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또맞고 튀었는데 공작님이 집착한다-15화 (15/135)

15.

카시안이 아델트의 공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 나는 두 가지 근심걱정으로 하루하루 메말라갔다.

첫째. 어쩌면 내가 귀족모독죄로 끌려갈지도 모른다는 것과,

둘째. 이틀 후 그를 볼 때, 도대체 어떤 행동을 해야 하냐는 것이었다.

나는 언덕에서 카시안이 싸늘한 표정을 지었던 것에 분노할 것이 아니었다. 욕이라도 안 먹어서 다행으로 여겼어야 했다.

그간 있었던 일을 사죄해야 할까? 아니면 그냥 능구렁이처럼 자연스레 넘어갈까…?

내가 괴로움으로 시름시름 앓자 옆에 있던 펠릭스가 의아하게 물었다.

“왜 그렇게 한숨을 쉬고 그래? 바람 빠진 풍선 같네.”

“이게 바로 어른의 고민이란 거지.”

“뭐래. 한 살 차이 밖에 안 나면서.”

“당장 집으로 내쫓기고 싶어? 왜 또 와서 시비람!”

“그야, 누나가 수상한 사람인지 아닌지 확인하려고 그러지.”

나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펠릭스를 흘겨보았다.

카시안이 왔던 날 이후로, 펠릭스는 우리 집을 줄기차게 방문하고 있다. 낯선 이로부터 레오와 레아를 보호한다는 명목을 핑계로 대면서 말이다.

[“나더러 먼저 약속한 손님이라며.”]

저 말과 함께 기어코 차 한잔을 얻어 마시고 가더니, 쌍둥이들과 함께 세트로 찾아와 사라지곤 했다. 오늘처럼 혼자 대뜸 찾아오는 날도 있었고. 덕분에 나는 요새 혼자 있는 시간이 드물었다.

펠릭스는 나보다 한 살 어렸지만, 동생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친구나 오빠 같았다. 앳된 소년 같은 얼굴과는 다르게 하는 행동은 어찌나 어른스럽던지. 물론 내게 자주 시비를 걸고 틱틱대기는 하지만.

“근데, 누나는 어떻게 아델트로 온 거야?”

“유산…을 상속받아서 어찌어찌하다 보니….”

나는 한나의 초코케이크를 한입 가득 넣으며 최대한 무심하게 말했다. 로또 당첨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으니까.

“하긴. 그런 망나니들만 모이는 파티에 초대받으려면, 누나도 보통 사람은 아니겠네.”

그러더니 그가 고개를 돌려 집 한 바퀴를 빙 둘러보았다.

“그런 것 치고 집이 좀 단출하긴 하지만. 일하는 사람도 아무도 안 보이고.”

“어… 어? 그러는 넌! 대체 왜 거기서 일하고 있던 거야?”

“이유야 뭐, 별다를 게 있겠어? 그냥 돈 벌려고 하는 거지.”

펠릭스의 말투는 퍽 담담했으나 얼굴에는 깊은 수심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의 속사정을 더는 캐묻지 않았다.

나는 그저 아주 달짝지근한 초코케이크를 그의 앞으로 슥 밀어주었다. 그가 피식 웃으며 포크로 케이크를 떴다.

그렇게 둘이서 두런두런 수다를 떨다가 벽시계를 보니, 오후 두 시였다.

“아! 나 잠깐 상업지구에 다녀와야 하는데!”

“상업지구? 같이 갈까?”

“아니야. 혼자 다녀올 게. 이따가 저녁이나 먹으러 와.”

“오, 비싼 거 해줄 거야?”

“으음…. 너 하는 거 봐서?”

“여왕님. 집 청소는 저한테 맡기시고 조심히 다녀오세요.”

뻔뻔하게 말하며 키득키득 웃는 그의 얼굴에 예쁜 보조개가 피었다. 그 웃음은 예뻤고, 그 마음은 갸륵했다.

고마워. 그런데….

우리 집 말고 제발 너희 집이나….

*

나는 카시안과의 첫 만남부터 차근차근 상기했다.

그동안 너무 많은 사건이 한 번에 펼쳐져 인지하지 못 했으나, 잡화점에서 손님으로 그를 만났던 순간부터 이 악연은 예견된 것이 아니었을까?

멀쩡히 물건 사러 왔던 손님 옷에 잉크를 쏟았다.

그것도 모자라 그가 당장 옷을 물어내라고 할까 봐, 나는 어찌했었던가. 가련하게 눈물 한 방울을 톡, 떨구며 이거 비싼 거 아니냐고 물었었지.

그 치졸하고 옹졸한 마음을 혹시 그가 알아차리진 않았을까, 며칠 내내 발을 동동 굴렀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아주 제대로 된 셔츠를 선물하자! 셔츠가 뭐야. 세트로 사, 세트로!

그렇게 마을 상업지구로 향한 나는, 척 보기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한 양장점 앞에 섰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그의 취향도 치수도 모르는데. 어쩌지?

나는 코트 주머니 속에 손을 깊숙이 찔러 넣고 고민했다.

흠. 언제는 대책이 있었던가. 가자!

양장점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머리가 군데군데 희끗희끗한 노신사가 나를 반겼다.

지팡이를 짚고 선 그의 자세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어서 오시죠. 레이디.”

“안녕하세요.”

“이곳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아델트 유일의 최고급 양장점이랍니다. 숙녀 분께서는 무엇을 찾으시는지요?”

“음…. 신사용 정장을 하나 사려고 하는데요.”

“그렇다면 레이디께서 이곳에 오신 것은 행운이군요.”

“예?”

“저, 덴버라 하이츠. 이곳에서 평생 옷을 만들며 아델트의 유행을 선도했답니다.”

하늘을 향해 치솟아 오른 덴버라의 콧수염만큼 그의 자부심 또한 대단해 보였다.

“아델트의 유행이라니. 무척 궁금하네요.”

내가 미소로 화답하자 그가 대화가 통한다는 듯 다가와 속삭였다.

“아델트의 유행은, 모두 카시안 폰 아델트 공작님께서 이끄신답니다.”

뜻밖의 소리를 들은 내 눈이 크게 뜨였다.

“공작님이 이곳에서 옷을 맞추시나요?”

“그럼요. 저희 가문은 대대로 아델트의 모든 주인을 모셨으니까요.”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일이 이렇게 풀리다니!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네요. 마침 제가 공작님께 옷을 한 벌 선물할 참이거든요.”

“… 예? 실례지만 혹 레이디께서 공작님의 숨겨둔 정혼자라거나….”

“아, 아니에요! 그저 제가 실례를 범한 일이 있어 보답하려는 것뿐입니다.”

나는 손사래를 치며 항변했다.

그러나 덴버라의 가늘어진 눈에는 여전히 의문스러움이 가득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공작님께서는 이런 화려하지 않은 복식을 즐겨 입으신답니다.”

그는 흰색 윙카라 셔츠와 검정색 베스트, 그리고 오버코트를 선보였다. 대체로 장식 하나 없이 무난하고 심플했다. 그러나 그가 걸친다면 말이 달라지겠지.

“이거라면 매일 입으실 수 있겠군요.”

네? … 제가 선물할 옷을 카시안이 매일 입는다고요?

왜인지 구두 속에 갇힌 발가락들이 자꾸만 꼼질꼼질 안으로 곱아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

“이봐. 내가 오늘 극비리에 도는 소문을 들었는데. 저번 로또 당첨자가 글쎄 아델트로 이사 갔다는군!”

“그게 정말인가? 호페른도 아니고 아델트가 확실하단 말이지?”

“그렇대도! 이거 원. 누가 당첨자인지만 알면 알랑방귀라도 뀌어서 한 몫 챙겨보려 했건만. 나도는 소문이라곤 여자란 것뿐이니, 답답해서 살 수가 있나!”

“그 큰 당첨금을 혼자서 홀라당 가져가 버리다니 정말 너무하지 않은가? 도대체 황실에서는 왜 이토록 정체를 함구하고 있느냔 말이야!”

시장 골목에서 두 남자가 씩씩거렸다.

‘당신 같은 사람들 때문에 신원을 밝히지 않는다는 걸 모르나 보네. 쯧.’

소피아 엘링턴은 헛된 꿈을 꾸며 투덜대는 두 남자를 지나쳐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아직 그는 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자리에 앉아 자로 잰 듯 뭉툭하게 잘라낸 긴 단발머리를 비비 꼬았다.

[“소… 소피아! 네가 제대로 된 귀족 아가씨라면 그런 머리를 할 순 없다!”]

허리까지 내려오던 긴 머리카락을 자른 것은, 순전히 그녀를 체스 말처럼 여기는 부모를 향한 반항이었다. 그러나 충동적으로 자른 것 치고는 퍽 마음에 들었다.

멀미가 날 정도로 꾸불대던 레이스가 잔뜩 달린 드레스를 벗어 던졌을 때는 또 어떻고.

소피아는 목덜미를 잡고 쓰러지는 시늉을 하던 제 부모를 생각하며 키득거렸다.

그 순간 그녀의 약속 상대, 라튼 레트랑이 도착했다.

어색하게 앉은 그들 사이에는 좀처럼 이렇다 할 말이 없었다. 한참이나 이어진 무거운 정적을 깬 것은 소피아였다.

“혹시 오늘도 저번처럼 도망가실 생각이신가요?”

“예? 도망이라니….”

“왜, 저번 첫 만남에. 절 여기 혼자 두고 가셨잖아요.”

라튼 레트랑은 그녀의 말에 시아라를 떠올렸다. 시아라에게 뺨을 맞은 날. 그날도 이 레스토랑에 앉아있었으니.

“그때는…. 죄송합니다.”

제 모친 틸다 레트랑의 성화에 못 이겨 결국 이 여자, 소피아 엘링턴을 다시 만나러 나왔다.

얄궂게도 또 그때 그 자리였다. 유리창을 통해 길거리가 훤히 내다보이는. 바로 그 자리 말이다.

라튼 레트랑은 무의식적으로 바깥을 흘끔 쳐다보았다.

오늘도 그녀가 나타날 것 같았다. 차라리 그러길 바랐다. 여기 내가 있어. 어서 나타나서 나를 보고 한 번 더 울어줘. 시아라, 제발 부탁이야.

그의 엄마가 시아라에게 남자가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했다.

그러나 라튼은 제 눈으로 직접 보기 전까지 그 말을 믿지 않기로 했다.

그녀가 저를 두고 절대 그럴 리 없으니. 그들은 서로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그러니 이번에 이 여자를 만나는 것을 마지막으로, 더는 엄마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다. 어쩌면 그의 인생을 통틀어 처음인 일이었다.

라튼은 고개를 떨구고 마른 한숨을 내뱉었다. 테이블에는 벌써 음식이 차려져 있었지만, 그는 한 입도 먹지 못했다. 벌써 한 달이 넘도록 시아라에 관한 소식을 들을 길이 없으니. 음식이 도무지 목구멍 뒤로 넘어가지를 않았다.

“사실, 또 저를 두고 가신대도 저는 상관없어요.”

“… 예…? 아, 죄송합니다. 제가 다른 생각을 하느라. 뭐라고 하셨었죠?”

넋이 나간 사람처럼 구는 라튼과 달리, 소피아는 제 몫으로 나온 사슴 스테이크를 썰었다.

잘게 조각낸 고기 한 점을 포크로 톡 찍어 입에 넣는 모습은, 누가 보아도 기품이 넘치는 숙녀였다.

그녀는 말없이 음식을 먹었다. 그러기를 한참, 포크를 내려놓고 앞에 놓인 냅킨으로 입 주변을 정리했다.

“아무래도 저희는 같은 마음인 것 같네요.”

“같은 마음이라뇨?”

“라튼 레트랑 씨. 저와 결혼할 생각이 있으신가요?”

“아…. 그게….”

“전, 없습니다.”

“…….”

“그런데도 이 자리에 나온 건 부모님의 의사를 꺾을 길이 없던 것뿐이지요.”

라튼은 고개를 들어 소피아를 응시했다.

“저번과는 완벽히 다른 제 머리 모양도 눈치 못 채실 정도라면, 그건 라튼 레트랑 씨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 죄송합니다.”

“죄송할 필요 없어요. 제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선 부모님의 장단을 어느 정도 맞춰드릴 필요가 있거든요. 그래서 레트랑 씨의 도움도 필요하구요.”

“제 도움이라뇨?”

“저희, 잠시 연인인 척하는 것이 좋겠어요.”

그런 부탁을 하는 사람 치고 소피아에게는 아무런 감흥이 느껴지지 않았다.

목소리의 고저마저 변함이 없고, 오히려 아까보다도 더욱 차가운 말투와 표정이었다.

그녀의 잿빛 눈동자에는 그를 향한 어떠한 열망도 없음이 또렷이 전해졌다.

그녀는 귀밑으로 흘러내린 검은색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라튼은 그제야 알아차렸다. 아, 이 여자가 머리를 잘랐구나.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혹시 알아요? 레트랑 씨도 원하는 것을 얻게 될지.”

라튼 레트랑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어차피 가짜 연애.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그래, 이러면 나도 엄마 눈을 피해 시아라를 찾으러 다닐 수 있겠어.’

“… 좋습니다.”

본격적으로 황실 근위대 훈련이 시작하기까지 두 달. 그 안에 모든 것을 제 자리에 되돌리고 그녀와 결혼하리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