 쌓인 금액이 무려.
1억 드랑.
말 그대로, 잭팟이었다.
*
황궁의 동문은 복권을 사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민원실과 거래소가 위치한 이곳은 제국민에게 공유되는 황궁의 유일한 공간이기도 했다.
물론 수도의 시장이나 다른 지역의 판매소에서도 복권을 구매할 수 있다. 그러나 이곳은 번호가 뽑히는 순간을 직접 확인할 수 있어 인기가 좋았다. 그렇지 않으면 다음 날 신문을 통해 당첨 번호를 확인해야 했으니.
나는 입구에 서서 차분하게 광장을 둘러봤다.
어떤 이들은 복권 종이에 입을 맞추며 행운을 빌기도 했고, 종이를 손에 꼭 쥐고 신께 기도를 드리기도 했다.
미처 구매하지 못한 이들은 앞사람을 향해 서두르라며 고성을 지르고 싸워댔다.
발표까지 5분도 채 남지 않은 상황에 기다란 줄의 맨 끝에 서 있던 남자는 심지어 울기까지 했다.
“젠장! 나는 도전할 기회조차 잃었다고!”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혀를 쯧 찼다.
‘으휴, 그러니까 나처럼 미리미리 사뒀어야지.’
복권 종이를 가지러 집을 다녀올까 고민하기도 했다. 그러나 매일 잠들기 전 하염없이 바라본 번호를 기억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게다가 어차피 안 될 거. 다음 목적지가 다시 말츠강이 되리란 것은 분명했으므로 굳이 집을 들르는 수고를 포기했다.
나는 소란을 피해 광장의 제일 구석에 쪼그려 앉아 몸을 웅크렸다.
젖었던 옷이 찬바람에 얼어붙어 온몸이 덜덜 떨렸다. 제멋대로 엉킨 머리카락이 얼굴에 닿을 때마다 살을 에는 것 같이 따가웠다.
결과를 보기도 전에 얼어 죽겠구나 싶었을 즈음, 커다란 종소리가 광장 한복판을 메웠다.
“추첨을 시작합니다!”
곧이어 황궁 2층 테라스에 관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찬란한 소망을 담아 반짝거리는 모든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우레와 같은 함성 속에 그가 번호가 적힌 공이 들어있는 통을 공개했다.
“1부터 49까지의 숫자 중 6개를 골라야 하는 헤르본의 로또!”
두구두구두구.
“대망의 첫 번째 숫자는! 6입니다!”
“와아아아!”
“다음은 14! … 11! ….”
사람들의 함성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차례로 나온 숫자는….
“29, 33, 5!”
“5, 6, 11, 14, 29, 33! 이번엔 과연 행운의 주인공이 나올까요? 매우 기대되는군요!”
‘5, 6, 11, 14, 29, 33.’
나는 심드렁하게 번호를 되새겼다.
‘잠깐. 5… 6, 11, 14, 2…9… 어…?’
진짜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나는 물고기처럼 눈과 입만 뻐끔거렸다.
추위가 사라지고 피가 빠르게 돌기 시작했다. 갑자기 열꽃이 핀 것처럼 온몸이 뜨거워졌다.
여기저기서 실망한 사람들이 탄식을 내뱉었지만, 정작 내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시공간이 멈춰버린 것 같았다.
‘집에…. 얼른 집에 가서 확인해야 해.’
빠르게 걷던 나는 어느새 달리고 있었다. 먹이를 발견한 한 마리 표범처럼. 아니, 그보다도 더 빠르게.
그리고 어느새 집에 도착해 고이 모셔둔 내 복권 종이를 펼쳐 확인했는데….
“… 5, 6, 11, 14, 29, … 33….”
… 와…. 홀리 ㅆ….
와씨. 이거 진짜 실화냐?
1억 드랑의 주인공.
놀랍게도 나였다.
댕-. 댕-.
그 순간 내 머릿속에 종이 울렸다. 그것은 라튼이 프로포즈를 할 때도 울리지 않던, 아주 밝고 경쾌한 종소리였다.
*
카시안은 다시 한 번 잡화점을 찾았다.
그러나 그곳에 시아라는 없었다.
‘언제나 여기 있을 거라더니.’
일순 정체를 알 수 없는 묘한 감정을 느꼈다. 그래, 이건 그저 오늘 만년필을 다시 사지 못한 불쾌감 같은 거다.
그는 다시 마차에 올랐다.
그런데 마부가 출발할 채비를 거의 다 마쳐갈 즈음, 골목 어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카시안은 무심결에 뒤를 돌아봤다.
구경꾼들로 가려져 있었지만, 그의 눈에는 딱 한 사람만 보였다. 황금빛 머리카락이 물결처럼 흔들리는 그녀, 시아라였다.
흥미가 생겨 주변을 둘러봤더니 남자친구라던 이 역시 함께 서 있었다.
두 사람이 하는 말은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좋지 않은 상황임은 분명해 보였다.
“공작님. 이만 출발하겠습니다.”
“그러지.”
출발과 동시에 마차가 살짝 흔들렸지만, 카시안의 시선은 여전히 그녀를 좇았다.
그녀는 도망치려 하고, 붉은 머리의 남자는 그런 그녀를 자꾸 붙잡고. 그 지지부진한 상황에 차츰 지루함을 느낄 찰나였다.
짜아악-. 하는 거친 마찰음과 함께 남자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 광경을 모두 지켜본 카시안 폰 아델트는 그제야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몬.”
“예, 공작님.”
“말츠강으로 가지. 오랜만에 시원한 바람을 쐬고 싶군.”
“알겠습니다.”
그는 마차의 창에 팔꿈치를 기댔다. 손에 턱을 괴고 창밖을 내다보았지만, 여전히 세상은 재미없고 단조롭기 짝이 없었다.
그때, 열어둔 창틈으로 겨울바람이 불어 들었다. 그러자 그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정말 느닷없는 일이었다.
*
카시안은 말츠강 근처에서 모처럼 여유로운 기분을 만끽했다.
날이 추우니 따뜻하게 끓인 포도주라도 한 잔 곁들이면 풍류에 아주 좋을 것 같았으나, 강기슭의 잔디에 홀로 앉아있는 주제에 그게 웬 청승인가 싶어 금세 포기했다.
차라리 그대로 잔디밭에 드러눕는 것을 선택했다.
그러나 포도주를 포기한 것 치고는 아주 좋은 선택이었다.
바람 때문에 머리카락이 얼굴을 간지럽혀서 그런가. 갑자기 왜 기분이 좋지.
‘여기 오길 잘했어.’
그는 슬쩍 눈을 감았다.
그의 삶엔 아무것도 흥미로울 것이 없었다. 마음 놓고 웃어 본 적이 언제였을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애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그의 삶은 의미를 잃었고 살아갈 동력을 잃었다.
그런데 잡화점의 그 여자가 제 연인의 따귀를 때리는 장면을 보자 왜 이렇게 웃음이 나오는 것인지.
아무래도 시장 한복판에서 맞고 있던 남자가 우습기도, 처량하기도 한 모양인가보다. 그것 말고는 그 남자의 불행에 자기가 미소 지을 이유가 없으니.
게다가 이 나른한 고요함은 수도에서 흔치 않은 것이었다. 그는 그저 이 순간을 즐기기로 했다.
그가 다시 한 번 만족감을 드러냈을 때, 반대편 강가 저 멀리서 고요를 깨는 인기척이 들려왔다.
카시안은 감았던 눈을 떴다.
그리고 곧바로 알아차렸다.
물속으로 발을 내디디고 있는 금발의 여자가, 시아라. 그녀라는 것을.
그는 잘못 본 것인가 싶어 수차례 눈을 비볐다.
그러나 분명 그녀였다. 게다가 멈출 생각도 없어 보였다.
“… 시… 시아라? 멈춰! 멈추라고!”
벌떡 일어선 그가 외쳐보았지만, 지금 그녀에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손을 뻗자 그의 손바닥에서 검은 기운이 일렁거렸다. 이 상황에서는 어떤 쓸모도 없을, 그런 저주받은 재능이었다.
그는 짜증스럽게 다시 주먹을 움켜쥐었다.
“하…!”
카시안은 곧바로 물에 뛰어들었다. 헤엄을 쳐서 어떻게든 그녀와 거리를 좁혀보려 했다. 그러나 생각보다 거리가 멀었다.
절망적이었다.
이번에도 구하지 못한다면…!
멀리 그녀가 점점 가라앉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안 돼!”
무기력한 그녀의 모습에서 트라우마처럼 남은 어떤 잔상이 겹쳐 보였다. 그의 눈에서 이유 모를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하아…. 안… 돼…!”
그런데. 세상이 고요해진 그 순간, 물속으로 쏙 들어갔던 시아라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리고는 다급하게 강기슭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
…….
………?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야?
그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멈추고 자신의 두 눈동자만 요란하게 껌뻑이는 듯했다.
카시안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튀어나왔다.
“뭐… 뭐야?”
간 거야? 진짜로?
하. 하하. 하하하하.
불현듯 그를 둘러싼 모든 공기가 민망해졌다. 얼음장같이 차가운 물마저 어색하게 그를 비껴가는 것 같았다. 머쓱하게.
주책맞게 흘러내렸던 눈물이 강물 위로 퐁당, 떨어졌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크던지. 눈물 한 방울일 뿐인데, 돌덩이라도 떨어진 듯 강렬했다.
그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동시에 손바닥 위에서 흔들거리던 검은 기운이 온몸을 휘감았다.
“시아라….”
아아, 진짜.
정말이지 저 여자는 이상하다.
하는 행동이 이상해서 화가 나고, 그 애와 이름이 같아서 신경 쓰인다.
그 애를 닮은 황금색 머리카락도, 사파이어 보석 같은 푸른 눈도 모두 다 짜증난다.
시아라. 저 애는 정말이지 거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