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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맞고 튀었는데 공작님이 집착한다-18화 (18/135)

18.

[“저도, 애들 잘 봅니다.”]

카시안이 저런 뜬금없는 말을 남기고 떠났던 이틀 뒤, 그에게서 편지 한 장이 도착했다. 내일 아이들을 공작 저에 초대한다는 내용이었다.

오, 진짜 애들이랑 놀아주려는 건가? 왜지?

혹시 카시안은 보육이 취미일까?

나는 한나의 레스토랑에 케이크를 사러 갔다가 그녀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

“네? 애들이 어디에 초대받았다구요?”

“아델트 공작님 댁이요.”

한나는 스르륵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녀가 손에 들고 있던 행주는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거길…. 레아랑 레오가 도대체 왜….”

사실 나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도 쩔쩔매는 그녀에게 그가 나쁜 사람은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 일러주었다.

그 뒤로 한참이나 수다를 떨다가, 그녀는 내게 작은 부탁 하나를 했다. 나는 그것을 흔쾌히 수락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 아이들은 평소보다도 훨씬 들떠 보였다.

보푸라기 하나 없이 말끔한 새 옷과 단정하게 손질된 금발 머리를 보아하니, 아침부터 한나가 꽤 신경 썼음이 틀림없었다.

마차는 약속 시각보다도 더 일찍 도착했다.

털모자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레아의 머리카락을 정리해주고 있을 때, 마차에서 한 남자가 내렸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델트 공작 각하의 기사 벤이라고 합니다. 시아라 양 맞으십니까?”

나는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벤 경. 바쁘실 텐데 괜한 폐를 끼친 게 아닌지 모르겠어요.”

“아닙니다. 각하께서 특별히 부탁하셨습니다.”

“그럼, 아이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시아라 양도 함께 가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으음, 뭔가 잘못 알고 계신 것 같아요. 초대장엔 아이들을 초대한다고 쓰여 있었거든요.”

카시안의 기사 벤은 난처한 기색이었으나, 그래도 별수 있나.

내 손을 잡고 있던 아이들은 올망졸망한 눈으로 마차만 바라보고 있었다. 입도 헤, 하고 벌어진 것이, 아무래도 금빛 번쩍한 마차에 얼른 타고 싶은 모양이다.

나는 서둘러 아이들을 마차에 태웠다.

마차 문을 닫은 뒤에, 벤을 향해 공손히 인사했다.

“오늘 하루 잘 부탁드립니다.”

“… 어라… 이러면….”

“언니, 우리 잘 놀다가 올게!”

“누나, 그래도 나는 멋쟁이 공작님보다 누나가 더 좋아. 내 마음 알지?”

“레오야. 그런 말은 누나 눈을 보고 해야지.”

왜 내 눈을 못 마주치니. 응?

레아와 레오는 해맑게 웃으며 고사리 같은 양손을 흔들었다.

“기사 아저씨! 멋쟁이 공작님한테 우리 빨리 가요. 아, 얼른요! 출발!”

레오는 창밖으로 손을 내밀어 마차 옆구리를 탕탕 두드렸다.

아이들이 재촉하자 벤은 하는 수 없이 마차에 올라탔다. 연신 뒷머리를 매만지는 그의 모습이 퍽 고민스러워 보이긴 했다.

그래도 어쩐담. 난 초대받은 적도 없는걸!

곧 아이들을 태운 마차가 떠났다.

나는 마차가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오도카니 서 있었다. 다그닥거리던 말발굽 소리도 아스라이 물러갔다.

세상이 고요해지자 문득 아이들의 소란스러움마저 다 허상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제야 비로소, 이제 더는 혼자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

한나의 프란츠 레스토랑은 직접 만든 초코케이크와 향긋한 원두커피로 유명했다. 그러나 요새 이곳에서 제일 잘 나가는 디저트는, 가운데에 설탕과 견과류를 잔뜩 넣어 기름에 구운 와플이었다.

이 와플 덕에 레스토랑은 늘 문전성시를 이루었고, 금세 입소문을 타, 수도에 분점까지 차릴 계획도 세웠다.

그 때문에 그녀의 남편 파울 프란츠는 아직 수도에 있었다. 따라서, 홀로 가게를 관리하는 한나가 자리를 비우고 볼일을 보러 다니기란 쉽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내게 했던 부탁은 퍽 간단했다.

아델트의 병원에 가서 레아의 약을 타와 줄 수 있냐는 것이었으니까.

[“약이요? 레아가 어디 아픈 건가요?”]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만…. 워낙 몸이 약하게 태어난지라….”]

나는 지난밤 한나와 나누었던 대화를 상기해 보았다.

얼마 전에는 병원에 입원까지 했었다고 하니. 눈이 내렸던 지난날, 다급하게 레오가 날 찾아왔던 것도 단번에 이해가 되었다.

어디선가 티끌 하나 없이 맑은 레아의 웃음소리와, 그녀를 지키기 위해 용감한 기사님이 되겠다던 레오의 외침이 들려왔다.

괜스레 마음이 착잡해진 나는 서둘러 병원으로 향했다.

도착하자마자 약을 타고 다시 돌아가려는데, 일층 대기실 의자에 낯익은 얼굴이 앉아있었다.

“펠릭스?”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몸을 한껏 웅크린 채, 맨바닥만 내다보는 중이었다.

나는 살금살금 다가가 그의 등을 톡, 두드렸다. 그러자 움찔 놀란 펠릭스가 고개를 들었다.

“시아라 누나?”

“여기서 뭐 해. 어디 아파?”

“… 그럴 리가. 누나야말로 왜 여기 있어? 혹시 아픈 거야?”

“아니. 나는 레아 약 좀 타가려고.”

나는 레아의 약 봉투를 흔들어 보였다.

“아…. 다행이다. 볼 일 다 본 거면 집에 같이 가자. 나도 막 가려던 참이었어.”

“그래.”

병원의 유리문을 열고 나오자 조금은 따뜻해진 바람이 우리를 반겼다.

다 같이 하얀 눈밭 위를 달리던 것이 바로 어제 일 같은데, 이제 곧 초록의 봄이 오려는 모양이다.

우리는 정문으로 이어지는 산책로를 함께 걸었다.

그 길 위에서, 펠릭스는 유달리 말이 없었다. 평소라면 내게 짓궂게 장난을 쳤을 텐데. 오늘따라 하얗게 질려버린 그의 안색이 안쓰럽게만 보였다.

나는 풋풋한 풀내음이 뒤섞인 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시고 내뱉기를 반복했다. 분위기 환기를 위해 일부러 “후!하!후!하!” 따위의 소리를 내며 촐싹거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너도 한 번 해봐. 기분 좋아져.”

노력이 가상했는지 그의 입술 사이로 웃음이 툭 터져 나왔다.

“그러면 진짜 괜찮아져?”

“응. 날 믿어 봐. 이렇게 최대한 크게 숨을 들이마신 뒤에!”

다시 한 번 몸소 시범을 보여주자, 머뭇거리던 펠릭스가 고개를 뒤로 젖히고 숨을 들이마셨다.

“팍! 내뱉는 거야.”

“하!”

“어때?”

“뭐, 조금 나아진 것 같기도 하네.”

한결 가벼워진 미소를 짓던 그가 고민이 있는 듯 잠시 뜸을 들였다.

“있잖아. 엄마가 이 병원에 계셔.”

“응?”

“꽤 오래전부터 아팠거든. 지금도 엄마한테 다녀오던 길이었어.”

“아…. 어디가 아프시길래?”

“아무도 이유를 모르겠데.”

“…….”

“그래도, 전보다는 좋아졌다니까. 곧 괜찮아지겠지.”

문득, 엘리나의 별장에서 내게 화를 내던 그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그가 그토록 필사적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결국….

지나간 일을 떠올리는 나의 걸음걸이가 눈에 띄게 느려졌다. 그러자 한 발자국 성큼 앞서 나아간 펠릭스가, 몸을 뱅그르르 돌려 나를 마주 보았다.

“나한테, 다 잘 될 거라고 한 번만 말해주면 안 돼?”

물기를 머금은 갈색 눈동자가 내 대답을 간절하게 바라고 있었다.

“누나가 말해주면 진짜로 그럴 것 같은데.”

“다 잘 될 거야. 꼭.”

나는 손을 뻗어 펠릭스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러자 원래의 미소를 되찾은 그가 다시 내 옆에 나란히 섰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그는 계속해서 웃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

소피아는 달뜬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드디어 아델트에 갈 수 있다니!”

엘링턴 백작의 분노와 함께 떨어진 외출금지령에 그녀는 한동안 저택에만 머물러야 했다. 제 마음대로 잘라버린 머리카락 탓이었다.

그나마 라튼 레트랑인지 돼트랑인지. 관심도 없는 그 남자와 연애 중이라고 하니 짧은 외출을 허락받았다. 한 가지 자유를 겨우 얻은 셈이었다.

종일 제 엄마 타령이나 해대던 멍청한 남자가 이렇게나 도움이 되다니! 그것만으로도 그는 쓸모를 다했다.

게다가 요새 그 남자는 어찌나 얼뜨기처럼 굴던가. 이름을 불러도 대답도 하지 않고 자꾸 허둥대질 않나. 길거리에 금발의 여자가 지나갈 때마다 달려가 얼굴을 확인하질 않나.

“아무리 생각해도 멍청하단 말이야.”

그녀는 혀를 쯧쯧대며 가볍게 발걸음을 옮겼다.

엘링턴 백작 부부가 애지중지 키운 귀한 막내딸, 소피아 엘링턴.

그녀는 부모님의 그림자 아래서 풍요로웠다. 그게 돈이 얼마가 드는 일이든, 얼마나 귀한 것이든. 딸의 말 한마디면 부부는 무엇이든 그녀의 품에 안겼다.

소피아는 무서울 것이 없었다. 세상은 그녀를 위해 돌아가니까. 원하는 건 다 이룰 수 있으니까!

분명 그렇게 믿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였을까? 그 그림자가 발에 채워진 족쇄였음을 알아차린 것이.

아마 아델트 병원에 첫 봉사를 나갔을 때부터였던 것 같다. 친구를 따라 우연히 갔던 그곳에서, 소피아는 한 남자를 마주쳤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 실없이 웃고 있었지만, 그늘 속에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의 어두움을 알아차린 것은 분명 자기 자신뿐일 것이라고, 소피아는 생각했다.

그런 그를 만난 뒤로 그녀는 의사가 되고 싶었고, 그 비상한 머리로 단번에 의대까지 합격했다.

그러나 소피아가 학교에 다닌 지 일 년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 엘링턴 백작이 그녀에게 말했다.

“그쯤 했으면 인제 그만하거라.”

“그게 무슨 소리세요?”

“어느 귀족의 딸이 의사가 된단 말이냐! 가문의 이름에 먹칠할 생각 말거라!”

그 이후로 시작된 백작의 반대는 지금까지 이어졌다.

“너는 그저 좋은 가문에 시집가 남편 밑에서 잘 먹고 잘 살면 된다. 소피아, 그게 네가 가문을 위해 마땅히 해야 할 일이야.”

소피아는 코웃음 쳤다.

‘참나, 그래놓고 나더러 레트랑 백작가의 그 머저리랑 결혼하라니!’

아니, 이왕 좋은 가문과 연을 맺어 줄 거였으면 차고 남는 게 미혼 공작들인데, 레트랑 백작 가문?

‘아버지가 돈에 눈이 먼 거지!’

그녀가 쯧 하고 혀를 찼다.

물론 예의 그 공작들을 짝지어 준대도 절대 사절이었지만.

“내가 그만두나 봐라.”

원하는 건, 다 가질 거야.

그녀가 굳세게 다짐했다.

동시에 저 멀리서 아델트로 향하는 기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화통에서 뿜어져 넘실대는 연기처럼 그녀의 마음도 살랑거렸다.

소피아는 좌석에 앉아 가방에서 책을 꺼내 들었다. 그를 처음 만났던 날, 그가 읽고 있던 책이었다.

제목만 보아도 자꾸만 그 남자가 떠올라서, 푸스스 웃음이 나왔다.

오늘은 왠지 예감이 좋다. 그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이게 얼마 만일까? 너무 설레!

그녀는 가슴팍에 책을 껴안고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런 그녀의 소원이 정말로 이루어진 걸까?

아델트 병원 정문에 도착한 소피아의 시야에 그토록 갈망해왔던 이가 들어왔다.

비록 뒷모습이었지만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매일매일 그와 재회할 날만 기다렸으니까!

그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펠릭…!”

소피아 엘링턴이 그의 이름을 힘주어 부르려고 했다.

그러나 그때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마주 선 여자가 너무 예뻐 어쩌지 못하겠다는 그의 표정이었다.

병원에서 마주칠 때마다 늘 우울하게만 보였던 그가, 웃고 있었다. 너무도 행복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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