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이른 새벽에도 수도의 기차역은 사람들로 붐볐다.
저 멀리서 기차가 들어오자 파란 모자를 쓴 역무원이 호루라기를 불었다.
나는 몸을 일으켜 대합실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 문 앞에서, 동냥 중인 한 소년을 마주했다.
문득 내게 은인과도 같은 그녀가 떠올랐다.
일을 시키겠다며 나를 잡화점에 데려갔지만, 막상 벽난로 앞에 앉혀두고는 빵을 내어주시던 로지 아줌마.
그녀에게 전할 편지를 쓰던 그저께 밤, 나는 종이가 젖지 않도록 애써야만 했다. 당장 모든 사정을 설명할 수 없는 내 신세가 어찌나 한탄스럽던지.
그러나 갑작스러운 작별인사에도, 아줌마는 나를 말없이 안아주셨다.
레트랑 부인을 피해 새로운 보금자리로 옮기는 데는 사흘도 채 걸리지 않았다.
어차피 난 수도를 떠날 생각이었고, 내가 가지고 있는 돈이라면 외곽에 남아도는 저택 어디든 살 수 있었으니까.
예전에 살던 에벨 저택을 다시 구매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 가서 뭘 한단 말인가.
아빠도, 엄마도 없는 그 집을.
제국에서 한참 성황리에 공연 중인 ‘나 홀로 집에’ 같은 연극 따위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니까.
나는 이제 그저 평온한 삶을 원한다고!
그래서 내가 선택한 집은….
제국의 북부 지역 아델트에 자리한 방이 네 개 딸린 집이었다.
왜 하필 네 개냐 물으신다면, 그냥…. 세 개는 적어 보이고 다섯 개는 많아 보여서랄까?
게다가 다락이 없는 단층 주택이라는 점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그거 은근히 귀찮단 말이야.
황궁처럼 커다란 저택에 사는 것이 하등 쓸모없다는 것을 잘 알기도 했고.
곧이어 기차의 문이 열렸다.
나는 소년의 모자 속에 동전 몇 닢을 내려놓고, 예약했던 자리를 찾아갔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일등석의 안락함에 입꼬리가 꼬물꼬물 올라갔다.
내 옆자리는 옷과 물건 몇 개를 대충 구겨 넣은 짐가방 하나가 차지했다. 10년을 넘게 한 곳에서 살았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적은 양이었다.
새 시작을 기념하며 맨몸으로 떠날까 했지만, 그나마 엄마와의 추억이 깃든 물건을 조금 담았다.
추억이라니….
솔직히 우습기도 했다.
이 집에서 챙겨온 물건들은 모두 엄마의 가장 나약했던 시절을 대변했으니까.
그래도 이상한 일이었다.
라튼과 관련이 있던 물건들은 모조리 버릴 수 있었지만, 엄마를 떠올릴 수 있는 것들은 어떤 것도 버릴 수 없었으니.
눈물이 나려는 것을 꾹 참고 기차의 창문을 조금 열었다.
레트랑 부인에게 돈다발을 집어 던졌던 날, 아니나 다를까 밤늦게 라튼이 집 앞으로 찾아왔다.
내가 문을 열어주지 않자 그는 쉴 새 없이 문을 두드리며 화를 냈다.
“시아라! 문 좀 열어 봐. 오늘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시아라!”
“당장 문 열어!”
“네가 어떻게 우리 엄마한테 그럴 수 있어?”
“시아라, 너 진짜 너무 한 거 아니야? 열어! 이거 당장 열라고!”
한참을 혼자 씩씩대던 라튼은 내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제풀에 지쳐 되돌아갔다.
무섭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솔직히 그가 문이라도 부수고 들어올까 겁났다.
그가 돌아가고 나서도 혹시 다시 찾아올까 봐, 나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이불 속에서 달달 떨리는 몸을 끌어안고, 귀를 막은 채로.
그러나 한편으로는, 제 엄마 말만 듣고 내게 분노하는 그 행태가 어찌나 꼴사납던지. 우스워서 헛웃음이 나왔다.
그러고 보니 라튼도 그의 엄마도 내게 끝까지 사과 한마디 없었네. 어쩜 그런 것까지 제 엄마를 쏙 빼닮을 수 있는지.
그걸 좋다고 여태 만난 나는 또 뭐고.
그 밤은 공포와 후회로 얼룩져있었다.
그다음 날은 더 웃겼다.
어제는 분노하던 쓰레기가 오늘은 울부짖는 쓰레기가 되어 돌아왔으니.
“흐으윽, 시아라. 제발 문 좀 열어 줘. 응?”
“흐윽. 난 너 없으면 안 돼.”
“너도잖아. 너도 나 아니면 안 된다고 그랬잖아.”
“시아라. 네가 원하면 나 우리 엄마랑 연도 끊을 게. 제발 나 좀 봐줘. 제발….”
오. 라튼의 입에서 제 엄마와 연을 끊겠다는 소리가 나올 줄이야.
그건 좀 놀랍다. 발전했네.
그래도 어쩌겠어.
이젠….
미안, 라튼 레트랑.
정말로 널 사랑했는데.
나도 너뿐이었는데.
손바닥 뒤집듯 하루아침에 변해버린 내 마음에 나도 조금 놀랐어. 그게 왜 하필 우리의 사랑이었을까.
내가 이렇게 쉽게 변하네.
잘 지내.
기차 창문에 기대고 있던 팔위로 기어이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졌다.
나는 그 눈물의 의미를 잘 알고 있다.
미련이었다. 옷으로 한번 슥 닦아내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릴.
*
처음 집을 고를 때, 북부의 아델트와 남부의 호페른을 두고 어느 곳으로 가야 할지 엄청나게 고민했다.
아델트는 제국에서 가장 춥고 땅이 척박하기로 유명해 인구가 적은 편이었다.
반면에 어딜 가나 드넓은 바다가 펼쳐진 호페른은 따뜻하고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관광지였다.
이런 상황이 오면 대다수는 살기 좋은 호페른을 선택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꽤 비사교적인 사람이다.
10년을 잡화점에서 생글생글 웃으며 손님들을 맞이했지만, 그것은 나의 농익은 사회생활 기술이었을 뿐. 사실 난 벽을 치는 것에 아주 익숙하고 무수히 많은 가시를 품고 사는 사람이다.
게다가 도망… 치는 것이나 다름없는 내 처지가 아니던가.
뭐, 걸린다고 켕기는 게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런고로 아델트는 최고의 선택이었다.
아델트는, 창문만 열면 이웃 주민과 인사를 나누고, 건너편 집에 새로 장만한 살림살이까지 확인 가능한, 빽빽한 수도와는 새삼 다른 곳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이거는 좀….
‘근처에 사람이 살기는 하는 걸까?’
부동산업자는 내가 산 집을 중심으로, 이웃집이 옹기종기 모여 작은 마을을 이루고 있을 거라고 했다. 음…. 아무래도 그분은 옹기종기의 뜻을 모르는 게 분명하다.
우리 집이 중심에 있는 건 맞긴 하나, 오른쪽에 한 채. 맞은 편에 한 채. 뒤쪽은 언덕.
끝이었다.
옆집은 정원관리를 진즉 포기한 듯했다. 맞은 편에 있는 집은 폐가 수준이었다.
마을이라더니, 이렇게 을씨년스러울 데가 있나. 나는 왠지 부동산 업자에게 낚인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비록 내가 사색을 즐기며 조용히 살고 싶다 꿈꾸긴 했지만, 이렇게 고독사해도 아무도 발견 못 할 정도로 외롭고 싶던 것은 아니었다.
흐음, 내가 이리도 모순적인 사람이었던가.
‘나 잘 선택한 거 맞겠지?’
어느새 집 앞에 도착했다.
그러나 걱정과 다르게 아주 깔끔한 집 상태에 나는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외벽도 떨어져 나간 곳 없이 튼튼했고 집도 큼직하니 시원시원했다.
집 내부도 어쩜 이렇게 내 마음에 쏙 들 수 있는 걸까?
푸른색 벽지와 노란색으로 군데군데 포인트를 준 장식들은 두말할 것 없이 내 취향이었다.
‘이게 진짜 내 집이라니…!’
너무 좋아!
*
집이 이미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던 덕분에 내가 할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급히 필요한 자잘한 가구와 물건 몇 개를 새로 채워 넣고 여유를 만끽했다.
나는 책꽂이에서 책 한 권을 빼내어 테라스에 위치한 안락의자에 앉았다.
뜨겁게 끓인 향긋한 허브차를 한 모금 후루룩 마시는 일상은 참으로….
“아, 뜨. 뜨거워!”
행복한 것이었다.
물 온도 조절에 실패하긴 했지만.
나는 테이블 위에 찻잔을 내려놓고 책을 펼쳤다. 문득 내 모습이 너무 낯설어 작게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아무 걱정 없이 책을 읽던 게 언제였더라.’
매일 밤 내 곁에서 책을 읽어주던 유모…. 아무래도 그게 마지막인 듯했다.
그러고 보니 에벨 저택을 떠난 후로 그녀의 소식을 들은 적이 없네. 유모는 잘 지내고 있을까?
허브차가 완전히 차게 식었을 즈음, 나는 앞으로의 내 미래에 대해 고민했다. 돈이 많으면 고민 따위는 없을 줄 알았는데!
하지만 당첨금을 찾아 돌아오던 날, 나는 뼈저리게 깨달았다.
내 인생 첫 번째 행운. 로또 당첨.
두 번째 행운. 마법사와의 조우.
그것으로 모든 운을 다했다고. 살아생전에 이보다 더 큰 행운이 또 찾아올까?
아니! 장담컨대, 그럴 리 없다.
하나를 주고 두 개를 가져가는 것. 나를 이 세상에 내놓은 신은 내게 그러했다.
내가 얼마나 아등바등 살아왔건 상관없이 어떻게든 빼앗아갔다.
가문을 주고, 아빠와 엄마를 데려간 것처럼.
나는 여태 그게 공평인 줄 알았다. 내 신세에 하나라도 받았으니 감사하다 여기며 살아왔다.
그런 내게 이런 행운은 경고나 다름없었다. 한 번에 두 개를 줬다는 건 순식간에 네 개도, 여섯 개도. 심지어 열 개도 뺏어갈 수 있다는. 그런 경고.
그러나, 이제 아무것도 빼앗기고 싶지 않다. 우연히 굴러들어 온 이 행복이 무너지는 것을 무기력하게 두고 볼 수는 없다.
나는 직감했다. 이제 내가 나를 지키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할 거라고.
‘근데 나를 지키는 게 뭘까?’
체력 단련? 아니면 공부? 돈으로 호위 기사들 고용해서 여기저기 세워두면 될까?
짧은 귀족의 혜택을 누린 후, 가장 역할을 해야만 했던 나의 딜레마였다.
한참 고민 후, 일단 운동과 공부, 둘 다 시작하기로 했다. 너무 허약해도, 너무 멍청해도 안 될 것 같았기에.
다행히 그렉 아저씨의 체육관에서 수년간 검술을 배운 경험이 있기에, 전자는 퍽 수월했다.
그렉 체육관에서 허수아비 같은 볏단을 세워두고 실컷 내려칠 때마다 얼마나 산뜻한 쾌감을 느꼈는가.
나는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 방 네 개 중 하나를 체육관처럼 꾸몄다.
방 한구석에는 연습용 목검과 도복이. 벽 한쪽에는 돈이 없어 침 흘리고 바라보기만 했던 진검을 구입하여 폼 나게 걸어두었다.
쓸 일이야 없겠지만 저런 거, 해보고 싶었다고!
앞으로 멋진 검들 잔뜩 모을 거야.
어느새 그 방 한가운데에 선 나는, 신이 나서 목검을 휘둘렀다. 얄미운 레트랑 부인과 라튼을 생각하며 볏단을 때리자 더욱 기운이 넘쳤다.
그러길 한참,
“아…. 이제 공부도 해야 하는 데.”
난 이제 멋지게 살 거니까. 예의범절도 배워야 하고, 상식도 알아야 하고…. 공부도 게을리 할 수 없지!
검을 정리하고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다가, 공부하려면 학습도구가 필요함을 알았다.
그래. 쇼핑을 가자!
*
“내가 뭘 사러 나왔더라?”
으음, 분명 공부를 위한 준비물을 산다고 했던 것 같은데….
본분을 망각한 내 양손엔 어느새 온갖 잡동사니로 가득한 쇼핑백이 들려있었다. 책과 만년필, 종이 따위를 제외한 모든 것이 있는 듯했다. 그러나 후회는 없었다.
“원래 인생이 이런 거지.”
그럼 그럼. 이것도 다 공부지 뭐.
기대보다 훨씬 재미있었던 쇼핑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찰나, 낯선 목소리가 나를 불러세웠다.
“잠시만요, 영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