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아델트 상업지구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컸다.
이 지역에 부자들이 많이 산다는데, 거짓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거리마다 고급 부티크가 줄지어 늘어서 있고, 사람들이 입은 옷도 하나같이 세련되고 기품이 넘쳐흘렀으니. 차도 위를 오가는 마차마저 그 장식이 예사롭지 않았다.
수도에 살던 시절, 나는 시장을 벗어날 일이 없었다. 그곳에서 매일 보통의 사람들과 함께하는 보통의 하루를 보냈다.
그러나 이 거리에 서서 그때를 되돌아보는 순간 깨달았다. 당연했던 삶은 온통 흰색과 검은색으로만 뒤섞인 무채색이었음을.
여긴 이렇게 화려한 조명이 이 거리의 모두를 감싸는데!
이런 눈부신 것들을 여태 모르고 살았다니.
고급상점 앞에서 들어가기를 망설였다.
아버지 사업이 망한 이후, 명품을 걸쳐볼 일이 없었기에, 도무지 그곳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라서였다. 귀족의 생활은 고작 2년이었고, 배움의 기간은 길지 않았다.
혹시 내가 알아야 할 예의나, 의상 코드가 있다거나. 뭐 그런 규칙들이 있진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나는 내가 입은 옷을 내려다보았다. 하얀 천에 금색 꽃이 수놓아진 원피스와 어깨에 걸친 푸른 모직 숄.
“너무 소박한가?”
이렇게 입고 들어가도 괜찮은 걸까?
나는 한 부티크 앞에서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아무런 확신도 없는 발걸음이었다.
들어가자마자 한 직원이 나를 맞아했다. 나이가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 여자는 척 봐도 고급스러운 옷을 걸치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레이디. 찾으시는 물건이 있으신가요?”
“음…. 그러니까 그게….”
뭐가 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말해야 하지? 애초에 난 뭐가 필요한 거야?
내가 쭈뼛거리며 두리번거리자 여자의 이마에 팍 주름이 졌다. 그녀는 나를 아래위로 천천히 훑어봤다.
“이 르만 부티크의 모든 의상은 오직 최고급 원단만을 이용해 만든답니다. 따라서 가격이 아주 비싸지요.”
“역시, 그렇겠죠….”
“네.”
“흐음, 그러면….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다 사도 괜찮을까요?”
“네? 손님, 지금 뭐라고….”
“아, 그러면 안 되는 건가요? 혹시 한 번에 하나씩만 사야 한다거나….”
“죄, 죄송합니다! 어, 어느 가문에서 나오신 아가씨이신가요? 동행인도 없이 혼자 오셔서 제가 몰라 뵌 모양입니다!”
방금까지는 떨떠름한 표정이던 직원이 갑자기 한쪽 무릎을 꿇고 예의를 차렸다.
뭐야, 이거 꽤…. 짜릿짜릿해!
나는 신분을 밝히는 대신 그냥 웃어 보였다.
“다음번에도 꼭 이 레이첼 르만을 찾아주세요. 실수 없이 모시겠습니다.”
내 치수를 체크한 후, 예약한 드레스와 구두만 해도 마차 두 대로 모자랐다.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부터는 아주 쉬웠다. 나는 온갖 상점을 돌며 후회 없이 질렀다.
어디 옷뿐이랴. 그게 장식품이든, 음식이든 뭐든 상관없이. 눈에 보이는 족족 다 쓸어왔다.
써도 써도 줄지 않는 돈을 가진 자의 행복이란 이런 걸까? 근심, 걱정 없는 삶이 이렇게 편안한 거였다니!
짜릿해! 늘 새로워! 돈이 최고야!
돈이 많으면 인생은 호락호락하구나. 나는 오늘 새로운 진리를 깨우쳤다.
마침내, 또 다른 이벤트를 내게 선사해 준, 한 부티크 앞에 섰다. 거리의 제일 끝에 위치한 부티크였다.
그곳에서 처음 서 있던 거리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낯설던 거리의 풍경이 더는 신기하지 않았다. 쇼핑 몇 번에 내가 이 거리의 일부가 된 것 같았다.
나는 흡족하게 웃으며 부티크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느덧 내 행동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졌다.
직원 서넛이 달라붙어 내 몸의 치수를 재고, 나는 손가락으로 척척 옷을 가리키며 주문했다.
만족스럽게 예약을 마치고 나가려는 그때, 한 귀족여인이 나를 불러 세웠다.
“잠시만요, 영애.”
“저요?”
그녀는 나처럼 가벼운 원피스 차림이 아닌 화려한 드레스를 갖춰 입고 있었다.
챙이 넓은 모자 탓에 얼굴 반쯤이 가려져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잘나가는 가문의 귀족 아가씨처럼 보였다.
“무슨 일로 저를….”
“저는 트리탄 후작 가의 차녀 엘리나입니다. 아까부터 지켜봤는데, 꽤 관심이 가서요. 혹, 영애의 이름을 알려주실 수 있나요?”
귀족이 먼저 신분을 밝히는데 상대방이 침묵할 수는 없는 일이기에, 나는 가문을 숨긴 채 이름만 말했다.
“… 시아라라고 합니다.”
“이 거리에 있는 부티크의 옷을 하루아침에 다 사들일 정도로 돈은 많으나, 가문은 밝히지 못 한다…. 그것도 사용인도 없이 혼자서.”
엘리나는 펼쳐 들고 있던 부채를 가지런히 오므렸다.
“둘 중 하나겠네요. 떳떳하지 않거나, 진짜로 가문이 없거나.”
나는 떳떳했고 가문도 있다.
그러니 그녀의 추측은 둘 다 틀렸지만,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뭐, 상관은 없습니다. 저도 꽤 비밀스러운 사람이거든요. 게다가 원래 비밀은 많을수록 재밌는 법이잖아요?”
그녀는 한쪽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뒤에 선 시종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시종이 화려한 카드 한 장을 내게 건넸다.
“초대장이에요. 이 제국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곳으로 오라는.”
“이걸 왜 저한테 주시나요?”
“말했잖아요. 재밌을 것 같다고.”
“…….”
“기다릴게요.”
그녀는 부티크를 나갔다.
윤기 반지르르한 그녀의 분홍색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꼈다. 걸음걸이 하나하나에 배어 있는 기품과 그녀 옆에 든든히 선 시종들.
‘저게 진짜 귀족이구나….’
나는 건네받은 초대장과 그녀의 뒷모습을 번갈아 바라봤다.
비밀 무도회….
여기에 가면 저런 우아한 귀족들이 잔뜩 모여 있겠지?
*
어느덧, 엘리나에게 초대받은 무도회가 열리는 날이 다가왔다.
나는 집에서 출발하기 전 초대장을 다시 한 번 읽어보았다.
가면무도회의 규정이 있었다.
1. 엘리나 트리탄의 비밀 무도회는 일주일에 한 번씩, 그녀 소유의 별장에서 열린다.
2. 밤 아홉 시부터 다음 날 아침 해가 뜰 때까지 파티는 멈추지 않는다.
3. 초대되는 사람들은 고위 귀족 가문의 일원이거나 혹은 그에 상응하는 부를 갖춘 이들이다.
4.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전부 비밀이며, 신분을 숨길 가면을 착용하는 것이 필수이다.
“도대체 이 파티에선 뭘 하는 걸까?”
시간이 지날수록 엘리나가 나에게 이런 초대장을 건넨 이유가 의문스러웠으나, 실제는 호기심이 더 컸다.
나는 이런 무도회에 참가해 본 적이 없었기에, 그 안에서 벌어질 일들이 궁금하고 설렜다. 나도 모르게 내 마음속엔 상류 사회에 대한 갈망이 싹트고 있었나 보다.
점심이 지났을 무렵 나는 상업지구로 향했다.
파티용 드레스를 하녀 없이 혼자 챙겨 입기엔 무리가 있는데다가, 전용 마차가 없는 탓에 그곳에서 도심 마차를 이용해야 했으므로.
마땅히 귀족이라면 하인을 고용해야 했지만, 사실 집에 사람을 두고 부리는 일은 마음이 영 불편했다. 나중에 정말 필요한 순간이 오면 그땐 생각해 봐야겠지만.
르만 부티크의 레이첼은 나를 보자마자 입구까지 달려 나왔다.
첫 방문과는 완전히 다른 대우에 나조차도 깜짝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주 맑게 웃었다.
“오늘 이 레이첼이 아가씨를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나는 연한 하늘색 드레스를 입고 검은 나비 가면을 쓴 채로 부티크를 나왔다. 너무 과하지 않은 치맛단의 프릴 장식이 꽤 마음에 들었다. 푸석했던 금색 머리카락도 레이첼의 손이 닿으니 윤기 나게 찰랑거렸다.
유리창으로 비추는 아름답게 빛나는 내 모습이, 꼭 다른 사람 같아 낯설었다.
하루 동안 예약한 마차는 시간에 맞춰 부티크 앞으로 도착했다.
아델트의 남쪽에 있는 엘리나 트리탄의 별장은 마차를 타고 두 시간가량을 가야 했다.
집에서 출발할 때는 햇빛이 쨍쨍했는데, 마차 바깥은 벌써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달가닥거리는 말발굽 소리에 까무룩 잠이 들고 일어나 보니 어느새 별장의 입구였다.
입구에서 초대장을 보여주자 거대한 철문이 열렸다. 그러나 별장은 그 뒤로도 한참을 더 들어가야만 했고 얼마 뒤 마차에서 내린 나는 곧바로 무도회장으로 들어갔다.
천장에 매달린 화려한 샹들리에가 실내를 밝게 빛내주었고, 바닥에 길게 깔린 새빨간 융단은 파티의 참석자들을 더욱 화사하게 만들었다.
나는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이곳에서 무얼 해야 할지 몰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때, 한 여자가 내게 다가와 조용히 물었다.
“혹시…. 레이디 시아라?”
그녀는 가면을 살짝 올려 내게 얼굴을 보였다. 이 파티의 주인, 엘리나였다.
“네, 반가워요. 레이디 엘리나.”
“와줘서 고마워요. 마음에 드시나요?”
“엄청… 화려하네요.”
엘리나는 샴페인 한 잔을 내게 건네며 가볍게 웃었다.
“뭐든 할 수 있는 이곳에서, 재밌게 즐기다 가시길.”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
왜 하필 ‘비밀’ 무도회일까 궁금했는데,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여기에 있는 귀족들은 정말이지 더럽게 놀았다. 오직 사치와 향락을 위해 태어난 사람들 같았다. 가면으로 얼굴을 가려 익명성이 보장되는 탓에 더욱 거리낌이 없었다.
술과 담배, 약은 기본이었다.
연회장의 한가운데서 춤추던 남녀는 그 자리에서 부끄러운 짓도 서슴지 않았다. 다른 쪽에선 돈을 찢고 그 위에 담배를 눌러 껐다. 혹여 싸움이 일어나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성별에 상관없이 내게 추파를 던지고, 당연하다는 듯 내 몸을 만지려 했다.
나는 사색이 되어 구석으로 몸을 피했다.
잠시 후 엘리나가 2층으로 올라갔다. 그러자 일하던 하인들이 가운데로 모였다. 이미 많이 겪어본 듯, 그들의 행동은 자연스러웠다.
곧이어 난간에 기댄 엘리나가 그 위에서 돈을 뿌려댔다. 하인들은 헐레벌떡 달려가 그것을 주웠다. 그녀가 샴페인을 뿌리면, 하인들은 또 그것을 받아 마셨다.
그 와중에 서로의 몸이 부딪혀 넘어지고 쓰러졌지만, 그들은 위를 향해 쉴 새 없이 감사하다 외쳤다.
모두가 즐거워했다. 이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 하는 건 오직 나뿐인 듯했다.
“… 이게 진짜 재밌어…?”
나는 충격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밖으로 나갔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자 시끄러운 속이 그나마 진정되는 듯했다.
정원의 꽤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벤치에 앉았다. 악단의 연주 소리와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물러갔다. 잘 관리된 정원수 사이로 파티가 한창 진행 중인 별장이 보였다. 멀리서도 하얗게 반짝거렸다.
저 안에 있는 사람들의 행동은 감히 상상도 못 할 정도로 추했지만.
나는 나에게 물었다.
“이게 네가 원한 파티야?”
모르겠어.
그래도 이런 걸 즐겨야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 걸까?
… 그래. 이런 파티도 언젠간 다 도움이 될 거야. 괜찮아. 해가 뜰 때까지만 참자. 오늘만 참는 거야.
합리화를 마친 나는 벤치에서 일어났다. 다시 파티장으로 돌아가기 위해서였다.
그때, 정원 구석의 풀숲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그거 뺏어 먹지 말고! 넌 이거 먹어.”
소리의 주인을 찾아 풀숲 가까이 다가갔더니, 웬 남자가 쭈그려 앉아있었다. 그리고 그 앞엔….
고양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