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알버트는 수도에서 돌아온 제 주인의 부름에 서둘러 저택 3층의 집무실로 향했다.
“공작 각하. 예상보다 늦게 돌아오셨네요.”
“그랬나.”
카시안 폰 아델트의 충직한 비서 알버트.
그는 오랜만에 보아도 변한 것 하나 없는 제 주인을 보며 내심 감탄했다.
온통 거무죽죽한 방 한가운데에 있는 공작의 모습은 오늘도 음울하기 짝이 없다. 문을 열고 사람이 들어왔지만 거들떠보지도 않는 그 막돼먹은 성정도 여전하고.
“황제 폐하께 결계에 대한 보고는 드렸습니까?”
“응.”
“뭐라고 하시던가요? 혹시 이제 쓸모없으니 사라지라거나…!”
“그깟 결계 하나 부서진다고 내가 당할 것 같아?”
“물론 그건 아니지만….”
“됐고. 보고나 해.”
그가 아델트를 비운 사이에 있었던 일이야 별다를 게 없었다. 오히려 가신들은 더욱더 평화로운 나날을 보냈으니. 보고를 올릴 일이라고는 그저 뻔하디뻔한 것들뿐이었다. 예컨대 이십 대 중반의 잘난 미혼 공작에서 쏟아지는 구애편지들 같은.
그러나 알버트는 그 소식을 전하기가 가장 끔찍했다. 차라리 차츰 깨져가는 제국 복쪽의 결계를 뚫고 이민족이 침입했다고 말하는 것이 훨씬 더 수월할 일이었다.
“각하와 혼인을 맺고 싶다는 편지들이….”
“그게 다야?”
“네. 아, 이번엔 무려 트리탄 후작가에서도 약혼을 요구하는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알버트가 책상 한구석에 색색의 편지 봉투 여럿을 살포시 내려놓았다. 그 중 후작가의 인장이 찍힌 분홍색 봉투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나가.”
그러나 한 움큼 쌓인 서류 더미에 사인하던 카시안은, 눈도 마주치지 않고 비서를 내쫓았다.
“그래도 나름 후작가에서 건넨 제안인데, 답신은 해주시는 것이 예의….”
카시안이 고개를 들자 방을 밝히던 촛불이 되 흔들렸다.
“… 겠지만, 각하는 원래 예의가 없으셨으니. 무시하셔도 괜찮습니다.”
단안경을 쓱 올리며 짐짓 비장하게 말하던 알버트가 곧바로 문을 열고 퇴장했다.
어두운 방에 홀로 남은 카시안은 겉옷 안주머니를 뒤적거렸다. 하도 만지작거려 이제는 너덜너덜 떨어진 노란색 편지 봉투를, 책상 위로 짜증스럽게 집어 던졌다.
3만 드랑.
시아라가 저 안에 제 마음이랍시고 넣어두었던 것은 다름 아닌 돈이었다.
[“2장. 아니, 3장 드릴게요.”]
그게 저 뜻이었을 줄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기가 막혀 또다시 피식피식 웃음이 새었다.
“뭘 기대한 거야, 대체.”
하긴. 그녀는 홀로 뭍으로 기어 나오고, 고상한 척 굴던 귀족 부인에게 돈다발을 집어 던지던 아주 맹랑한 여자다. 그러니 이 돈 봉투는 참으로 그녀다운 처사였다.
카시안은 알버트가 내려놓고 간 편지 더미를 노려보았다. 그 순간, 주름 하나 없이 빳빳한 편지들이 뜯어지지도 않은 채로 사라졌다.
그러니까 도대체 왜.
이 노란 봉투 안에 들어있던 건 저런 허무맹랑한 마음이 아니었을까.
카시안은 뻐근해진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마지막 만남 이후에 두어 번 잡화점을 들러보긴 했다. 뭐, 맹세코 다른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왕 돈까지 받았으니, 그는 호위 기사로서의 막중한 임무를 끝까지 다하려던 것뿐이었다. 그저 계약자의 안위를 묻는 것을 마지막으로, 깔끔하게 퇴장하려 했다.
그런데, 그녀가 사라졌다.
그가 끊어내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한 줌 먼지가 되어 날아간 앞의 편지들처럼,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자꾸만 눈앞에 알짱거려서 신경 쓰이게 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또 눈앞에서 사라져?
차라리 죽였어야 했다.
귀족이랍시고 오만하게 굴던 그 빨간 머리의 여자를 그 자리에서 죽였더라면. 시아라는 온전히 그 자리에 있지 않았을까?
가죽 의자 깊숙이 몸을 파묻은 카시안이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아니지, 애초에 전제 자체가 글러 먹었네.
그런 제멋대로인 여자쯤이야. 생각 안 하면 그만인 걸.
한숨을 내쉰 그가 결국, 편지 봉투를 구겨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
아델트의 겨울은 해가 유난히 짧았다.
약 올리듯 고개만 빼꼼 내밀고 사라지는 태양을 맞이하기 위해, 나는 아침 일찍부터 정원으로 나왔다. 이파리가 홀랑 벗겨진 나뭇가지 위로 얄팍한 서리가 내려앉았다. 그것을 쓸어내린 손가락을 볼에 가져다 대자, 반쯤 감겼던 눈이 번쩍 떠졌다.
요즘 내내 고민하던 ‘행복이 뭘까.’라는 질문에 대한 결론은 생각보다 쉬웠다.
“행복이 뭐 별거야?”
그냥 이 집에서 이대로 풍족하고 여유롭게 사는 게 행복이 아니면 뭐겠어.
솔직히 무얼 하고 살아야 할지 고민하던 나 자신이 미련스럽기도 했다.
레트랑 부인에게 돈다발을 던지러 가기 전, 분명 다짐하지 않았던가. 하고 싶은 것, 원하는 것은 모두 하자고.
그러니 귀족 놈팡이들이 했던 그런 구역질나는 일이야 안 하면 그만이고, 내키는 대로 조용히 살면 그만이었다.
“그래. 이걸로 만족해.”
나는 정원에 있는 나무 그네에 앉아 살짝 발돋움했다.
얼음장같이 차가운 바람이 내 코끝을 스쳤다. 그러나 굴뚝을 타고 흘러든 장작 냄새와 뒤섞인 겨울 내음은 포근하고 아늑했다.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다시 한 번 힘차게 발을 구르려 할 때였다.
“거봐. 내 말이 맞지? 여기 사람이 있어!”
“진짜네?”
별안간 담장 너머에서 참새처럼 조잘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네에서 일어나 담장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나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잘못 들었나?”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집으로 들어갔다.
그 수상한 기척은 다음날도 계속되었다.
“오늘도 혼자야.”
“왜 맨날 혼자 있을까? 혹시 친구가 하나도 없는 걸까?”
심지어 이번에는 안타까운 탄식까지 흘리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네에서 몸을 살짝만 일으켜 목을 길게 뻗었다. 그러자 그리 높지 않은 담장 너머로 조그맣고 노란 머리통 두 개가 보였다.
때마침 그들 역시 담장 위로 고개를 쏙 내밀었다. 그러나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다시 호다닥 사라졌다.
“저것들이 진짜…?”
왜인지 놀림당하는 것 같은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
우리 집을 자꾸 훔쳐보는 불청객의 정체는 뜻밖의 장소에서 밝혀졌다.
오늘따라 뜨뜻한 장작불 앞에 앉아 새콤달콤한 귤이나 잔뜩 까먹고 싶었다. 생각만으로도 벌써 침이 고이는 게, 온 집 안에 귤 단내가 풍기는 것 같잖아?
나는 집 뒤편 언덕 너머의 시장으로 향했다. 콧노래까지 불러가며 어떤 귤이 꿀맛일까 고르는 와중에, 누군가 대뜸 소리쳤다.
“어? 옆집 누나다!”
“진짜다! 드디어 밖으로 나왔어!”
엥? 옆집 누나? 그보다 하나가 말하면 다른 하나가 꼭 세트로 따라다니는 이 목소리는…!
나는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청과상 바로 옆 레스토랑의 문에 여자아이와 남자아이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조그만 볼에 막대사탕을 하나씩 물고 있는 아이들이 저들끼리 꺄르르르 웃었다.
대여섯 살 즈음으로 보이는 아이들은 심지어 똑같이 생겨서, 입은 옷을 가려 놓으면 누가 누군지 구분하기도 힘들었다.
“옆집 누나?”
“응! 맨날 그네 타면서 혼자 있잖아요.”
“레아랑 레오는 둘이 같이 있는데!”
나는 문득 옆집을 떠올렸다. 관리 안 된 정원이 꼭 야생 초원 같던 그 집!
아무래도 담장 너머로 보았던 이 조그만 머리통들이 거기에 사는 모양이다. 이틀 동안 날 놀리던 놈들이 이 개구쟁이들이었다니.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팔짱을 단단히 꼈다.
이 친구들에게 선물로 밤과 꿀밤 중 무엇을 줄까 고민하고 있을 때, 분홍색 앞치마를 두른 여자가 레스토랑 밖으로 나왔다. 나만큼이나 키가 작은 그녀는 꼭 로지 아줌마를 떠오르게 할 정도로 푸근하고 선한 인상이었다.
“레아, 레오! 엄마가 문에 매달려서 장난치지 말라고 했지요?”
“네…. 안 할게요.”
엄마는 위대했다. 까불거리던 아이들이 한순간 꼬리를 내리고는, 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밀었다.
이제 양발로 바닥을 온전히 짚은 그들이 나를 보고 외쳤다.
“엄마, 우리 옆집 사는 누나야!”
“옆집…? 어머! 새로 이사 오신 분이구나! 그러지 않아도 한 번 뵙고 싶었는데, 여기서 만나네요. 반가워요, 한나라고 해요.”
“안녕하세요, 시아라입니다. 저야말로 먼저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아니에요. 제가 밤낮으로 가게를 보느라 집에 통 있질 못했는걸요. 이제 집에 가시는 길인가 봐요?”
“아, 네. 이제 들어가려고요.”
“잘됐네요. 아이들도 마차에 태워 보내려던 참인데. 시아라 양도 같이 타고 가요.”
“네? 아니, 괜찮아요.”
“어차피 같은 방향인데 사양 말고 타요. 아, 잠시만 기다려요!”
그녀는 헐레벌떡 식당 안으로 들어가더니, 무언가를 한 아름 담은 종이가방을 내 품에 안겨줬다.
“우리 레스토랑에서 제일 인기 있는 디저트랍니다. 환영 선물이니 집에 가져가서 먹어요.”
“가, 감사합니다.”
나는 한나가 정산까지 마친 공공마차에 아이들과 함께 올라탔다.
패기 넘치게 “옆집 누나다!”하고 소리치던 아까와는 다르게 아이들은 꽤 얌전했다.
레오는 나를 흘끔흘끔 쳐다보다가 눈이 마주치면, 고개를 휙 돌려 레아의 뒤로 숨었다.
다만 레아의 시선은 온통 나에게 고정되어 반짝거렸다.
“예쁘다….”
“응?”
“언니 머리! 꼬불꼬불 길어서 예뻐요!”
그러고 보니 레아의 단정한 금색 머리카락은, 어깨에 두른 초록색 케이프에 닿을락 말락 짧았다.
“너도 예뻐, 레아.”
“감사합니다.”
아이가 배시시 웃었다. 봄의 싱그러움을 간직한 풋사과 같은 웃음이었다.
뭐야…. 너무… 너무너무 귀엽잖아!
나는 저번에 고양이를 보았을 때처럼 심장을 움켜쥐었다.
그때, 레아의 옆에 나란히 앉은 레오가 제 작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레아, 그렇게 보지 마. 아직 어떤 사람인지 모르잖아. 얼굴만 예쁜 악당일지도 몰라.”
…….
다 들리거든.
*
레트랑 가문의 안주인 틸다 레트랑은 꽤 오랜 시간 아무렇지 않은 척 애썼다. 그러나 시아라가 제게 했던 짓을 떠올리기만 해도, 여전히 분노가 숨통을 옥죄는 것 같았다.
우아한 귀족 부인이 찻집 한가운데서 얼굴에 돈다발을 맞는 수모를 겪었다. 도대체 이걸 어디다 하소연한단 말인가?
‘그 하찮은 것이 도대체 어디서 돈을 구해온 거지?’
시아라의 행방은 묘연했다. 흥신소에 의뢰도 해보았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일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상하게 밧줄에 꽁꽁 묶인 것 같았단 말이야?’
자신뿐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기사들까지 손가락 하나 꼼짝하지를 못했으니. 참으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하필 손님도 많을 오후 시간이었던지라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그러니 최대한 집에 기거하며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히길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래도 라튼에게서 그 되먹지 못한 계집애를 떼어냈으니, 이제 다시 예전처럼 말 잘 듣던 착한 아들로 돌아오겠지! 오로지 그 사실 하나만이 틸다를 안심시켰다.
그녀는 와인잔에 레드 와인을 반만 채웠다. 그리고서는 손가락 사이에 끼운 잔을 한 바퀴 빙그르르 돌렸다. 그 안에서 넘칠 듯 위태롭게 찰랑거리던 새빨간 소용돌이가 곧 잠잠해졌다.
흡족하게 그것을 입에 대려던 찰나, 복도에서 쿵쿵거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그녀는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이것 봐. 사랑하는 내 아들이, 엄마를 찾아왔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