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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맞고 튀었는데 공작님이 집착한다-20화 (20/135)

20.

카시안은 아이들을 집에 데려다주고 돌아와서야 시아라가 건넸던 선물을 풀었다.

어서 뜯어보라고 알버트가 수없이 말했지만, 그는 포장지 하나 흠집 내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밤새 정성껏 포장했다 하지 않았던가. 할 수만 있다면 유리 장식장에 진열해 평생 가보처럼 가지고 있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정도였다.

그런데 선물이 마음에 드냐고 물을 줄이야. 어째서 그 당연한 질문을 생각지도 못했는지.

어쩜 이렇게 매번 모자란 짓만 하는 걸까. 저도 모르게 자조 섞인 한숨이 튀어나왔다.

그는 매듭져있는 붉은색 리본을 당겨 풀었다.

포장지를 벗겨내자 덴버라 양장점의 로고가 찍힌 상자가 들어있었다.

“옷을 상하게 해서 죄송하다더니.”

카시안의 입술 사이로 픽, 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상자 뚜껑을 여니 곱게 접힌 검은색 정장과 흰 셔츠가 담겨 있었다. 다만 귀족들이 무도회에서 즐겨 입는 뒷자락이 긴 연미복 형태가 아닌 턱시도였다.

그는 입고 있던 옷을 벗고 새 옷을 걸쳤다. 누가 봐도 제 옷이라고 할 만큼 몸에 꼭 들어맞았다.

“마음에 꼭 드네.”

사실 상자에 사탕 하나가 들어있었대도 좋았을 테지만. 사탕이 아니라 쓰레기였대도. 볼품없는 쓰레기를 포장할 때조차 그를 생각했다는 뜻일 테니.

때마침 알버트가 들어왔다.

쌍둥이를 겁먹게 한 죄로 호되게 욕을 먹은 그의 어깨가 마른오징어처럼 쪼그라들어있었다.

“… 각하? 부르셨나요?”

“무도회를 열지.”

“네?”

카시안은 두 번 설명하는 대신, 목까지 잠궜던 셔츠의 단추를 다시 풀어 내렸다.

“그러니까…. 도대체 왜요?”

“무도회가 무도회지. 뭐가 더 필요해?”

“아니, 명분은 있어야죠.”

“선물로 턱시도를 받았는데 이걸 썩힐 수 없잖아. 아무 이유나 좋으니 초대장 돌려.”

알버트는 주인의 억지에 당장이라도 반박하고 싶었으나, 자신이 저지른 실수가 있어 말을 아꼈다.

‘그보다, 선물? 저걸 어디서 받아오신 거지?’

그간 공작저로 배달된 편지와 선물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먼지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은, 누구보다 알버트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저 옷은 예사 것이 아닐 터였다. 그 말인즉슨….

‘이번에 실수하면 모가지다.’

3층 집무실을 빠져나온 알버트가 곧바로 집안의 가신들을 소집했다.

아델트 공작가의 첫 무도회. 아무런 흠이 없어야만 한다!

*

나는 정원에 앉아 귀족의 예법에 대해 상세히 기술한 책을 읽고 있었다.

그러자 에벨 가문에서 보냈던 어린 시절이 새록새록 되살아났다. 매번 동그라미가 처져 있던 내 시험지를 부모님에게 자랑하던 때도 있었지.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때 공부했던 제국의 역사도 어렴풋이 기억났다. 그 중, 분명 아델트에 관련된 것이 있었는데…. 그게 뭐더라…?

카시안 폰 아델트. 마법사. 아델트의 주인….

“아! 생각났다!”

대대로 아델트의 주인들은 마법사의 피가 흘렀다.

정체를 숨기던 대다수의 마법사들과는 다르게, 아델트 가문만은 그 사실을 당당하게 밝혔다.

그들의 주요 능력은 ‘방어’였고, 황제로부터 그 공을 인정받아 빠르게 입지를 다질 수 있었다.

[“제국의 북쪽은 아델트 가문에서 만든 결계 덕분에 철옹성이나 다름없죠. 그래서 아델트를 ‘제국의 수호자’라고 부른답니다.”]

가정교사가 했던 말까지 떠올리고 나서야, 나는 감탄했다.

“나…. 무려 ‘제국의 수호자’랑 아는 사이야. 크으으.”

가만, 그런데 카시안이 분명 자기는 방어 빼고 다 잘한다고 그랬던 것 같은데?

뭐지? 혹시 내 몸에 철갑옷 휘두르면 내가 쓰러질까 봐 그랬나?

골똘하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엄마야!”

어느새 내 옆에 카시안이 서 있었다. 축지법이라도 쓰는 건가? 깜짝이야!

“현관문이 열려있기에. 잘 지냈어요?”

“엊그제 봤으면서 뭘 새삼스럽게….”

나는 방금까지 그를 생각했던 것을 들킬까 봐, 괜히 먼 산만 바라보았다.

“그래도. 보고 싶었어요.”

“… 카시안 폰 아델트 공작님.”

“네?”

“어쩜 그런 남사스러운 말을 자꾸만 아무렇지도 않게 하세요?”

“하고 싶으니까요.”

으윽…. 졌다, 내가 졌어. 나는 체념한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오늘은 어쩐 일로 오셨어요?”

“이걸 전해주려고요.”

“이게 뭔데요?”

“무도회 초대장이요.”

“… 무도회요?”

이게 다 망할 엘리나 때문이다.

‘무도회’라는 단어만 들어도 심장이 쿵쿵거리는 것을 보아하니, 엘리나 트리탄 때문에 트라우마가 생긴 것이 분명했다.

“당신이 선물한 옷이 아주 마음에 들어서요.”

“그건 정말 다행인데….”

나는 양장점의 덴버라 씨와 나눴던 대화를 똑똑히 기억한다.

분명 그는, 턱시도를 선물하면 공작님이 절대 입으실 일이 없을 거라며 내 선택을 극구 말렸었다. 그는 절대 파티에 참석하지 않는다고.

그래서 파티용 턱시도를 고른 거였는데!

덴버라 씨가 혹 사기꾼은 아니었을까 심히 고민스러웠다.

나는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 저, 저는 아무래도 안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눈썹을 위아래로 꿈틀거리던 그의 미간이 잠시간 좁아졌다.

“왜요?”

“아! 오해하시지는 마세요. 그저 저는, 경험도 부족하고….”

“그런 이유라면 함께 가도 괜찮겠네요.”

“어째서….”

“그야 저도 처음이니까요.”

“네?”

아무것도 없던 그의 손안에서 갑자기 노란색 프리지아 꽃 한 송이가 나타났다.

“레이디 시아라, 제 첫 무도회 파트너가 되어줄래요?”

딸꾹.

나도 모르는 새 제멋대로 터져 나온 딸꾹질이,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졌다.

*

케이프의 후드를 뒤집어쓴 초라한 행색의 남자가 로지 잡화점의 문을 닫고 나왔다. 그는 곧장 옆 골목에 세워져 있는 마차로 달려갔다.

“저…, 마님. 여기 잡화점 주인은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 라튼 도련님과 그 아가씨가 만나던 사이라는 것도 몰랐던 듯하고요.”

허름한 나무 마차의 문에 걸린 검은 장막을 거두며, 남자가 말했다.

“그럴 리가 없잖아! 도대체가 일을 제대로 하는 게 맞는 거야?”

쇠를 긁는 듯 날카로운 목소리로 틸다 레트랑이 소리쳤다.

“분명 그 잡화점에서 돈을 대준 남자를 만났을 거야. 어떻게든 찾아!”

틸다의 남편 레트랑 백작은, 가문의 망신이라며 그녀에게 근신 처분을 내렸다. 도대체 소문이 어디까지 난 건지!

그 이후로 그녀의 행동은 더욱 조심스러웠다. 도무지 일에 진전이 보이지 않자 오늘은 남편 몰래 집 밖으로 나온 참이었다.

그럼에도 직접 나설 수 없던 그녀는, 하인 여럿을 시켜 시아라의 행방을 추적하도록 했다.

분명 저 잡화점의 주인은 그 아이의 소식을 알 터였다. 아니, 알아야만 했다.

이제 더는 연고도 없는 그 계집애가 도움을 받을 곳이란 저곳뿐일 테니!

그러나 헛수고였다.

곧이어 흥신소를 다녀온 다른 하인도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어떻게 한 달이 넘도록 아무것도 찾을 수 없는 거지? 누군가 나서서 방해하는 게 아니고서야! 게다가 이상한 점은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틸다는 마차 밖에 서 있던 자신의 호위에게 물었다.

“아리안. 그때 그 계집이랑 함께 왔던 남자 말이다.”

“… 주인님.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분명 시아라 양은 찻집에 혼자 왔습니다.”

“그게 아니라고! 내가 분명! 검은 가면 쓴 남자를 보았다고 하지 않았느냐!”

아리안은 자신의 옆에 서 있던 다른 용병들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러자 모두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분명 그 아가씨 혼자였습니다.”

“맞습니다.”

틸다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마법이라도 쓴 게 아닌 이상,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는 거지?

‘내가 충격으로 헛걸 본 거란 소리야?’

그녀는 마차의 문에 달린 나무 걸쇠를 움켜쥐었다. 기다란 손톱이 나무를 파고들다 못해 부러질 정도로 힘껏.

‘그럴 리가. 확실히 남자가 있었어.’

흑요석같이 새까만 눈과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 그자를 찾아야 해!

부릅뜬 그녀의 눈에 시뻘건 핏줄이 돋아났다.

*

“어디서 갑자기 한기가….”

갑자기 온몸에 오한이 들면서 온 털이 쭈뼛 서는 기분이 들었다.

이 원인 모를 이질적인 감각을 떨쳐내기 위해 나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섰다.

“기분 전환엔 튀김이지!”

겨우 무도회 초대를 프러포즈라도 하듯 내뱉고 간 카시안 때문에 속이 다 시끄러웠다. 결국, 거절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입에 기름칠이 부족했나보다 싶어 시장의 튀김 도넛 가게로 가서 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주인아줌마가 하필 내 도넛을 태우고야 마셨다. 도넛이야 기다리면 된다지만. 그 새까맣게 타버린 도넛이 검은 머리의 카시안을 떠오르게 했다.

“… 남사스러워!!”

나도 모르게 툭 튀어나온 말에 주인아줌마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미안해요, 아가씨…. 얼른 다시….”

“예…? 아, 아니에요. 도넛 때문이 아니라…. 죄송해요.”

나는 고개를 숙여 달아오른 낯을 가리고, 이미 튀겨진 다른 도넛을 들고 나왔다.

기분 전환을 위해 집까지 그대로 걸어가는 것을 선택했다.

그러나 좁은 숲길로 들어서자, 갑자기 수상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뒤쪽에서 자꾸 누군가 쫓아오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내가 걸음을 서두르면 그 기척도 빨라지고, 늦추면 함께 느려졌다.

계속해서 주변을 맴돌던 발소리가 턱밑에 다다랐음을 느꼈을 때,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두 걸음 정도 떨어진 거리에 척 보기에도 불량배다운 남자가 서 있었다.

비열하게 웃으며 건들거리는 폼이 퍽 예사롭지 않았다. 위아래로 박아 넣은 금이빨이 어찌나 번쩍거리던지.

문제는….

아무런 위협이 안 된다는 거였다.

나는 그간 시장에서 오랜 기간 일하며 별꼴을 다 보며 자랐다. 수도의 저잣거리에 이따금 출몰하는 불량배들과는 이미 안면 트고 안부까지 묻고 지내왔었으니. 처음 그들과 싸울 땐 부모님 안부가 오고 갔는데. 나중엔 정이라도 든 건지 서로의 건강을 묻는 안부로 변했었지.

게다가 당첨금을 받아오던 날은 또 어떻고?

그러니 눈앞에 피라미 같은 놈팡이 하나쯤이야 겁도 나지 않았다.

“아가씨. 내가 계속 지켜보니까 돈이 많아 보이던데. 그 돈 나도 좀 나눠 쓸까?”

나눠 쓰자고? 거짓말….

“그건…. 안 되겠는데요.”

“무사히 살아서 집에 가고 싶다면 순순히 주는 게 좋을 거야!”

그는 삼류 연극에서나 나올 것 같은 뻔한 대사를 내뱉었다.

“아저씨. 그냥 집에 가서 쉬셔요.”

“이년이? 어서 가진 돈 이리 내!”

말이 안 통하는군.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길거리에 나뒹구는 나무 막대 하나를 주워들었다.

“그, 그걸로 뭐! 네가 날 때리기라도 하려고? 크하하, 웃기지도 않는군!”

이 강도는 나를 얕잡아 보고 있었다. 아마 그것이 필패의 길이라는 것을 이 자는 모르겠지.

나는 그렉 아저씨의 체육관에서 만났던 오빠 한 명을 떠올렸다.

그는 요령 없이 검을 휘둘러대던 나에게 이런 말을 남기고 떠났었다.

[“시아라, 제일 완벽한 호신법은 거기를 걷어차는 거다. 그리고 튀는 거지.”]

그래. 그냥 한 방에 끝내자.

나는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섰다. 남자는 여전히 비웃음을 머금고 흥미롭게 지켜보기만 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자연스레 각목으로 향했다.

나를 무시하면서도, 혹시? 하며 방심하는,

지금이다!

힘차게 가랑이 사이를 걷어찼다.

“허어억…!”

남자의 무릎이 땅에 쿵 떨어지자 나는 그대로 줄행랑을 쳤다.

주님, 오늘 한 명 갑니다!

당당하게 강도를 무찌르고 도망치는데, 누군가와 쿵, 부딪혔다.

중심을 잃을 뻔한 나를 붙잡아 준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했는데….

카시안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엘리나 트리탄?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멀쩡히 일어났던 내가 그의 품에 풀썩 쓰러졌다.

“아아. 카시안. 저 너무 무서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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