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갑자기 내 스스로가 재활용도 못 하는 쓰레기가 된 것 같았다. 당장 벽에다 얼굴이라도 들이받고 싶은 심정이었다.
“죄, 죄송해요! 제가 괜히 그런 말을 꺼내서…!”
나는 망할 주둥아리를 손바닥으로 찰싹찰싹 때렸다. 민망함에 허둥거리는 내 모습을 보며 카시안은 설핏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마저도 왜 슬퍼 보이는지. 하, 난 갱생 불가 쓰레기야.
“괜찮습니다. 벌써 오래된 일이니.”
“힘드셨겠네요.”
“뭐, 조금요.”
“큼…! 이 집은 제가 소중하게 사용하겠습니다. 제가 마음에 안 드시겠지만, 그래도….”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카시안이 한쪽 눈을 살짝 찡그리며 고개를 삐뚜름하게 기울였다.
“그야…. 공작님께서 기다리셨던 분이 아니니까요.”
“저는 좋은데요.”
“네?”
“좋다구요.”
“그게 무슨….”
“레이디 시아라, 저는 당신이 마음에 들어요.”
“네? 어…. 저, 저도 이 집이 마음에 들어요. 진심으로요.”
“다행이네요.”
아니, 뭐 이렇게 훅 들어와? 하마터면 오해할 뻔했네.
나는 이제 다 식어버린 찻잔을 입술에 가져다 댔다. 그러자 어쩐지 뜨거워진 낯이 겨우 식는 듯했다.
“귀여운 아이였어요.”
찻물 한 모금을 채 들이키기도 전에 카시안이 말을 이었다.
“너무 작아서 자꾸만 눈이 가고.”
“…….”
추억이라도 회상하는 듯 우수에 젖은 그의 눈동자는 잔잔한 호수만큼 깊었다. 발을 담그는 순간 그 형체가 보이지 않을 만치 어두컴컴했다.
“분명 모두가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그런 아이였어요.”
“아아….”
나는 도무지 뭐라 반응해야 할지 몰라 그냥 고개만 끄덕거렸다.
“노란색과 파란색을 유달리 좋아했구요.”
“그래서 벽 색깔도….”
그가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렸다.
“그러니 이 집을 산 사람이 시아라, 당신이라 좋습니다.”
갑자기 손바닥이 간질거렸다.
나는 당장이라도 목검이 있는 방으로 들어가 허공에다 검을 휘두르고 싶은 기분에 휩싸였다.
이 남자는 분명 자기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도 모를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쩌면 저런 낯뜨거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을 수 있다는 말인가!
차마 무슨 말로 대꾸해야 할지 몰라 입만 뻥긋거리고 있을 때, 정원에서 시끌시끌한 소리가 들려왔다.
거실의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더니, 유리창에 코와 입술을 찰싹 붙이고 우리를 보며 반갑게 손을 흔드는 레오가 보였다. 그 뒤로 난감해하는 펠릭스와 그의 손을 잡고 히죽 웃고 있는 레아까지.
그들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제야 뜨거웠던 양 볼이 차게 식는 기분이 들었다.
“누나! 멋쟁이 공작님!”
문을 열어주자 레오는 기다렸다는 듯 현관으로 와다다 뛰어 들어왔다. 부리나케 신발을 벗어 던진 아이가 내 품에 쏙 안기더니, 귓가에 소곤거렸다.
“누나, 이제 공작님이랑 친구야?”
나는 카시안을 한 번 힐끗 보고 난 뒤, 레오에게 답했다.
“응. 이제 공작님이랑 친구야.”
“그럼 우리 다 같이 놀 수 있는 거야?”
“그건 레오가 한 번 부탁해봐.”
눈까지 꼭 감고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던 아이가 이번에는 카시안에게 달려갔다.
“공작님!”
“안녕, 레오. 밖에서 놀다가 온 거야?”
“네! 펠릭스 형아가 자전거 타는 법 알려줬어요! 공작님도 자전거 탈 수 있어요?”
“응. 다음엔 공작님이랑 탈까?”
“네! 좋아요!”
레오의 얼굴에 한껏 기대감이 피어올랐다.
“그런데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까 다음에 또 놀러 올게. 괜찮지?”
“내일도! 다음날도! 매일매일 와도 좋아요! 저랑 레아랑 펠릭스 형아는 맨날 여기에 있거든요.”
“그래? 펠릭스 형도 같이 와?”
“네!”
“매일매일?”
레오가 긍정하려던 그 순간, 펠릭스가 응접실에 앉은 카시안을 향해 꾸벅 인사했다. 그 역시 고개를 살짝 까딱했다.
“알겠어. 누나한테 허락받고 또 올게.”
아이는 카시안의 약속에 신이 나서 방방 뛰어다녔다. 그 모습을 기특하게 지켜보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 그러시겠어요?”
현관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던 그가 걸음을 멈췄다. 그의 시선이 거실에서 레아와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는 펠릭스에게 향했다.
그 장면을 한참이나 물끄러미 응시하던 그가 뒤돌아 내 이름을 불렀다.
“시아라.”
“네?”
“저도, 애들 잘 봅니다.”
으음…. 그래서요…?
*
공작이 되돌아갔다.
펠릭스는 아까 그 공작의 표정을 다시 떠올렸다. 무지막지하게도 싸늘했던 표정을.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있음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인사를 건넸을 뿐인데 그리도 차가운 시선을 던질 리 없을 테니.
“누나, 공작님이랑 얘기는 잘 했어?”
“아, 응. 생각보다 괜찮으신 분인 것 같아.”
“흐음, 그래?”
‘내가 잘못 느낀 건가?’
뭐, 누나가 좋다면 좋은 거니까. 그럼 내 예감이 틀린 게 맞지!
“참! 며칠 전에 누나가 먹고 싶다고 그랬던 도너츠 사 오는 걸 깜빡했다! 지금 사 올게.”
“뭐? 저녁 먹어야지!”
“안 돼. 그거 오늘이 마지막이래. 자전거 타고 다녀오면 금방이니까, 혹시 늦으면 먼저 먹고 있어!”
“하나도 안 남기고 다 먹어 버릴 거야!”
그녀가 키득 웃으며 장난스레 말했다. 거짓말. 올 때까지 기다릴 거면서.
그녀의 장난에 펠릭스도 다정히 맞받아쳤다.
“푸핫, 그럼 배고프다고 종일 문 앞에 쪼그려 앉아있어야지! 도너츠도 다 내꺼야!”
그는 밖으로 나와 서둘러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펠릭스 루크, 불쌍하다며 모두에게 동정받던 소년.
이유도 모를 불치병으로 병상에 누워있는 엄마와 소식이 끊겨버린 아빠를 원망하지도 못하고 살았다. 그에게는 그럴 시간조차 사치였으니까. 불평 대신 돈이라도 한 푼 더 벌어야만 했다.
어떠한 희망도, 기대도 없는 비참한 삶. 그에게 그런 삶은 일상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시아라와 아이들과 함께 보내는 하루하루가 행복했다.
정말로, 가족이라도 된 것 같잖아. 가족이라니. 상상만으로도 그의 양 볼에는 미소를 머금은 보조개가 깊게 패었다.
흡족한 기분으로 한참을 달리는데, 저 앞에 아델트 공작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의 한 손에는 어제저녁 시아라가 열심히 포장한 선물이 들려있었다.
‘아…. 저 선물….’
공작님한테 드리려고 했던 거구나.
그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 계속 전진했다. 그러나 곧 예상치 못한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뭐야, 나 또 인사해야 해?’
이대로 직진하면 곧 그를 스쳐 지나가는데.
‘해야 해? 말아야 해? 해? 말아? 해?’
아씨, 뭐야! 완전 민망해! 말이든 마차든 타고 가지 도대체 왜 걸어가는 거야? 공작이라더니, 시간이 남아도나?
아까 집에서 인사할 때 느꼈던 어색하고 차가운 기류. 그것이 펠릭스를 멈칫하게 했다.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던 그는 그만….
앞에 있던 커다란 돌부리를 보지 못하고 그대로 미끄러져 버렸다.
우당탕탕 거리는 요란한 소리에 카시안은 뒤를 돌았다. 그리고 그가 ‘오.’하고 작게 감탄하는 모습을 펠릭스는 보고 말았다.
‘망했다.’
으악, 짜증나!
카시안은 고꾸라져있는 펠릭스와 저만치 날아간 자전거를 번갈아 보더니,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시 제 갈 길을 갔다.
그것이 넘어진 그의 낯을 더욱 뜨겁게 만들었다.
왱왱 회전하는 자전거 바퀴 소리가 멎어갈 때 즈음 펠릭스가 일어나 다시 페달을 밟았다.
그러나 바퀴에 바람이 빠져버려 제대로 굴러가지 않았다.
‘젠장, 젠장!’
그는 이 거지 같은 상황을 욕하며 자전거를 끌고 걸었다.
공작의 뒤를 따라 걸으니 왜인지 알량한 자존심이 상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 카시안이 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펠릭스 역시 멈칫했다. 앞서 걷던 이를 신경 쓰지 않으려 무던히 애썼음에도.
공작이 뒤를 돌아 펠릭스를 응시했다. 여전히 차가운, 그런 눈을 하고서는.
“저한테 볼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아니.”
펠릭스는 이 어색한 상황이 일 초만 더 이어져도 곧 죽을지도 모르겠다 생각했다. 그래서 아무 말이나 내뱉기로 했다.
“오, 오늘 날씨 좋네요! 그렇죠?”
카시안은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 반응이 없었다.
‘와, 스몰토크는 날씨부터라며!’
누나, 나 어떻게 해. 이다음은 뭘까. 직업? 옷? 취미?
펠릭스의 머리가 데굴데굴 굴러갔다. 으아, 다 때려치워!
“그거. 누나가 어젯밤에 진짜 열심히 포장한 거예요.”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시아라가 준비한 선물을 주제로 삼기로 했다.
그리고 그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아델트 공작이 처음으로 호기심 어린 눈을 하고 그를 바라보았으니.
“어제도 같이 있었나 보지?”
물론 공작의 대답은 꽤 공격적이었지만.
“네.”
“밤에?”
“네.”
“무슨 사이기에?”
“친구요. 친구는 밤에 같이 있으면 안 되나요?”
펠릭스 역시 도전적으로 물었다. 그러나 그는 어깨를 한번 으쓱할 뿐이었다.
“뭐, 좋을 대로.”
지지부진한 신경전이 끝나갈 때 즈음, 각각 공작저와 시장으로 향하는 갈림길이 보였다.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펠릭스는 가능한 예의를 차려 인사했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시장으로 향했다.
주먹을 움켜쥔 그의 손이 살짝 떨렸다.
‘누나. 저 사람 하나도 안 괜찮아!’
누나가 속고 있는 게 분명해!
*
“공작 각하. 대체 그 선물은 뭡니까?”
“몰라도 돼.”
“에이. 이제 한 번 풀어보시죠. 그러고 계신지도 벌써 세 시간이나 지났습니다.”
“뭐라는 거야. 신경 쓰지 말고 꺼져.”
카시안은 수 시간 째 그저 뭔가를 귀한 보석 다루듯 바라보고 있었다. 알버트가 가까이 가서 보니 포장지를 뜯지도 않은 선물이었다.
“누가 보면 그 안에 다이아몬드라도 잔뜩 들어있는 줄 알겠어요.”
알버트가 조용히 툴툴거렸다.
“맞아.”
“아하.”
그의 비서는 이제 해탈한 사람처럼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카시안이 귀가했을 때, 그는 환희에 찬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왔을 때보다도 더 기뻐 보였다.
게다가 집무실에 앉아서는 연신 히죽거리는 것이 아닌가. 바로 저 선물 때문에!
그러니 이 저택의 호기심 대장 알버트가 저 선물의 출처를 궁금해하는 것도 당연했다.
별것 아니라면 주군이 드디어 미쳤다는 뜻이니까!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선 당장이라도 저 선물을 뜯어보고 싶은 욕구가 일렁였다. 물론 선물의 정체를 알기 전에 목이 댕강 잘려 죽겠지만.
“아, 저번에 명하셨던 상업지구 보안강화 말입니다. 치안대를 두 배로 늘려서 편성해뒀습니다.”
“잘했어.”
“로또 당첨자가 진짜 아델트로 온 거랍니까?”
“그렇다는군.”
“각하는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알버트의 물음에 카시안이 무심히 대꾸했다.
“뭐가.”
“그 큰 당첨금을 누가 받았는지요!”
“별로.”
“아주 인생 재미없게 사시네요. 정말 대- 단하십니다.”
그는 여전히 툴툴거리는 비서의 말을 무시했다.
“참, 며칠 뒤에 저택으로 아이들을 초대할 거야. 장난감이랑 이벤트 좀 준비해 줘.”
“예? 갑자기 아이들이라뇨? 몇 명이나요?”
“두 명.”
알버트는 이젠 주군이 하다 하다 별 희한한 부탁을 다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재빠르게 답했다. 그는 아주 유능한 비서였으므로.
“걱정하지 마시죠. 애들이랑 놀아주는 게 또 제 전문입니다.”
아주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카시안은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분명 그에게서 저 비슷한 말을 이미 들어본 것 같은.
그는 흠칫하고 놀라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알버트는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순간 망했다는 생각이 먹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너…. 그거 또 뻥…. 망치면 안 돼.”
“걱정하지 마시래도요.”
카시안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
그러나 후회해 봐야, 이미 늦은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