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누군가와 쿵, 부딪힌 후에, 나는 재빨리 정신을 차렸다.
나를 붙잡아 준 사람이 카시안이라는 것도 놀라운데, 그 뒤에 서 있는 게 엘리나라는 것은 더욱더 경악스러웠다.
카시안은 여전히 한 손으로 내 등허리를 지탱하고 있었다.
“시아라. 괜찮아요?”
“… 네. 죄송해요. 공작님은요? 제가 서둘러 달리느라 앞을 못 살폈어요.”
“저도 괜찮습니다. 그보다 무슨 일 있었어요?”
중심을 잡은 내가 양발로 땅을 짚었다. 그제야 그의 손이 천천히 내 몸에서 떨어졌다.
“아니요. 아무 일도 아니에요.”
자연스레 대화를 나누고 있는 우리에게, 부담스러운 시선 하나가 바늘처럼 꽂혔다.
나는 그런 엘리나를 신경 쓰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그러나 내 멋대로 구겨지는 얼굴까지는 어쩌지 못했다.
“레이디 시아라?”
“아…. 레이디 엘리나. 또 뵙네요. 반가워요.”
“영애가 여기를 어떻게…. 그보다 아델트 공작님과 영애가 이미 아는 사이 일 줄은 몰랐네요.”
엘리나는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리고서는 한쪽 눈썹을 티 안 나게 치뜨며, 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녀의 시선은 곧 카시안에게로 향했다. 마치 내가 이 자리에 없는 것처럼.
“아델트 공작님. 그러면 제가 드린 제안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제안이라니. 무슨 소리를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그야, 트리탄 후작가와 아델트 공작가의 약호… ㄴ.”
엘리나의 입 모양을 가만 보아하니, 그녀의 입에서 ‘약혼’이라는 단어가 나오려는 것 같았다.
하긴, 이상할 것도 없었다. 잘 나가는 귀족 가문 자제들끼리의 연애는, 저잣거리만 돌아다니던 평민들에게도 늘 화젯거리였으니까. 그게 뭐 별거라고.
그러나 그 상대가 하필 카시안과 엘리나라는 것은 이상하게 참을 수 없었다.
뭔가 내가 악독한 시어머니가 된 것 같았지만, “이 결혼, 나는 반댈세!”를 외치고 싶었다.
결국, 엘리나는 하려던 말을 더 이상 이어나갈 수 없었다.
“아아. 카시안. 저 너무 무서워요.”
내가 그의 품에 풀썩 쓰러져 안겨버렸으니.
“시… 아라?”
“흐흑, 공작님. 아니, 카시안. 저기, 쩌어- 기에서 강도가 저를….”
내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따라 카시안의 눈동자가 굴러갔다.
저 멀리 아직도 쓰러진 채로 사경을 헤매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그러나 나는 카시안이 내 장단에 적당히 맞춰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한쪽 눈을 깜빡깜빡하며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효과는 매우 강력했다!
그는 나를 똑바로 일으켜 세운 뒤 무서운 표정으로 물었다.
“저 남자가 괴롭혔어요?”
물론, 결과적으로 내가 저 남자‘를’ 괴롭힌 거지만….
나는 아주 세차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가서 죽여 놓을게요.”
“아, 아니요! 이미, 이미 다 해결했어요!”
“하아…. 당신은 왜 늘 이렇게….”
그 순간, 앙칼지고 새된 목소리가 카시안의 말을 뚝, 끊었다.
“카시안 폰 아델트 공작님.”
그의 뒤에 서 있다가 그대로 병풍이 되어버린 엘리나였다. 그녀는 분홍색 긴 머리카락을 나풀거리며 다가왔다. 이런 상황에서도 한 점 흐트러짐 없는 우아함을 유지하며.
“시아라 영애는 다친 곳 하나 없이 멀쩡해 보이는군요.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그녀는 카시안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며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나는 엘리나가 얼마나 악스러운 인간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저 순수하게만 보이는 미소 뒤에 숨기고 있을 시커먼 속내가 무엇인지 모를 리가 없지.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행히 제가 무술에 능하거든요.”
“영애가 범상치 않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아델트의 치안에 조금 더 신경을 써야겠군요.”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가 악의 없이 맑게 빛났다.
“그런데, 영애. 이쯤 하셨으면 이만 자리를 피해주시겠어요? 제가 아델트 공작님과 단둘이 논의해야 할 문제가 있어서요. 영애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중요한 문제이기에.”
아아…. 단둘이서.
왜 그게 묘하게 기분이 나쁘지?
나는 순진한 카시안이 저 여자의 정체도 모른 채 홀라당 넘어가는 일만은 막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단지 그 마음뿐으로, 이 상황에 조금만 개입하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가자, 어느새 카시안의 턱밑이었다. 그곳에서 고개를 들어 그의 검은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공작님. 저 아직도 심장이 콩콩 뛰는데, 집까지 데려다주시면 안 될까요?”
그러자 그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 가요. 같이.”
그가 내 손목을 살짝 움켜쥐고 우리 집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그러고 보니 여기, 저번에 말 타고 달려오던 카시안 때문에 넘어진 자리잖아?
그때는 나 혼자 씩씩거리면서 집으로 갔었는데, 이번에는….
내 손목을 감싼 커다란 손에서 그의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아, 아델트 공작님? 잠깐, 잠시만요!”
등 뒤로 들려온 엘리나의 카랑카랑한 고음이 숲을 가득 메웠다.
그러자 카시안이 걸음을 멈추고 짜증스럽게 뒤돌았다.
“엘리나 트리탄 영애. 일전에도 말했듯 아델트와 트리탄 가문 사이에 약혼이나 혼인 따위는 없을 겁니다. 그러니 이만 돌아가십시오. 왔던 길을 그대로 돌아가면 마차가 세워져 있을 테니, 배웅은 없어도 될 것 같군요.”
“그럼 무도회는요? 도대체 제게 언제 파트너 신청을 하실….”
“그쪽이 왜 제 무도회 파트너가 됩니까?”
“그야…!”
그녀의 얼굴이 잘 익은 사과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엘리나가 저토록 당황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기에, 나는 그 모습을 흥미진진하게 감상했다.
“그럼 공작님과 함께 아델트의 무도회에 입장할 영애가 정해져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그 말과 함께 카시안이 고개를 낮춰 나를 바라보았다.
“아마도요.”
그 집요한 시선에, 나는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가 돼서 입술만 달싹거렸다. 그러자 그가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럼, 이만 실례하죠.”
분노에 차 입술을 파르르 떠는 엘리나를 뒤로한 채, 우리는 등을 돌렸다.
*
숲을 빠져나와 집 앞에 다다를 즈음, 카시안이 내게 물었다.
“자, 이제 말해 봐요.”
“… 뭘요? 무도회 파트너요?”
“그건 내가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돼서. 그거 말고.”
“그럼 대체 뭘….”
“왜 당신한테 늘 위험한 일이 생기는 거죠?”
그가 눈을 가늘게 뜨며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의 질문에 나는 보육원 원장 제페토가 내게 입버릇처럼 내뱉던 단어를 떠올렸다.
“흐음, 그러게요. 아마도 제가 ‘불행을 몰고 오는 아이’라서 그런가 봐요.”
내가 최대한 담담하게 말하자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불행을 몰고 오는 아이….”
몇 번이고 그 말을 되풀이하던 그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아닌데.”
“네?”
“당신이 불행을 가져오는 사람이라면….”
“…….”
“내가 당신 때문에 이렇게 웃을 리가 없잖아요.”
“… 그거 제가 웃긴다는 소리인가요? 그런 말은 처음 듣는데.”
“네. 웃겨요.”
“…….”
“이상하고.”
욕인지 칭찬인지 모르겠는 그의 말을 곱씹어 생각하다 보니, 어느새 우리 집 대문 앞이었다.
“그럼 푹 쉬어요.”
“아델트 공작님!”
내게 작별을 건네고 돌아서는 그를 불러 세우자 그가 뒤돌았다.
“아까 카시안이라고 불러준 것도 좋았는데.”
“아이참! 그건 실수예요.”
나는 목을 큼큼 가다듬었다.
“저……. 같이 갈게요.”
막상 말을 내뱉자 별로 어려울 것이 없었다.
“공작님도…. 제 무도회 첫 파트너가 되어주세요.”
눈을 휘둥그레 뜬 카시안이 잠시간 멈칫했다.
그러나 곧 천천히 내게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얼마든지.”
그 순간 내 손등 위로, 정말 닿을 듯 말 듯 입술의 감촉이 느껴졌다. 정말이지 아득하고, 아찔했다.
그리고 그 순간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어느새 새파란 새순으로 뒤덮인 정원이었다.
아…. 봄이다. 진짜 봄이 왔나 보다.
이렇게 마음이 울렁거리는 것을 보아하니.
*
“오늘은 기분이 별론가 보네요.”
라튼 레트랑은 평소와는 새삼 다른 소피아 엘링턴을 보며 의문스럽게 물었다.
저를 만날 때마다 마음에 안 드는 티를 대놓고 내긴 했지만, 테이블 위에 놓인 음식은 보란 듯 다 먹어치우던 그녀였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접시를 앞으로 밀어놓고 팔짱만 낀 채로 앉아있었다.
어딘가 심사가 뒤틀려 보였다.
“신경 쓰지 마세요. 레트랑 씨가 금발 머리 여자만 보면 화들짝 놀라는 걸 보고, 제가 언제 관심이나 두던가요.”
“뭐, 그거야 그렇네요.”
소피아는 그대로 테이블에 얼굴을 묻었다. 메마른 날숨이 쏟아져 나오자 차라리 눈을 감았다.
금발의 여자. 그래, 펠릭스와 함께 있던 여자 또한 그랬다.
구불대는 머리카락 탓에 얼굴을 자세히 보지는 못했다만, 분명 그 여자 때문에 펠릭스가 웃고 있었다. 이 소피아 엘링턴이 아닌. 정체 모를 그 여자 때문에.
눈을 뜨자 흘러내린 자신의 검은 머리카락이 시야에 드리웠다.
금발이라. 눈앞에 앉은 라튼 레트랑 저 남자도, 내내 그리워했던 펠릭스 루크도. 다들 금발에 미치기라도 한 걸까.
“짜증 나….”
그게 뭐가 좋다고.
그녀의 중얼거림을 모른 척하던 라튼이 물었다.
“아델트는 같이 가실 겁니까?”
“제가 레트랑 씨랑 거길 왜 가나요.”
여전히 테이블에 얼굴을 묻은 그녀가 기계처럼 응했다. 어떤 감정도 담기지 않은 그 목소리엔 당치도 않은 소리를 듣는다는 듯한 한숨이 섞여 있었다.
“… 아델트.”
그러다가 곧, 고개를 휙 들어 올렸다.
“잠깐, 지금 아델트라고 하셨어요?”
“네.”
“거긴 왜요?”
“아델트 공작님이 주최하신 무도회에 참석하러요. 오늘 초대장이 도착했거든요.”
“가요.”
“방금은 싫다고….”
“잔말 말고, 가요.”
변덕이 심한 여자네.
라튼이 고개를 휘 내저으며 유리창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아버지 레트랑 백작에게 그의 엄마가 그간 저질러왔던 만행들을 넌지시 이야기했다.
물론 시아라와 찻집에서 있었던 일은 제외했다. 그러다가 레트랑 백작까지 그녀를 찾겠다고 난리 칠 수도 있으니까.
그러니까 그냥 사소한 일들을 풀었을 뿐이다. 예컨대, 가문의 자금을 아버지 모르게 빼돌렸다거나, 비밀리에 운영되는 이상한 파티 같은 곳에 참석했던 것 따위였다.
그것으로 그녀가 받은 처벌은 근신이었다. 처음으로 엄마를 배신했으나, 생각보다 마음이 무겁지는 않았다.
아주 사소한 것 하나도 그의 엄마 귀에 들어가게 해서는 안 된다고 가신들에게 미리 일러두었던 덕분일까. 아직 틸다는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수소문 끝에 라튼은 얕은 실마리 하나를 찾아냈다. 누군가 시아라, 그녀와 비슷한 생김새의 여자를 아델트에서 본 것 같다는 정보였다.
그녀를 볼 수만 있다면 그곳을 샅샅이 뒤져서라도 찾아내겠다고, 그가 다짐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시아라. 내가 곧 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