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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맞고 튀었는데 공작님이 집착한다-24화 (24/135)

24.

라튼과의 진절머리 나는 대화를 끝마치자 다시금 두통이 찾아왔다. 나는 카시안에게 양해를 구하고 홀로 파우더룸으로 향했다.

찬물로 얼굴의 열을 식히고 마음을 가라앉히던 찰나, 뒤에서 처음 듣는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곧 날아가시겠어요.”

거울에 비치는 검은색 단발머리 여자는, 분명 라튼의 파트너였다.

“지금 저한테 하신 말씀이세요?”

“이리저리 옮겨 다니시는 것을 보아하니, ‘철새’이신가 봐요.”

이건 또 뭐야?

무슨 도장 깨기도 아니고. 라튼 하나 해결했더니 세트로 또 다른 게 오네?

나는 완전히 몸을 돌려 그녀의 앞에 마주 보고 섰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치뜬 채로 나를 노려보는 중이었다.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 통 이해가 안 되네요.”

“그렇게 사람 마음 가지고 놀면 재밌어요?”

그녀의 잿빛 눈동자에는 묘한 분노가 들끓어 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제야, 이 여자가 왜 이렇게 낯익은지 깨달았다.

틸다 레트랑으로부터 갖은 모욕을 듣고 왔던 그 날. 그러니까, 물에 빠지고 로또에 당첨됐던 그 날. 라튼과 선을 보았던 여자였다.

‘내가 사라지고 라튼이랑 잘 만나고 있는 거면, 오히려 나한테 감사해야 하는 거 아니야?’

왜 갑자기 시비람?

“사람 마음을 가지고 놀다뇨. 제가요?”

“시치미 떼지 말아요. 우리 오빠랑 붙어서 웃고 떠들 때는 언제고. 지금은 아델트 공작님이라뇨?”

“우리 오빠? 기가 차서 정말. 이봐요 영애. 저는 그쪽 오빠한테 티끌만큼도 관심 없어요.”

“… 뭐라구요?”

“나는 관심도 없으니까 그쪽이나 지지고 볶고 잘 살라구요!”

내가 짜증스럽게 쏘아붙이자 그녀가 갑자기 울먹이기 시작했다.

“어떻게…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어요? 그 사람이 그렇게 행복하게 웃었는데…!”

아니…. 라튼이 그 정도로 좋은 거야?

걔가 힘들 생각하니까 이렇게 가슴이 미어터지는 거야 지금?

환장하겠네.

나는 과거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이 여자가 측은하기까지 했다.

“하아….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저는 당신의 사랑을 방해할 생각이 정말정말 눈-꼽만큼도 없답니다. 그러니 부디, 제게 향한 노여움은 푸세요.”

그러다가 문득, 나의 똥 마차를 힘껏 견인해갈 이 안타까운 여인의 이름이 궁금해졌다.

“실례지만, 영애 이름이…?”

“소피아 엘링턴이요.”

쌀쌀맞게 답하는 소피아를 향해 나는 사뭇 상냥하게 대꾸했다.

“조만간 소피아 레트랑 부인이 되겠네요. 축하해요.”

그 말을 마치자마자 소피아의 두 눈이 훼까닥 뒤집혔다.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로 싸늘한 기세에 나는 순간 움찔하고 말았다.

“누가…! 도대체 누가 그따위 호칭을 얻고 싶다고 그래요!!”

“네? ‘그쪽 오빠’랑 결혼 안 할 거예요?”

이제 그녀는 기절하기 직전이었다.

“소피아 레트라아아앙? 와, 진짜 싫어. 저한테 사과하세요. 당장!!”

“……?”

어디로 흘러갈지 가늠할 수 없는 골 때리는 대화의 향방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럼 그쪽 오빠가 도대체 누군데요?”

그러자 소피아가 단단히 끼고 있던 팔짱을 부드럽게 풀었다.

“펠릭스요.”

“… 네?”

“펠릭스 루크. 당신도 알잖아요.”

순간 잘못 들은 건가 싶어, 삐져나온 옆머리를 연신 귀에 걸며 되물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여전히 같았다.

“어떻게… 펠릭스를…?”

도대체 이 귀족 가문의 딸과 그가 무슨 연결고리가 있는 거지?

그리고 또….

“… 애초에 펠릭스를 좋아하는 게 진짜라면. 도대체 왜 저런 쓰레, 아니. 라튼이랑 여길 온 거예요?”

“그거야 사정이 있으니까요.”

… 너야말로 나쁜 애 아니야?

나는 뭐라 반박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보다 빠르게, 소피아와 내 옆에서 영문 모를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여기에 다 있었네요.”

굳이 얼굴을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이 목소리는….

“트리탄 영애.”

“반가워요, 레이디 시아라. 그리고…. 소피아.”

분홍색 머리를 우아하게 틀어 올린 엘리나가 나와 소피아를 향해 기껍게 인사했다.

“소피아, 왜 그동안 연락 안 했어요? 보고 싶었는데.”

“제가 그간 바빴거든요.”

“아! 엘링턴 백작께 들었답니다. 의대에 갔다고 하던데…. 혹, 의사가 되려는 건 아니겠지요? 그 말을 듣고 어찌나 마음이 안 좋았는지 몰라요!”

“제가 무엇이 되려 하든, 트리탄 영애가 걱정할 일이 아닙니다만.”

소피아의 잿빛 눈동자가 서릿발처럼 싸늘했다. 나를 추궁할 때보다도 훨씬 더.

“서운하게 트리탄 영애라뇨. 우리 꽤 친하잖아. 안 그래, 소피아?”

“그건 영애 생각이죠. 말씀이 끝나셨으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좋은 대화였어요.”

소피아는 정중하게 인사하고 돌아섰으나, 내뱉는 한 마디 한 마디에 짙은 혐오가 배어 있었다.

그녀가 사라지자 보랏빛 시선이 기다렸다는 듯 내게 닿았다.

“시아….”

“저도 좋은 대화였어요. 그럼 이만.”

나 역시 파우더룸을 벗어났다.

막무가내로 내게 화를 내던 소피아도 별로였지만, 엘리나는 더욱 끔찍했으므로.

*

“죄송해요. 너무 오래 기다리셨죠.”

“아니에요. 이제 좀 괜찮아요?”

나는 안절부절못하는 카시안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무도회가 열렸던 대연회장의 옆방에서는 자선경매가 막 시작하려는 참이었다.

그곳에는 다섯 명 정도가 앉을 수 있는 둥그런 테이블이 문 앞까지 줄지어 나열되어 있었다. 카시안과 나는 제일 앞에 있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곧이어 한 남자가 종을 울려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 자리에 계신 모든 신사 숙녀 여러분. 모두 여길 주목해주십시오!”

인중과 턱밑에 가느다랗게 매달린 수염 탓에 그는 간사하고 교활해 보였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어찌나 번지르르하던지. 연회장은 그를 추켜세우는 박수와 환호 소리로 가득했다.

홀라당 넘어가 버린 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자, 여러분! 이게 뭔지 아십니까?”

자리에 앉은 모든 귀족들이 콧수염 남자가 들고 있는 투명한 유리병에 집중했다.

“이게 바로 그 귀하다는 ‘환상의 물약’이라는 겁니다.”

“환상의 물약이라뇨?”

누군가 묻자 남자가 우쭐거리며 재빠르게 답했다.

“이 마법 물약을 마시면 누구의 마음이라도 알 수 있죠. 심지어 아무도 모르는 비밀 따위도 손쉽게 캐낼 수 있으니, 얼마나 대단한 약이겠습니까?”

“마법 물약이라니! 진짜 마법으로 만든 겁니까?”

“그럼요! 제가 동방대륙으로 건너가 마법사에게 직접 사 온 물건입니다! 이름하여 ‘맥컬리’!”

남자가 유리병을 흔들자 그 안에서 뽀얗고 불투명한 물약이 흔들렸다.

“세상에…! 이름도 멋져!”

“빛깔도 어쩜 저리 영롱할까. 진주로 만들었나 보오!”

귀족들의 눈동자가 너나 할 것 없이 형형하게 빛났다.

다른 사람의 속마음을 훔치는 마법의 물약이라니. 뭐야, 완전 신박하잖아?

나 역시 솔깃해 경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로 했다.

다만, 카시안 만큼은 미간을 강하게 찌푸렸다.

“시아라. 설마 저거 살 거예요?”

“네! 걱정 마세요. 공작님 속마음은 안 볼게요. 약속.”

나는 그의 손가락에 손도장까지 찍고 맹세했다.

“아니, 저거…. 아무런 마력ㄷ….”

그가 무어라 이야기했지만, 소란스럽게 달려드는 귀족들의 목소리에 그의 말은 먼지처럼 흩어졌다.

“천 드랑!”

“이천!”

“오천!”

역시, 이건 나한테만 흥미로운 상품이 아니었나 보다.

경매가는 쉼 없이 널뛰기를 반복했다.

“이만 드랑.”

나는 손을 들고 꽤 높은 가격을 외쳤다.

그러나 이곳은…. 제국에서 내로라하는 귀족들만 모인 자리였다. 이 정도의 금액은 당연히 아무것도 아니었는지, 계속해서 치솟아 올랐다.

지지부진한 각축전 끝에 내가 마지막으로 “십만 드랑!”이라고 호기롭게 외쳤으나, 내 뒤에 있던 누군가가 쏜살같이 낚아챘다.

“삼십만 드랑.”

뭐…?

삼십…. 와, 저거 나 잡화점에서 일할 때 3년을 꼬박 일해야 겨우 벌던 돈이었는데. 그걸 저 물약 하나에 쓴다고? 갑자기 머릿속에 가득하던 구매욕이 팍 식어버렸다.

내가 차라리 그 돈으로 저 동방대륙에 가고 말지.

다들 나와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그 뒤로 가격을 흥정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결국, 맥컬리는 삼십만 드랑에 낙찰되었다.

경매가 확정되자 주변에서는 경탄이 쏟아져 나왔다.

나 역시 그 앙칼진 목소리의 주인을 찾기 위해 뒤돌았다.

그 주인공은, 다름 아닌 소피아 엘링턴이었다.

그녀 역시 야생 늑대처럼 패기만만하게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한쪽 입꼬리를 비뚜름하게 추켜들며, 자기가 이겼다고 자랑이라도 하듯.

*

라튼 레트랑은 자기 손등에서 도통 사라지지 않는 검정색 구두 자국을 짜증스럽게 매만졌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지금 이 공간에서 벌어지는 모든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 무도회에 시아라가 있는 것도 모자라, 어째서 그녀의 옆에 아델트 공작이 있는 거지? 저 둘이 도대체 언제부터 아는 사이였다고?

그 순간, 제 엄마 틸다가 했던 말이 그의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그 애한테 남자가 있더구나.”]

그 말이 절대 사실일 리 없다고 믿었는데. 진짜였어?

라튼이 분하다는 듯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시아라는, 지난 3년 동안 단 한 번도 그의 곁을 떠난 적이 없었다. 그녀가 매번 입버릇처럼 하던 말은 “괜찮아.”였다.

하지만 라튼 또한 알고 있었다. 본인이 했던 행동들이, 그녀에게 상처로 남았다는 것을.

그러나 그는 어쩔 수 없었다. 시아라와 결혼하기 위해서는 순순히 엄마 말을 들어야겠다고, 그래서 엄마를 설득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비록 지금은 그녀가 몰락 귀족의 딸이라고 무시당할지언정, 미래에는 자신의 옆에서 백작 부인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게 해주려고. 라튼은 시아라의 고통을 그렇게 합리화해왔다.

그런데 왜 저 남자랑 같이 있는 거야?

그녀가 바닥에 엎드려 울부짖던 그를 내버려 둔 채 매몰차게 떠난 뒤, 누군가가 다시 라튼을 찾아왔다. 그는 그게 당연히 시아라 일 줄 알았다. 자신이 이토록 울면, 그녀는 늘 다시 돌아왔으니까.

라튼이 환희에 찬 얼굴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그 높은 곳에는, 검은 턱시도를 입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아델트 공작이 있었다. 그 눈빛은 하찮은 벌레를 쳐다보듯 무감각했다.

순간 라튼의 몸에 오싹한 전율이 흘렀다.

“… 저를 찾아오신 건가요?”

“말귀를 먹은 것 같기에.”

라튼은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출처를 알 수 없는 어떤 힘에 짓눌려 더욱 납작해져 갔다.

“이, 이게 지금 무슨…!”

아델트 공작이 그의 앞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아까 말이야.”

그가 라튼의 새빨간 머리카락을 귀 뒤로 걸어 넘겼다.

“이렇게 했던가?”

라튼이 흠칫 놀라 몸을 뒤로 뺐다.

“고, 공작 각하.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꼴에 귀족이라고. 이런 상황에서도 거지같은 예의를 차리네.”

카시안이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으며 긴 다리를 일으켰다. 그 상황에서도 라튼은 여전히 몸 하나를 꿈쩍할 수 없었다.

“네 가문은 입만 살아서 싫지만.”

한 걸음씩 다가오던 카시안의 발이 그대로 라튼의 손등을 지르밟았다.

“오늘은 이 손이 더 끔찍하군.”

“으… 으으아악!”

바닥에 떨어진 담뱃불을 밟아 끄듯, 구두를 몇 번이나 내리누르고 나서야, 그의 발이 멀어졌다. 그러나 라튼의 손등에는 선명한 구두 자국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었다. 낙인처럼.

그는 그것을 장갑으로 겨우 가리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서 라튼이 마주한 광경은, 그 커다란 돈을 아무렇지 않게 외쳐가며 신이 난 듯 경매에 참여하고 있는 시아라의 모습이었다.

‘… 시아라. 도대체 너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의 머릿속이 알 수 없는 분노와 혼란으로 뒤덮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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