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카시안은 새벽 동이 트기 전부터, 온 집안 곳곳을 부산스럽게 돌아다녔다.
처음에는 자신의 방 거울 앞에서 옷과 머리를 몇 번씩 점검했다. 그다음으로는 집무실을, 복도와 응접실, 심지어 여태껏 한 번도 들러 본 적 없던 주방까지. 하녀들은 전례 없던 그의 행동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아라가 이곳에 온다고 생각하니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시아라 집으로, 아이들을 태울 마차를 출발시킨 순간부터는 아예 사고회로가 정지되어버린 것 같았다. 정원 벤치에 앉아있던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무디게 흐르는 시간을 탓하는 것뿐이었다.
그저 마른 침만 꼴깍꼴깍 삼키던 그때, 마차가 들어왔다.
“시아라는?”
“그게…. 편지에 아이들만 초대하셨다고…….”
“뭐?”
카시안은 눈을 질끈 감고 눈썹까지 내려온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마른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그러나 누굴 탓하랴. 당신도 함께 오라는 말을 쓸까 말까, 하고 무한히 망설였던 것은 저 자신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애들만 쏙 보낼 줄은 몰랐지. 하아.’
이 여자는 진짜 눈치가 없는 건가.
아이들은 마차 안에서 연신 두리번대고 있었다.
“우와…! 엄청 커…!”
한쪽 창문으로 바깥을 내다보면 드넓은 정원과 물이 힘차게 뿜어져 나오는 분수대가. 다른 쪽 창밖에는 동화책에서나 보던 커다란 궁전이 있었다.
이토록 커다란 성을 본 적 없던 아이들의 입이 헤, 벌어졌다.
카시안은 차오르는 아쉬움을 애써 삼키고 마차의 문을 직접 열었다.
“어서 와.”
레아와 레오를 차례로 번쩍 들어 마차에서 내려주고는, 양손에 아이들의 손을 하나씩 잡았다. 좌절한 카시안의 발걸음과는 사뭇 다르게, 광활한 정원을 가로지르는 작은 발걸음들이 한껏 들떠있었다.
그렇게 세 사람은 응접실에 도착했다.
응접실의 벽면은 알버트와 가신들이 오려 붙인 오색 색종이로 반짝거렸다. 테이블 위엔 달콤한 과자들이, 의자에는 토끼와 유니콘 인형이 놓여있었다.
“유니콘!”
레아는 한달음에 달려가서 인형을 안아 들고 볼에 비비적거렸다. 뿔 주변에 달린 부드러운 털이 닿을 때마다 기분이 좋은지 꺄르르르 웃었다.
레오도 그 옆에서 나무 방패를 들고 한껏 제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카시안은 아이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만족해하며 함께 의자에 앉았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불이 꺼지고 순식간에 공간이 어두워졌다.
“연극인가 봐!”
한껏 기대감이 고조된 아이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곧 불이 켜지고 막이 올랐다.
레아와 레오가 양 손뼉을 부딪치자 알버트가 등장했다.
기괴한 피에로 탈을 뒤집어쓴 채로.
시뻘겋게 찢어진 입꼬리가 눈 바로 밑까지 이어지고, 망할 눈알은 검은콩 하나 처박아둔 것처럼 작았다. 그에 비해 흰자는 대륙처럼 넓고.
그 기괴한 몰골에 카시안은 스르륵 벌어지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저 새끼가 미쳤나?
허억, 하고 숨을 들이마신 아이들의 박수 소리가 멎었다. 레아는 곧 울음을 터뜨렸다. 울먹거리기는 레오 역시 마찬가지였다.
“으아앙. 무, 무서워. 저게 뭐야! 귀신이야!”
“레, 레아야! 보, 보지 마!”
레오가 제 양 손바닥으로 레아의 눈을 다급히 가렸다. 본인의 눈도 꾹 감은 채였다.
알버트는 아이들이 울자 저도 깜짝 놀라서 아이들을 향해 뛰어갔다.
그러나 결과는….
“으아아아악! 귀신이! 괴물이 온다!”
더 안 좋았다.
“… 알버트.”
침음에 잠긴 카시안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의 목소리는 싸늘했다. 주군의 얼이 나간 표정, 그것 역시 싸늘했다. 그리고 이 상황, 말해 무엇하랴.
알버트는 확실히 짐작했다. 주군의 다음 말은 ‘나가.’일 것이라고.
“… 나….”
‘가.’ 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알버트는 응접실에서 도망쳐 나왔다.
그 바람에 옷을 갈아입고 패기 넘치게 등장하는 중이었던 벤과 부딪혔다. 두 사람은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서둘러 정신을 차린 알버트가 벤의 행색을 살폈다. 그는 갈비뼈가 다 보이는 좀비 분장을 하고 있었다.
“… 안 돼. 절대 안 돼.”
“뭐야. 왜 그냥 나와?”
“우린, 틀렸어.”
“뭐?”
“튀어.”
*
알버트와 벤이 사라지고 나서도 레아의 울음은 한동안 멈추지 않았다.
레오는 나쁜 악당들로부터 레아를 지키지 못했다고 씩씩댔다.
“레아야, 공작님이 미안해.”
카시안이 의자 아래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아이를 달랬다.
“저 귀신들이 혹시 레아랑 레오 잡으러 온 거 아니에요?”
아이가 히끅 거리며 물었다.
“아니야. 누가 또 저렇게 괴롭히면, 공작님이 다 목을 꺾…. 무찔러 줄게. 그러니까 이제 괜찮아.”
“나도! 오빠가 레아 지켜줄 거야.”
그렇게 말하는 레오의 볼도 새빨갰지만, 나무칼과 방패를 들고 말하는 아이의 기세는 꽤 용감했다.
“진짜?”
“응. 오빠는 한 개도 안 무서워!”
카시안이 레오의 머리를 기특하다는 듯이 쓰다듬었다.
뒤이어 레아에게 유니콘 인형을 쥐어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비로소 눈물을 멈췄다.
‘저것들을 그냥.’
그는 아이들이 돌아가면 당장 저 도움 안 되는 놈들부터 처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미안해. 재밌게 놀아주고 싶었는데. 공작님이 잘못했어.”
“이제 괴물들 안 와요?”
“응. 두 번 다신 여기 못 와.”
“그러면 그냥….”
코끝이 빨개진 레아가 훌쩍거리며 말을 우물거렸다.
“책 읽어주시면 안 돼요?”
“책? 무슨 책 읽어줄까? 아니지. 같이 고르러 갈까?”
레아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아이들의 손을 잡고 서재로 향했다.
커다란 문 앞에 서서 문을 열자, 수천 권의 책이 빽빽이 꽂혀있는 서고가 나타났다. 수도에 있는 작은 도서관 하나를 통째로 옮겨둔 것과 다름없는 규모였다.
레아의 눈이 초롱초롱 빛나며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책이… 엄청 많아….”
“마음에 들어?”
“네! 이런 거 처음 봐요!”
“그럼, 우리 뭐 읽을까?”
레아는 세워져 있는 책들을 손가락으로 훑으며 통로를 걸었다. 그 걸음은 조금씩 빨라져 어느새 깡충대며 뛰고 있었다. 그 울퉁불퉁한 느낌과 오래된 책 향기가 어찌나 기분 좋게 만들던지. 어디다 눈을 돌려도 전부 책이라니!
달음박질로 통로를 한 바퀴 돌고 나서 다시 카시안의 앞에 섰다. 숨이 찬 듯 헉헉거리는 아이의 양 뺨이 생기를 머금었다.
“공작님. 여기에 책이 너무 너무 많아서 못 고르겠어요!”
“그게 다가 아니야.”
카시안의 목말을 탄 레아가 단숨에 위로 훅, 올라갔다.
“어때? 여기도 많지?”
“네! 진짜 진짜 많아요!”
레아는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 옆에서 졸졸 따라다니던 레오는 현기증을 느꼈는지 이내 의자에 풀썩 쓰러져 앉았다.
“이거! 이것도요! 어… 이것도! 다, 다 읽고 싶어요! 어떡해요?”
“다 읽으면 되지.”
카시안은 레아가 뽑아 드는 책들을 받아들었다. 그것들을 갈무리해 책상으로 가져갔다.
그는 레아를 무릎 위에 앉히고 책을 읽어주기 시작했다. 그 중저음의 목소리가 어찌나 나른한지. 옆에 앉은 레오는 어느새 끔뻑 잠이 들었다.
그러나 책을 골라온 아이는 예쁜 문장이 나올 때마다 손뼉을 치고, 제 입으로 또 한 번 소리 내 읽었다. 그게 꼭 노랫소리처럼 맑았다.
“책 읽는 게 좋아?”
“네. 레아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펠릭스 오빠가 맨날 책 읽어줬어요!”
“… 펠릭스 오빠?”
“네! 공작님도 저번에 우리 오빠 보셨죠? 엄청 잘생겼어요.”
그 말에 카시안은 갈색 머리털이 곱슬곱슬 개…, 아니, 강아지 같던 남자를 잠시 떠올렸다.
‘잘생기긴 무슨.’
비실비실한 게 힘도 하나 못 쓰게 생겼던데.
그는 곧바로 코웃음 쳤다.
“앞으로 시간은 많으니까. 레아가 원하면 여기 맨날 놀러 와도 좋아.”
“정말요?”
“응.”
레아의 얼굴에 함박꽃이 피었다.
“다음번엔 언니도 같이 오면 더 좋고.”
그렇게 말한 것은 정말 무심결이었다. 그러나 아이의 눈이 사뭇 날렵해졌다.
“공작님 우리 언니 좋아해요?”
그 말을 듣자마자 카시안의 심장이 덜커덕 내려앉았다.
이 어린애 눈에도 그렇게 보이나?
“아, 아니?”
좋아하냐고? 내가? 그 애를?
“왜 안 좋아해요? 레아는 언니 엄청 좋아하는데. 공작님 나빠요.”
“응?”
“우리 언니 안 좋아하면 나쁜 사람이에요.”
레아가 볼에 바람을 넣고 입술을 삐죽였다. 카시안은 침을 꿀꺽 삼켰다.
시아라. 그녀가 내게 뭐지.
질문을 던지자 자연히 그녀가 떠오른다. 그러자 또 제멋대로 얼굴이 화끈거렸다. 행여 달아오른 양 뺨을 아이에게 들킬까 봐 고개를 돌렸다.
무슨 말이든 내뱉기 위해 애써보았으나 목구멍이 콱 막힌 듯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턱 끝까지 차오른 말을 내뱉었다.
“… 좋아하는 게 뭔데?”
“공작님은 어른이면서 왜 몰라요?”
“…….”
“너무 졸려도 그것만 생각하면 자꾸만 웃음이 나와요. 그래서 잠들 수가 없대요. 그리고 옷장에서 제일 멋진 옷을 꺼내는 거예요.”
그 말에 카시안이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았다.
평소에는 애써 찾지 않아도 주어진 옷들.
그러나 오늘만은 시아라를 생각하며 차려입은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누가 그래?”
“책에서 그랬어요.”
레아가 손바닥으로 그의 눈가를 살포시 눌렀다.
“공작님. 어젯밤에 못 잤어요?”
“… 응.”
“그럼 공작님도 착한 사람이에요.”
“뭐?”
아이는 그저 예쁘게 웃었다.
“그런 말은 처음 듣는데.”
카시안이 품에 안긴 아이의 볼을 장난스레 꼬집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언니랑 매일 놀러 올게요. 저만 믿으세요.”
어쩐지 다섯 살짜리 꼬마 아이가 제 머리 위에서 놀고 있다고 느낀 첫 순간이었다.
*
해가 저물어갈 즈음, 집 앞에 아이들이 탄 마차가 도착했다.
이번에는 카시안도 함께 타고 있었다.
“여기까지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저도 덕분에 재밌었는걸요.”
“저기…. 공작님, 제 선물은 마음에 드셨나요?”
“… 선물? … 아. 아직 바빠서 확인을 못 했네요.”
혹시 그렇게 별로였던 걸까? 자신감을 잃은 내 목소리가 살짝 움츠러들었다.
“혹시 마음에 안 드시면, 다른 거로 바꾸셔도 괜찮아요.”
“그런 게 아니라….”
그가 머뭇거리자 나는 그냥 괜찮다고 미소지었다. 정말로 괜찮으니까.
“레아랑 레오도 재밌게 놀다가 왔어?”
“응! 무서운 괴물도 있었는데! 그건 공작님이랑 같이 무찌르기로 했어!”
레오가 답했다.
“무서운 괴물?”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레아는? 레아도 재밌었어?”
“응!”
그러자 갑자기 카시안이 헛기침을 했다. 그의 손을 꼭 잡고 있던 레아가 알았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
“응?”
“공작님 집에는 책이 엄청 엄청 많아!”
“그래서 좋았구나?”
“응! 그러니까 나 거기에 매일매일 가고 싶어. 우리 같이 가면 안 돼요?”
“으응…? 너희 집에도 책 많잖아. 지난주에도 한나가 동화 전집을 잔뜩 사 들고 가던 걸 봤는 걸?”
그 말에 레아는 황급히 도리질했다.
“아, 아냐! 나는 동화 같은 거 안 읽어!”
“거짓말. 어제도 나한테 읽어 달랬으면서.”
“레, 레아는 사실 다른 책 읽고 싶었어.”
“그럼 언니가 선물해 줄게.”
“도, 돈은 저금하는 거랬어! 막 쓰면 안 돼! 그러다가 인생 망해!”
나는 두 귀를 의심했다.
“그래도 책을 읽고 싶은 거라면 얼마든지 써도 괜찮아. 레아를 위한 거잖아.”
“고, 공작님 집은 유니콘 인형도 있고…!”
“음, 그건 언니 집에도 있는 걸? 강아지도 있고 오리 인형도 사줬잖아.”
“어…. 괴, 괴물. 괴물이 없잖아. 괴물을 보러 가야 해.”
괴물……?
그녀의 말에 이번엔 레오가 경악했다. 배신감으로 가득 찬 표정이었다.
“너 그거 무서웠잖아! 울었잖아!”
“아니야. 귀여웠어. 그러니까 꼭 가야 해!”
“그치만 레아야, 공작님은 바쁘신걸.”
레아는 도움을 바라는 눈초리로 카시안을 올려다봤다.
그는 끅끅대며 참고 있던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곤 나를 향해 말했다.
“언제든 놀러 와요. 난 좋으니까.”
그의 목소리가 말캉거리는 푸딩처럼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아니, 이 남자는 저번부터 왜 이렇게 좋다는 말을 달고 사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