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자연스럽게 아이들을 안고 있는 이 남자, 펠릭스는, 엘리나의 별장에서 보았던 고양이 소년이었다.
그는 내 외침에 레아의 어깨너머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리고 나를 보자마자, 경악인지 놀람인지 모를 얄궂은 표정을 지었다. 그가 팔짝 뛰며 아이들에게 작은 목소리로 다그쳤다.
“얘들아, 모르는 사람이랑 놀면 어떻게 해. 나쁜 사람이면 어쩌려고!”
“나쁜 사람?”
“그래! 혹시 저 여자가 사탕 주면서 따라오라고 그런 거야?”
“시아라 언니는 나쁜 사람이 아니야, 오빠.”
“뭐?”
“언니는 천사야.”
“누나는 우리 엄마 케이크 엄청 많이 먹어.”
마지막 말은 무엇……?
나는 평상심을 유지하며 그들 가까이 다가갔다. 펠릭스의 얼굴에는 여전히 의심이 가득했으나, 뭐. 애들 앞에서 저번처럼 악에 받친 말을 쏟아낼 리도 없고.
“안녕하세요. 이렇게 또 보네요.”
“네.”
그가 툴툴거리며 무성의하게 대꾸했다.
그러나 그는 곧 아이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되었다. 미사일이 나갈 정도로 아주 뜨거운 시선을! 심지어 레아가 단단하게 팔짱까지 끼자, 그는 진심으로 혼란스러워했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뜬 펠릭스가 아이들을 바닥에 내려주고, 나를 마주했다.
“… 그때는….”
“그때는?”
“… 제가 너무 격양되어 있었어요. 심하게 말해서 미안해요. 구해줬던 것도 고맙구요.”
다행히 그는 사과가 빠른 편이었다.
나는 막혔던 속이 뻥 뚫리는 개운한 기분에 내 배를 둥글게 쓰다듬었다.
“괜찮아 보여서 다행이에요. 그런데 이 꼬맹이들이랑은 어떻게 알아요?”
“앞집에 살거든요.”
아파. 그 폐가 같던 집.
그러니까 결국 이 자리는, 내 앞집과 옆집의 모든 주민이 한자리에서 만난 첫 모임이라는 소리구나.
사파리와 귀신의 집과 그네가 있는 꽃밭….
와, 완전 제국 수도에 있는 놀이 공원 에버르랜드 아니야?
“반가워요. 그럼 저도 이웃사촌이겠네요.”
“예?”
“집에 가시는 길이라면, 같이 가요.”
환상의 나라로!
그렇게 나는 레아의 손을, 그는 레오의 손을 맞잡았다. 가운데에 선 아이들끼리도 남은 손을 꼭 부여잡자,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가족으로 오해할 법한 모습이 연출되었다.
그러자 막상 펠릭스와 내가 괜한 오해를 사는 것이 아닐까 괜히 신경 쓰였다.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라튼 레트랑과 비밀 연애만 해왔기에 더욱 그러했다.
‘이 사람도 동네 주민인 것 같으니까 조심해야겠지.’
나는 의식적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나의 행동이 의아하다는 듯 펠릭스가 물었다.
“뭐 찾으시는 거 있으세요?”
“아, 그건 아니고요….”
내가 아이들과 나란히 맞잡을 손을 힐끔거리자, 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동네는 특히 사람이 없어요. 대부분 저 언덕 너머 지역에 살거든요.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내 의도를 단번에 알아채고 답해주는 그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그러나 집 근처에 다다른 우리는, 뜻밖의 인기척을 마주했다.
*
[“아차차! 각하, 그간 말씀드린다는 걸 깜빡했는데. 그 집 말입니다. 드디어 팔렸다는군요!”]
사랑이니 러브니 한참을 떠들어대던 알버트는, 쫓겨나기 직전에야 생각났다는 듯 저 말을 남기고 빠르게 줄행랑쳤다. 뜻밖의 소식에 카시안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두 해가 넘도록 팔리지 않던 집이 드디어 팔렸다니. 깜빡할 게 따로 있지.
그는 서둘러 말을 몰았다.
물론 이미 그의 손을 떠난 집이니 집주인을 꼭 만나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래도, 그 집을 쓰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었으면…. 그것을 바랄 뿐이다.
또한,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만 케케묵어 버린 미련을 떨쳐낼 수 있을 것 같았기에.
그때, 근처에서 아이들이 꺄르르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가 있는 가족인가 보네.’
꾸밈없고 소란스러운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니 차라리 잘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간 외로이 남아있던 이 집이 생기 가득하게 채워질 터이니.
그렇게 담장 옆을 돌았다.
그러자, 그의 시야가 온통 노란색 황금으로 물들었다.
그는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떴다. 눈앞에 보이는 그녀가 누구인지 모를 리 없었다. 자신의 눈을 멀게 만드는. 세상을 온통 황금으로 가득 채우는 저 여자, 시아라를.
그 순간, 비서 알버트가 짓거린 헛소리가 그의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이건 사랑입니다. 러브요. 러브. LOVE. 백 퍼센트 사랑입니다.”]
카시안은 다시 담장을 돌아 몸을 숨겼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떠들어서는!’
그는 제멋대로 뜨거워진 얼굴을 식히려 손 부채질했다. 그러길 반복하다가, 이내 담장 벽에 기대어 주르륵 미끄러졌다.
‘도대체 왜 숨은 거야? 이러니까 꼭 죄지은 사람 같잖아.’
머저리인가 진짜?
그대로 주저앉은 그가 양손으로 여전히 뜨거운 얼굴을 감싸 쥐었다.
‘정신 차려! 뭐 하는 거야.’
저 여자가 이 집을 샀다는 주인인가?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런 일이…….
그럼 그녀의 옆에 있던 아이들은? 시아라의 아이들일까? 그 옆에 남자도 하나 있었던 것 같은데.
카시안은 한참 전 시장 한복판에서 시아라가 붉은 머리 남자의 뺨을 휘갈겼던 일을 떠올렸다.
‘아 혹시….’
저 아이들 때문에 싸우고 헤어진 건가?
혼란하다, 혼란해. 그의 머릿속이 팽팽 돌았다.
확실한 것은, 지금 저들 사이에 그가 나타나 봐야 또다시 불청객 취급이나 받을 것이란 사실이었다.
‘그냥 돌아가야겠어. 그리고 여기에 신경 쓰지 말자.’
카시안, 선 넘지 마.
그는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인제 그만 일어나려 했다.
그런 그의 눈앞에 갑자기 황금색 머리카락이 사락, 내려와 앉았다.
“마법사님?”
카시안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곳엔, 평생 빛바래지 않을 것이 틀림없을, 새파란 보석이 있었다.
*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요.”
집 근처에서 수상한 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펠릭스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담장 벽을 돌았다.
이런 벌건 대낮에 좀도둑일 리도 없고… 라는 생각으로 돌아보았는데.
이 남자. 도대체 여기서 무얼 하는 걸까?
“마법사님?”
내가 부르자 당황한 카시안이 일어서려고 했다. 그런데 다리에 힘이 풀린 건지, 다시 풀썩 주저앉아 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나는 가만히 내려다보고, 그는 나를 올려다보는. 저번 언덕에서 발생했던 것과는 완전히 정반대인 상황이 펼쳐졌다.
그날 카시안이 했던 행동이 선명하게 떠오르자 조금은 모난 소리가 내 입에서 튀어나왔다.
“여기서 뭐 하세요?”
“… 집이 팔렸다기에….”
“네? 말씀 좀 제대로 해주시겠어요?”
“… 크흠. 이 집. 원래 제집이었습니다.”
카시안은 창피한지 귀까지 새빨개져 있었다. 목을 몇 차례나 가다듬었음에도, 그의 목소리에는 작은 떨림이 묻어났다.
가만, 원래 자기 집이었다고?
“전 집주인이셨구나.”
“… 네.”
“그런데 전 집주인님이 어쩐 일로 오셨을까요? 그것도 이렇게 좀도둑처럼 숨어서?”
“그게 아니라…. 저한테 소중한 집이기에 어떤 분이 들어오셨는지 궁금했습니다.”
나는 팔짱을 끼고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아아. 근데 왜 숨으셨어요?”
“떨려서…. 아니, 남편 분한테 괜한 오해를 살까 봐서요.”
“예이? 남… 뭐요…?”
“누나아!”
“언니!”
황당한 내 마음이 그에게 닿기도 전에,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던 아이들이 달려왔다. 그 뒤를 이어 걱정스러운 얼굴의 펠릭스도 보였다.
“어! 멋쟁이 공작님이다!”
“응? 공작님? 누가?”
“레오?”
레오의 말에 세 사람에게 향했던 내 시선이 다시 카시안에게 돌아갔다.
그 역시 이제야 똑바로 일어서서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아주 단정하고 말끔한 차림으로.
“멋쟁이 공작님. 왜 여기에 있어요? 오늘도 정원에 나무 자르러 왔어요?”
“아니. 오늘은 그냥 산책 나왔어. 레오는? 저 누나랑 놀다가 온 거야?”
그의 물음에 레오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시아라 누나랑 레아랑 눈사람 만들었어요!”
공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나와 레오, 레아. 그리고 그 뒤에 서 있는 펠릭스까지 돌아가며 응시했다.
그러다가 곧, 작은 탄성을 내뱉으며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못했다.
이 혼란스러움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공작님…?”
“소개가 늦었네요. 카시안 폰 아델트입니다.”
그가 허리를 낮추고 정중히 인사했다.
“그러니까, 마ㅂ… 사님이…. 아델트 공작님이시라구요?”
나는 레오가 앞에 있어 최대한 기어가는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원망스럽게도, 그가 긍정했다.
그러면 나 여태…. 대귀족을 호위로 삼은 것도 모자라서, 그 사람 앞에서 다른 귀족 얼굴에 돈다발을 던지고. 거기다 수고했다고 수고비까지 주고 온 거야…? 지금은 좀도둑 취급까지…!
망했네. 망했어.
“이렇게 불쑥 찾아와 죄송합니다. 소란을 만들고 싶었던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아, 아니에요. 소, 소란은 무슨….”
이제 카시안에게서는 당황이나 부끄러움의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것은 도리어 내 얼굴이었다. 나는 발끝을 내려다보며 애꿎은 돌멩이만 툭툭 건드렸다.
“저기…. 전 이만 들어가 봐도 괜찮을까요?”
“괜찮으시다면 집 상태를 좀 둘러보고 싶었는데요. 아무래도 제가 마지막에 확인을 못 했던 것이 마음에 걸려서.”
“아뇨! 그러실 필요 없어요! 다! 전부 다 마음에 들어요! 완전 깔끔하고 튼튼해요!”
“그래도….”
“그, 그리고 오늘은 먼저 오신 손님이 계셔서요. 아무래도 다음에 다시 뵙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나는 다급하게 펠릭스를 가리켰다. 내 손가락을 따라 아델트 공작, 카시안의 시선도 그를 향했다.
가만히 있다가 날벼락을 맞은 펠릭스는 흠칫 놀라서,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 하긴. 약속도 없이 숙녀분의 집을 방문하는 건 예의가 아니죠.”
“그, 그럼요.”
“다음 주 이 시간은 어떠십니까?”
“네?”
그가 비뚜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 좋아요.”
카시안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골목을 빠져나가려 했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아까 분명….
나는 다급하게 그의 팔을 붙잡았다.
“저분은 제 남편이 아니에요. 괜한 오해로 저 신사분이 곤란해지시면 안 되니까요.”
“알아요.”
“아아…. 오해하신 줄 알고…. 그럼 조심히 가세요.”
나는 고개를 숙여 최대한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그런데 그 순간, 카시안의 얼굴이 내 얼굴 아래로 불쑥 들어왔다.
“잠시만요.”
“… 허업.”
숨결이 다 느껴질 정도로 급격히 가까워진 거리에 나는 숨 쉬는 법을 잊고야 말았다.
“그럼 남편 말고. 남자친구는요?”
“네?”
“저 사람, 남자친구예요?”
“아, 아니에요!”
그가 다시 허리를 곧게 폈다.
“다행이네요. 그럼 됐어요.”
뭐야…?
수도에서 벚꽃을 선물할 때도 이렇게 능글맞긴 했지만. 언덕에서 만났을 때는 분명 이런 느낌이 아니었는데?
“이번엔 진짜로, 또 봐요. 우리.”
그 말을 마지막으로, 카시안은 유유히 골목을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