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누나, 나는 기사님이 될 거야!”
“기사님?”
“응! 그러면 레아를 지킬 수 있다고 그랬어!”
그렇게 말하던 레오는 우리 집에 있는 체력 단련실을 발견하자마자 신나서 방방 뛰어다녔다. 나를 향해 남아있던 미약한 경계심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드디어 미래에 소드마스터가 될 내 멋진 모습을 보여줄 차례가 왔군!”
레오가 제일 작고 가벼운 목검을 들고 와다다다 달리기 시작한다.
“이 악당! 바람보다 빠른 내 칼을 받아라! 푸슈슉! 와장창창! 파다다닥!”
허공에서 요란하게 칼을 휘두르더니 내 허리를 목검으로 폭, 찌른다.
내가 그저 웃고만 있자, 레오가 내 귀에 소곤거렸다.
“누나, 뭐해. 칼 맞았으니까 쓰러져야지.”
아하.
“으으윽. 너무 강하잖아! 역시 제국의 유일한 소드마스터답군!”
나는 레오의 뜻에 따라 장렬히 쓰러진다.
이 기승전결이 뚜렷한 한 편의 연극을 끝내고 나면, 유일한 관객인 레아가 두 눈을 반짝이며 손뼉을 쳤다.
“우와아아아! 레오! 진짜 멋져!”
레오는 양쪽 어깨를 으쓱이며 별거 아니라는 표정을 지었다.
한차례 폭풍이 휘몰아치고 나면 꼬마 숙녀의 차례였다. 레아는 나의 손을 잡고 낮은 등받이 의자로 이끌었다.
“어서 오세요, 예쁜 언니. 레아 미용실입니다! 어떤 머리를 해드릴까요?”
“저한테 어울리는 스타일로 추천해 주시겠어요?”
“물론이죠! 저만 믿으세요. 전 제국에서 제일 유명한 미용사거든요!”
레아는 내 꼬불꼬불한 머리를 반으로 갈라 한 올 한 올 땋기 시작했다.
양 갈래 땋은 머리를 하려는 모양이다.
“어머, 어쩜 제가 원하던 스타일을 바로 알아맞히시는지!”
나는 양손을 입에 척, 올리며 놀란척했다. 그녀는 손등으로 이마를 한 번 쓸어내렸다.
“헤헤. 이 정도는 기본입니다!”
그러나 생각보다 원하는 대로 나오지 않던지 이내 팔짱을 휙 꼈다.
“안 되겠어. 조수! 이리 오세요.”
레아의 호출에 소파에 앉아 구경하던 레오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
“응! 얼른 이 반쪽을 도와줘야겠어요!”
그는 난처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그냥 절 따라 하시면 됩니다. 이렇게 저렇게 요렇게. 짜안! 참 쉽죠?”
으응?
나도 당황하고 레오도 당황했다.
하지만 레오는 차기 소드마스터가 될, 실패를 모르는 소년이었다. 그런고로 침착하게 따라 하려 노력했다.
그 결과 내 머리는, 기린이 핥은 건지 마차 바퀴에 밟힌 건지 모를 만큼 사방으로 흩어져있었다. 그래…. 고마워….
한바탕 놀고 난 뒤에 힘든 것은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똑같은 모양이다. 아이들도 졸린 눈을 비비며 소파 위로 늘어졌다. 이제야 조금 쉴 틈이 생긴 나는 케이크를 접시에 담아 거실로 가져왔다.
그때, 레아가 소파에서 껑충 뛰어내렸다.
“언니이.”
“응, 레아야.”
“레오랑 언니랑 밖에서 산책하고 싶어요.”
그녀의 말과 동시에 이번에는 레오가 번쩍 눈을 떴다.
“뭐? 산책? 안 돼!”
“그치만, 나도 밖에 나가고 싶은데.”
“안 돼. 너 감기 때문에 아팠잖아!”
레오가 단호히 거절하자 레아의 조그만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레오 미워! 나도 오빠처럼 마음껏 산책하는 게 소원이란 말이야!”
이내 올망졸망한 눈동자에 눈물이 맺히자 레오가 어쩔 줄 몰라 그녀의 곁을 서성거렸다.
“으윽…. 잠… 잠깐만 갔다 오는 거야!”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레아는 언제 그랬냐는 듯 배시시 웃었다.
“응!”
저기 얘들아. 내 의견은?
그러나 밤톨 같은 아이들의 대화가 어찌나 진지하던지. 싫다고 했다가는 대역죄인이 될 것 같았다. 뜨뜻한 집구석에서 케이크나 먹으려던 나는, 슬그머니 포크를 내려놓았다.
어느새 우리는 따뜻한 옷으로 단단히 무장했다.
아이들은 내가 저번에 선물한 털모자와 귀마개를 썼다. 그 위로 하얀색 목도리를 둘러주니까, 꼭 북극곰 두 마리가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마지막으로 쌍둥이의 외투 단추를 꼼꼼히 채워준 뒤, 양 손바닥을 내밀었다. 그런데 레아는 그 손을 잡는 대신 나를 멀뚱히 쳐다보기만 했다.
“레아야?”
“언니도, 추워요.”
레아는 까치발을 들고 내 외투의 단추를 채우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발끝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이자 무릎을 굽혀 레아의 키에 맞춰줬다.
“다 됐다! 헤헤. 언니 이제 따뜻해요?”
“응. 레아 덕분에 언니 너무 따뜻해. 고마워.”
내가 웃어주자 이번에는 레아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렇게 한 손에는 레아의 손을, 다른 손에는 레오의 손을 잡았다. 자, 그럼 산뜻하게 출발해볼까?
*
“공작 각하께서 혹시 무슨 일이 있으신 건가?”
“너도 느꼈어?”
“응. 뭔가…. 거하게 삽질하셨을 때 표정이신데.”
“역시.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었어.”
카시안 폰 아델트의 충직한 가신. 비서 알버트와 기사 벤이 집무실 바깥에서 속닥거렸다.
아델트 공작은 요즈음 시도 때도 없이 한숨을 쉬고, 멀쩡히 집무실 책상에 앉아 있다가 그대로 머리를 쿵쿵 들이받고.
한밤중에 “으아아아악!”하는 괴상한 소리가 들려 달려가 보면, 침대에 누워 이불을 걷어차고 있었다.
일주일 전쯤부터는 입에 ‘쓰레기’라는 말을 달고 살기 시작했다.
예컨대,
“공작 각하. 점심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라고 물으면,
“쓰레기가 밥도 먹던가?”
라고 대답한다거나.
“그럼 점심 이후 일정은 어떻게 할까요? 몸 상태가 별로시면 그냥 취소할까요?”
“그래. 쓰레기는 잠자코 쓰레기통에 처박혀있으라는 거군.”
… 따위의 대화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의 비서 알버트는 이를 꽉 깨물고 억지로 웃어 보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십니까?”
카시안은 낮게 신음하며 말했다.
“알버트, 너 말이야.”
“예.”
“안경 바꿔.”
“예?”
알버트가 금을 녹여 특별히 제작한 자신의 소중한 외알 안경의 테두리를 손으로 감싸 쥐었다.
“거지같은 그 허리띠도 좀 치우고. 아, 복도에 있는 금으로 된 건 싹 다 갖다 버려.”
세상에 이런 갑질이 또 있을까?
“혹시 금 알레르기라도 생기신 겁니까?”
“차라리 그게 훨씬 더 낫겠네.”
“더 낫다니, 뭣 보다요?”
“아, 있어. 엄청 이상한 여자.”
그 말에 알버트의 눈이 건수를 잡았다는 듯이 가늘어졌다.
“여자요?”
알버트의 질문에 카시안은 아차 싶었는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는 한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다른 손으로는 비서를 내쫓았다.
“아니야. 됐으니까 나가봐.”
그러나 알버트는, 그냥 나가기에는 궁금해 미칠 것 같았다. 평생 여자 보기를 돌같이 하던 주군의 입에서 여자라니!
“크흠, 주군. 아실지 모르겠지만. 사실 제가 연애 경험이 좀 많지 않습니까?”
사실 뻥이다. 그는 자기 주군과 다를 바가 없었다.
“네가?”
“예. 제가 말 걸어서 안 넘어온 레이디가 없습니다.”
이것도 뻥이다. 그가 여태껏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바빠서요. 그럼 이만.”이었다.
그러나 알버트는 이런 공갈을 쳐서라도 카시안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우습게도 그의 전략은, 쉽게 먹혀들었다.
“하아. … 계속 거기 있을 테니 꼭 오라길래 갔더니. 없더라고.”
“누가요?”
“그건 알 거 없어.”
“아, 예.”
“물에 빠진 거 구해주려니까 알아서 나가더라? 어찌나 파닥파닥 헤엄을 잘 치던지. 펭귄인 줄.”
“…….”
“개미 새끼 한 마리 안 다니는 언덕에 불쑥 나타나서 넘어지더니…. 하, 이건 내가 잘못하긴 했어. 괜히 심술이 나가지고는…. 난 쓰레기야.”
“그러니까…. 이게 지금 다, 같은 레이디 이야기인 거죠?”
카시안의 식겁한 두 눈동자가 알버트와 마주쳤다. ‘어떻게 알았지?’라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곧 어색하게 시선을 회피했다.
“주군.”
“아, 왜.”
“고백하셔야 합니다.”
“뭐?”
“이건 사랑입니다. 러브요. 러브. LOVE. 백 퍼센트 사랑입니다.”
“… 알버트.”
“예?”
“나가.”
알버트는 성격파탄자 공작에 의해 순식간에 문밖으로 내쫓겼다.
그러나 사실 알버트도 몰랐다. 그가 말한 일련의 사건들이 뭐 어쨌다는 건지. 도대체 무슨 말인지.
그는 그저, 본인의 주군을 놀려주고 싶었을 뿐이다.
*
예상했던 대로 바깥은 제법 추웠다.
그러나 눈이 쌓인 길거리는 더할 나위 없이 맑고 깨끗했다.
처음에는 내 손을 잡고 양옆에서 조심스레 걷던 아이들은, 어느새 하얀 눈을 밟고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흐음, 나도 요새 케이크를 좀 많이 먹긴 했는데. 같이 뛰어야 하나?
벌써 저만치 달아난 레오가 내게 어서 오라며 손짓했다.
“누나! 우리 눈사람 만들자!”
“눈사람?”
그 한마디에 나는 라튼 레트랑을 떠올리고 말았다.
아델트와 다르게 온화했던 제국 수도에서는 한겨울에도 눈을 보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라튼과 내가 연애를 시작했던 그 해 겨울의 어느 날은, 제법 눈이 내렸다.
우리는 눈이 쌓인 적막한 들판 위에 있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펑펑 쏟아지던 하얀 눈은 유난하게 빛났다. 그래서였을까. 라튼이 내게 눈사람을 선보이며 건넸던 말이 참 로맨틱하게만 느껴졌던 건.
[“너를 생각하면서 만들었어. 어때, 마음에 들어?”]
[“우와, 너무 귀엽다! 근데 눈사람이 네 개나 있네?”]
[“응. 너랑 나랑. 우리 엄마랑 내 여동생. 우리가 결혼하면, 한 가족이니까.”]
그때 나는 무슨 표정을 지었더라?
눈앞에 귀여운 꼬맹이들을 두고 이런 끔찍한 장면을 떠올리다니.
나는 소름 돋은 양팔을 문지르며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느새 공원 바닥에 풀썩 주저앉은 레오는 두 손으로 야무지게 눈을 끌어모았다. 그것을 단단하게 뭉쳐 데굴데굴 굴려보았지만, 눈덩이가 생각처럼 커지지 않았다.
“이게 왜 안 커지지?”
레오의 입술이 한껏 튀어나왔다.
“괜찮아! 이건 우리처럼 아기 눈사람이야.”
레아는 레오가 만든 미니 눈사람에 작은 나뭇가지로 눈코입과 팔을 만들어 주었다.
“그럼 하나 더 만들래!”
요령이 생겼는지 순식간에 눈사람 하나를 더 만들어낸 레오가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양손의 엄지와 검지를 거꾸로 이어 붙여 사각형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그 네모 안에 아이들의 얼굴을 담았다. 이 순간을 저장하려는 듯이.
그때, 어딘가에서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아?”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레아는 일어나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맞구나! 레아! 레오도 있었네?”
나 역시 의문의 목소리를 찾아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 시선 끝에 연갈색 고수머리의 남자가 서 있었다.
“어? 오빠다!”
레아 역시 그를 발견하고는, 도도도 달려가 그에게 풀썩 안겼다. 레오 역시 그녀의 뒤를 이어 남자의 팔에 매달렸다.
“펠릭스 오빠아!”
“형! 왜 이렇게 늦게 왔어? 내가 엄청 많이 기다렸는데.”
“미안. 형이 너무 바빠서 그랬어.”
그는 단숨에 레오를 목말 태우고, 레아를 높게 안아 올리고는 빙그르르 한 바퀴 돌았다.
“헤헤헤. 한 바퀴 더! 또 돌아줘!”
꺄르르 웃으며 그와 노는 아이들의 모습은 꽤 익숙해 보였다.
“그보다 레아, 오늘 추운데 이렇게 밖에 나와서 놀아도 괜찮은 거야?”
“응! 레아는 이제 하나도 안 아프거든! 이것 봐!”
레아가 근육 자랑을 하듯 제 작은 팔뚝에 힘을 주었다.
“푸핫. 알겠어.”
펠릭스라는 남자가 아이의 머리를 부스스 쓰다듬었다. 맑게 웃는 남자의 볼에 깊은 보조개가 우물졌다. 보조개…. 어라? 이 남자!
“고양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