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나는 하루아침에 주인공이 되어버렸다. 그것도 아주 어마어마한.
며칠 내내 신문을 확인했지만, 이번 회 차의 당첨자는 딱 한 명뿐이었다.
어떻게 해….
그거 나잖아. 나라고!
첫날엔,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싶어 그저 어안이 벙벙했고. 이튿날엔 벅차올랐다. 온종일 가슴이 쿵쿵 뛰어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제국의 시계탑 꼭대기에서 줄 없이 번지점프를 한다 해도 이보다 심장이 터질 것 같지는 않았다.
셋째 날인 오늘은 기쁨과 근심이 동시에 찾아왔다.
그 돈을, 어떻게 안전하게 찾아오지?
1억. 세금을 제외해도 수천만 드랑 일 텐데. 감히 상상도 되지 않는 금액을 현금으로 받아와야 한다니….
현실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숫자에 갑자기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당첨금을 찾아오는 길에 개죽음이라도 당하면…!
다행히 거래소는 황궁 내부에 있으니 문제 될 것이 없었다. 보안은 철저할 테니. 문제는 다시 집으로 돌아올 때였다.
나는 짱구를 굴려 내 안전을 책임질 마뜩한 방법을 고심했다.
그렇게 일주일 뒤. 드디어 황궁 거래소로 향했다.
*
나는 얼굴을 다 가릴만한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눈 아래까지 스카프를 둘렀다. 내가 가진 드레스 중 최대한 기품있고 우아한 것으로 골라 입었다.
그 위로 어두운 코트를 걸치고, 한 손에는 기다란 목검을 들었다.
“이걸로…, 정말 될까…?”
드레스에 목검이라니. 퍽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풍성한 드레스 자락에 설핏 가려지긴 한다지만. 유심히 본다면 눈에 띄지 않을 리 없었다.
그래도 보호할 만한 수단이 한 가지는 있어야 했으므로, 없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냐는 생각이었다.
다행히 나는 목검이 익숙했다.
로지 아줌마의 남편 그렉 아저씨는 잡화점 위층에서 체육관을 운영했는데, 그곳에서 내가 꾸준히 수련했던 덕분이다. 물론 수련이라고 해봐야 그냥 허공에 검을 휘두르고 짚단을 내리치는 정도였지만.
그러니까, 사실 오늘이 첫 실전인 셈이었다.
집 밖으로 나와 최대한 태연하게 걸었다. 어차피 아직 돈을 찾은 것도 아니니까, 벌써 긴장하지 말라고 최면을 걸며.
‘차라리 내가 도둑이라고 생각하자.’
그래, 난 도둑이야. 아주 난폭하지!
너희가 날 더 조심해야 할 걸?
‘나는 도둑이다. 무시무시한 도ㄷ….’
“이봐요.”
“아씨! 깜짝이야!”
마음속으로 굳세게 되뇌고 있을 때, 한 남자가 나를 불러 세웠다. 덕분에 심신을 다스리던 최면이 깨져버렸다. 젠장.
“뭐 합니까?”
“네, 네? 누, 누구세요?”
“참나.”
남자가 팔을 들어 옷소매를 보여줬다.
“여기, 잉크요.”
“아! 그때 그 손님이셨구나.”
그는 나를 의문스럽게 쳐다보며 고개를 삐뚜름하게 기울였다.
“어쩌죠. 제가 지금 좀 바빠서요. 다음에 다시 대화해도 괜찮을까요?”
“지금 그쪽이 얼마나 수상해 보이는지 알아요?”
“제가요? 그, 그럴 리가요! 화, 황실거래소에 볼일이 있을 뿐입니다!”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그러자 남자가 미간을 좁혔다.
“거래소가 아니라 치안대에 먼저 끌려갈 것 같은데요.”
나는 목검을 슬그머니 뒤로 가리며 천연스럽게 웃었다.
“후, 훈련을 좀 하다 왔거든요. 그럼, 이만.”
최대한 멋지게, 아무렇지 않게 인사하려 했으나…. 너무 긴장한 탓에 목소리에 떨림이 묻어나왔다.
그것을, 남자가 눈치채지 못했길 바라며 그저 발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눈앞에 황궁의 동문이 보였다. 그 길목에서 몇 번이고 주머니안의 손을 꾹 쥐어가며 그 안에 든 로또 종이를 확인했다.
부스럭거리는 마찰음이 들릴 때마다 안도의 숨이 내려앉았다.
그러나 내 등 뒤로 끈질긴 시선이 느껴졌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뒤를 돌아보자, 역시나 그는 계속 같은 자리에 있었다. 벽에 기대 팔짱을 낀 채로, 나를 노려보며.
‘내가 당첨자인 거 걸렸나?’
돈을 찾기도 전에!
그 눈길은 나를 꽁꽁 옭아맸다. 우아한 귀부인처럼 거래소에 들어가고 싶었으나, 왼발 왼손, 오른발 오른손이 함께 흔들리는 병정 인형에 빙의된 것 같았다.
*
생각보다 간결한 확인 절차를 마치고 당첨금을 받았다. 나는 하루 종일 걸릴 줄 알았는데, 세 시간 만에 해결했으니. 정말 ‘생각보다’ 간결한 셈이었다.
사실 돈을 수령하는 데엔 삼십 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으나, 어찌나 들어야 할 이야기가 많던지….
도박 중독, 마약 중독, 거기에 투자도 중독이라며 아주 꼼꼼하고 단호한 당부의 말을 전해 듣고 나서야 거래가 마무리되었다.
그리하여 세금을 내고도 손에 쥔 돈이 무려 칠천만 드랑!
이걸로 몰락한 내 가문은 다시 살아났다.
거래소에서는 내 신분을 밝힐지, 혹은 숨길지 선택하게끔 배려했다.
뭘 물어. 당연히 숨겨야지!
물론 소문이 퍼지는 것은 삽시간일터. 그 전까지 나는 로또 당첨자가 에벨의 딸이라는 사실을 최대한 꽁꽁 감출 예정이다.
내가 무슨 일을 당할 줄 알고?
나는 치마 안쪽에 둘러맨 주머니에 수표로 받은 당첨금을 꼭꼭 숨겨 넣고 밖으로 향했다. 이미 바깥은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진짜 전쟁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아니나 다를까, 벌써 몇몇 사람들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다.
돈이 담긴 주머니의 허리끈을 더 강하게 조여 매고 걸음을 재촉했다. 목검 역시 더욱 단단하게 틀어쥐었다.
웬만하면 큰 도로를 이용했으나 어쩔 수 없이 지나야 하는 골목 하나를 마주했다.
그리고…. 역시는 역시였다. 그곳에 들어서자마자 슬금슬금 몰려드는 그림자가 보였다.
다행인 점은 아까 돈을 찾기 전보다 오히려 지금이 더 차분하다는 것이었다.
“이봐, 아가씨.”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목소리의 주인을 향해 뒤돌았다.
“무슨 일이시죠?”
호기롭게 대답했으나!
저쪽은 시커먼 장정들이 셋이나 있었다. 약간 당황스러웠다.
이건 반칙이지! 한 명이었어도 목검으로 때리고 잽싸게 튈 텐데!
“가방에 든 거, 돈이야?”
젠장, 그냥 호위 용병 고용할걸!
나는 안이했던 나를 타박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진정하려 애썼다.
‘쫄지 말자. 이것보다 더 최악도 상상했었잖아.’
그래. 계획한 대로만 하면 돼. 여기서 죽으면 개죽음이야!
여차하면 돈을 찢으며 협박이라도 해야겠다 생각할 때, 사내들이 점점 가까워졌다.
“이번 판의 유일한 당첨자. 너 맞지?”
“불쌍한 사람 돕는 셈 치고 이리 주는 게 어때?”
“우리도 양심이 있으니. 나눠 쓰자고.”
한 걸음씩 다가올 때마다 땅바닥이 지진이라도 난 듯 쿵쿵거렸다.
나는 다급히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어 무언가를 꺼냈다.
“바, 받아라. 이놈들아!”
냅다 남자들의 발밑으로 그것을 집어 던졌다.
펑, 펑, 퍼엉!
그것이 땅바닥에 부딪힐 때마다 요란한 소음을 내며 터졌다. 심지어 번쩍, 거리며 하얀빛까지 내뿜어댔다. 당황으로 물든 남자들이 다시 한걸음 멀어졌다.
“이, 이게 지금 뭐야!”
그들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나는 끊임없이 그것을 바닥에 내던졌다.
잡화점의 최고 인기상품. 어린아이들이 부모님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으며 사달라고 애원하는 바로 그것! 콩알 폭탄을.
남자들은 내 콩알 탄 폭격에, 달군 철판에 볶아지는 콩처럼 이리저리 튀었다.
한쪽 발을 떼면 다른 발 근처에서 계속 터져대는 탓에, 왼발 오른발을 번갈아 가며 끊임없이 놀려댔다. 너무 빨라 발이 안 보일 정도였다.
어찌나 호들갑을 떨던지. 심각한 상황임에도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일 뿐이었다. 그들은 그게 곧 장난감 폭죽임을 깨닫고 그새 헛기침을 하며 다시 무시무시한 표정을 지었다.
“호오, 그럼 이건 어떠냐!”
나는 곧바로 챙겨 온 성냥을 바닥에 그어 또 다른 폭죽들을 태웠다.
이번엔 불꽃이 화르륵 타들어 가는 꽤 화려한 물건이었다.
그걸 또 그들의 발밑으로 냅다 집어 던졌다. 그러자 새하얀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며 남자들의 시야를 가렸다.
난데없이 앞이 보이지 않자 그들이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이번엔 불꽃까지 타들어 가고 있으니.
남자들이 잔뜩 움츠러들었다.
나는 그때를 놓치지 않고 바닥에 있는 모래 한 줌을 손에 쥐었다. 주저하지 않고 그들을 향해 날렸다.
“으아아악! 그만해! 미쳤어?”
갑자기 날아든 모래바람에 그들이 손발을 휘저었다.
이제 마지막 일격을 날릴 차례였다.
“흐아아압!”
나는 목검을 단단히 쥐고 온몸에 힘을 실었다. 거기엔 그간 쌓여온 설움과 울분이 담겨있었다. 곧이어 두더지를 때려잡는 기분으로 머리통 한 대씩을 가격했다. 그러자 남자들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나는 그 길로 골목을 빠져나왔다. 서둘러 모자와 스카프를 벗어 쓰레기통에 버렸다. 목검도 마찬가지였다.
입고 있던 코트도 벗어들고 묶고 있던 머리마저 풀어 내렸다.
그렇게 아무 일 없다는 듯 돌아선 순간이었다.
“알아서 잘 하시네요?”
내 이마가 남자의 가슴팍에 푹 부딪혔다.
“아흑!”
이마를 매만지며 고개를 들어 남자의 얼굴을 마주했다. 또 그 손님….
그때, 골목에서 삐요옹, 하고 길게 폭죽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미 땅거미가 진 골목 위로 빛이 번쩍였다.
머리카락도 눈동자도 온통 새까만 이 남자가, 폭죽에서 쏟아져 나온 색색의 불빛에 녹아들었다. 붉은빛, 노란빛, 초록빛, 푸른빛 할 것 없이. 어떤 색이 그를 밝히든 그는 그 빛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순간, 이 남자가 무척이나 신비로워 보였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이 맞을까 싶을 만큼 아름다웠다.
그가 한쪽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렸다.
“매사에 도움이 필요 없으신 분인가 봐요.”
나는 입이 벌어진 것도 모른 채 남자의 얼굴을 감상하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 네?”
그가 골목을 향해 얼굴을 까닥였다.
“저기.”
“보, 보셨어요?”
이번엔 아래위로 끄덕였다.
“필요하면 도와드리려 했는데. 전혀 끼어들 틈이 없기에. 매번.”
나는 그가 하는 말이 무슨 소린가 싶어 의심스럽게 올려다봤다.
“저 남자들, 저렇게 두면 또 찾아올지도?”
남자의 시선을 따라 골목을 보자 이제 진정이 된 듯 꿈틀거리기 시작하는 세 사람이 보였다.
“어, 얼른 가야겠어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도망치기 위해 그를 지나쳤을 때였다. 갑자기 날카로운 비명이 들려왔다.
화들짝 놀라 우뚝 멈춰 서서, 휙 고개를 돌렸다.
손님이었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미묘한 웃음을 짓고 있던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와 동시에 골목의 남자들이 또다시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심상치 않은 기운에 골목 앞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엔 넝마를 입고, 아니지. 원래 입고 있던 옷들이 새카맣게 타들어 간 채 기절한 남자들이 있었다.
나는 양손으로 입을 탁 틀어막았다.
설마 내 폭죽의 위력이…?
이렇다고? 어린이 용인데….
로지 아줌마와 내가 지금껏 무얼 팔고 있었는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
손님이 싱긋 웃었다.
그게 아니야. 아무래도 이건….
“… 마법사…?”
“네.”
애써 틀어막았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이 제국에서 마법사를 만나기란 삼대가 덕을 쌓아야 가능하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몹시 어려운 일이었다.
마력을 가지고 태어나는 이들도 매우 드문데다가, 오래전 악의 세력으로 몰려 몰살당한 사건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그들 대부분은 존재를 감췄다.
물론 아예 모습을 드러내고 활동하는 마법사도 있었지만, 손에 꼽을 정도였다.
아무튼. 그런 마법사가 지금 내 앞에 있어?
나는 로또를 두 번 맞은 게 분명하다. 이걸로 내 행운은 다한 것일까.
믿을 수 없는 일에 곧바로 자세를 공손히 바꿨다. 이건 절대 놓쳐서는 안 될 기회였다.
“손님.”
“네.”
“제 호위로 당신을 픽하겠습니다.”
남자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